189. 성장
“여기로 할게.”
“정말 좋은 선택이세요! 정령의 형태를 하고 계시니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거예요.”
폴카는 어째서 이곳을 선택했는지 꿰뚫어 보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선명한 영기를 그녀가 보지 못할 리 없었다.
“레어를 만들기 전에, 저 힘을 흡수하고 싶대.”
“그런 건 제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 요람에선 위대하신 분의 뜻이 최우선이에요.”
“아. 그것 때문이 아니라…… 내 정령들도 흡수해도 되나 해서.”
“위대하신 분께서 그걸 원하신다면 상관없어요.”
진이 현자를 바라보자,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이 바로 뜯어먹을 타이밍이었다.
[나의 계약자는 인간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아직은 나약하다.]
드래곤이 이렇게 대놓고 칭찬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인지 폴카는 깜짝 놀랐다.
[그러니, 계약자의 정령들과 함께 이 영기를 흡수할 필요가 있다. 우선, 힘을 흡수한 뒤 레어를 만들겠다.]
“예. 위대한 분이시여.”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무엇이든 말씀하소서. 저희는 위대한 분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약해 빠진 계약자를 도와라.]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현자는 폴카의 대답도 듣지 않고 호수로 날아갔다.
진은 시치미를 뚝 떼고, 곁으로 다가갔다.
“뭐래?”
“아. 위대한 분께서 진 님을 도와드리라고 하셨어요.”
“날?”
“예. 위대한 분의 목적은 진 님을 강하게 만드는 거 같아요.”
“그게 뚝딱 되는 것도 아닌데, 도와줄 게 있어?”
“그럼요.”
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연히 있겠지!’
영약도 좋고 아니면 용인족의 특급 비법도 좋다.
아무튼 지금은 합법적으로 뜯어먹을 수 있는 타이밍이다.
이걸 놓치면 바보였다.
“그런 방법이 있다고?”
“네! 아까 드셨던 차 기억하세요?”
“당연하지. 차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맛있게 마셨어.”
“그쵸? 그건 위대한 분께서 용인족을 위해 만들어 주신 특별한 차예요.”
“그래?”
어째 영혼이 막 맑아지는 거 같은 게 느낌이 좋다 싶었다.
게다가 특급 호구 인증 마크까지 박혀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차는 많이 희석한 거고, 그걸 연단해서 약으로 만든 게 있어요.”
“……그런 게 있어?”
차만 해도 그런 느낌이었는데, 농축한 약까지 있다고!?
“원래라면 절대 반출이 안 되는 물건이지만, 위대한 분께서 요구하셨으니 충분히 드릴 수 있어요.”
“그래도 되는 거야? 정말 귀하면 괜찮아.”
“위대한 분께서 만든 물건을 위대한 분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진은 양심 한구석이 찔려 왔다.
솔직히 말하면, 이게 그리 쉽게 반출되는 물건이 아닐 것이다.
귀한 만큼 복잡한 처리가 필요할 게 분명했다.
‘후. 세상을 위해서야.’
당연히 진은 찔리는 양심을 슬쩍 무시했다.
“고마워.”
“아니에요. 위대한 분을 도우며, 진님까지 도울 수 있어서 정말 좋은걸요.”
특급 호구는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진은 감탄했다.
‘성장하는 건 우리만이 아니었어.’
특급 호구 또한 호구를 넘어선 무언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 * *
폴카는 자신이 한 말은 지켰다.
“늦어서 죄송해요. 꺼내는 데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하더라고요.”
“아이고, 어려우면 내버려 두라니까.”
“아니에요. 위대한 분께서 원하신 거니까요. 장로님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어요.”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작은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야?”
“예. 장로님께서 말하시길 정령들이 영기를 흡수할 때 드시는 게 가장 좋다고 하셨어요.”
“고마워. 그렇게 할게.”
준비물이 도착했으니, 이제 이쪽도 움직일 차례였다.
[바로 시작할 거야! 호수 쪽으로 와!]
로메른은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수 근처에 마법진들이 떠올랐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폴카에게 말했다.
“좀 쉬고 있어.”
“네! 조심하세요!”
진은 폴카의 응원을 받으며, 호수 중앙으로 날아서 이동했다.
[저기 마법진 중앙에 자리 보이지? 그쪽에 자리 잡으면 돼.]
로메른의 인도에 따라 진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에 맞춰 정령들 또한 움직였다. 진을 중심으로 사방에 감싸듯 정령들이 자리를 잡았다.
[다들 자기 방향으로 오는 기운만 흡수해. 괜히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그렇게, 영기 흡수가 시작됐다.
정령들은 엄청난 속도로 영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진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폴카가 말했던 것처럼 영기 흡수가 시작되자마자 환단을 집어삼켰다.
‘이건…….’
기묘한 감각이었다.
일반적인 영약처럼 막대한 기운은 없었다.
그저, 차를 마실 때처럼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저 맑아진다고 하기엔 부족했다.
영혼 그 자체가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뭐지?’
그런 의문을 떠올릴 때쯤.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게 내 영혼?’
전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영혼이 느껴졌다.
‘돼지란 말이 순화된 말일 줄이야…….’
정령들이 자신을 돼지라 부른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비만을 넘어서 불균형에 가까웠다.
온몸이 살에 파묻혀 있었으니까.
물론. 그건 겉모습일 뿐이었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니.’
자각하지 못했던, 영혼 속 힘이 느껴졌다. 그렇게 영혼을 자각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게 왜 이래?!’
진의 영혼이 영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정령들이 흡수한 영기가 진의 영혼으로 흘러 들어왔고, 다시 밖으로 뿜어져 정령들에게 전달됐다.
‘아무튼 별문제는 없는 거 같은데…….’
상황을 보니, 정령들의 영기 흡수를 방해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도와주고 있었다.
진의 영혼에 흡수된 영기는 좀 더 진해졌으니까.
‘어우, 눈부셔.’
그렇게 정령들에게 영기가 모이고 모여, 이제는 주위를 환하게 밝힐 정도였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 때문에 터지는 거 아니야?’
당연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터질 듯 모였던 영기와 함께 정령들이 일순 사라졌다.
‘어? 사라졌어?’
놀란 건 진뿐만이 아니었다.
“지, 진 님! 위대한 분의 반응이!”
폴카 또한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여기서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안 해도 돼. 기다리면 돌아올 거야.”
“지, 진짜요?”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이 사실을 용인족들이 안다면 난리가 날 테니까.
“당연하지. 전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어. 걱정하지 마.”
진의 침착한 모습에 폴카 또한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오. 깜짝아.]
허공에서 성인 남자 모습을 한 정령이 등장했다.
차가운 눈매와 시니컬한 얼굴.
‘……로메른?’
[너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나? 내가 문제였어?’
[어. 네가 준 기운이 최상급의 벽을 부쉈어.]
‘폴카가 준 약을 먹은 게 문제가 된거 된 거 같은데……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최상급의 벽’을 부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럼, 정령왕이 된 거야!? 최상급 정령이 끝이라며?’
로메른은 정령왕 따윈 전설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진은 물론이고 정령들도 ‘최상급’이 끝이라 생각했다.
한데, 그 벽을 부쉈다고 했으니 남은 건 ‘정령왕’뿐이었다.
[원래라면 정령왕 같은 건 없다고 말했겠지만, 뭐. 비슷한 건 있더라.]
‘비슷한 거?’
[누군가 날 강제로 소환했어. 하. 반항도 저항도 할 수 없더라. 그 정도로 아득한 힘이었어.]
로메른이 그렇게 느낄 만한 힘은 하나뿐이다.
‘구슬의 힘처럼?’
[아마도…… 그렇겠지. 아무튼 난 어떤 장소에 도착했어. 마치 빛을 형상화한 것 같은 곳이었는데…… 신기하게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대체 왜 널 부른 거야?’
[아. 일종의 절차인 거 같더라고. 최상급을 넘어서는 정령이 등장하면 자동으로 이동이 되는 거 같아.]
‘그래서 다들 사라진 거구나…….’
[뭐. 난 아쉽게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어.]
‘만나지 못했다고?’
소환해 놓고 정작 아무도 없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어. 쪽지만 남아 있더라. 날 부른 이유는 정령왕 후보로 등록됐다는 거였어.]
‘정령왕 후보? 아니. 그걸 쪽지로 대체한다고?’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만 적혀 있었어.]
그게 뭔지는 대충 예상이 됐다.
‘그거지?’
진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자, 로메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하. 그럼, 우리 가설이 맞았네. 저 위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다는 거.’
[확실해.]
이건 정말 중요한 단서였다.
게다가, 남은 정령들이 가져올 단서를 생각하면…….
‘애들의 복귀가 기다려지는데?’
[근데…… 넌 많이 변한 거 같다?]
‘그래? 단약이 뭔가 효과가 있는 거 같더라고.’
[영혼이 더 단단해진 거 같은 느낌인데. 그 약, 영혼을 강화하는 거 같은데?]
‘그거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수련으로도 쉽지 않다며.’
[과연 드래곤이 만든 물건인가?]
‘됐어. 어차피 내가 막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아니니까.’
어차피 이 영혼의 힘은 정령들의 도움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
‘그보다 넌 어때? 이제 다 큰 거 같은데.’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야. 전성기 때보다 힘만 놓고 보면 더 강하니까.]
‘와우.’
이것만 해도 요람에 온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로메른과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허허. 신기한 경험을 다 해보는 구먼.]
검성이 나타났다.
그 또한 로메른처럼 성인 남성만한 크기로 변해 있었다.
‘상황은 대충 들었어. 검성 넌 누굴 만났어?’
[그 땅의 정령들을 만났다네. 정령왕 후보라는 아이들도 몇 보았고.]
[하. 4대 속성이라고 대우가 다른데? 정령왕은 만났어?]
[자리에 없더군. 후보라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네.]
검성 또한 로메른과 비슷했다.
어떤 공간으로 이동되어, 후보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 다음 나타난 건 성녀였다.
[다녀왔어요.]
그녀만큼 ‘성녀’란 직업이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성스러워 보였으니까.
[넌 누구 만났어?]
[흡혈귀의 왕을 만났어요.]
[……그게 진짜 있는 거였어?]
[예. 그가 왕의 후보란 자격을 부여해 줬어요.]
[설마, 그자가 피의 정령왕이야!?]
[아니요. 그럴 리가 없죠.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너도 못 만났구나.]
정령들의 성장은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이쯤 되니 살짝 아쉬웠다.
힘보다는 정보가 더 필요했다.
[현자도 별 차이 없겠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때 허공에서 현자가 나타났다.
거대했던 몸이 더욱 거대해졌고, 더욱 드래곤스럽게 변해 있었다.
현자의 등장에 폴카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위대한 분이시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현자는 폴카의 말에 대답해 줄 틈이 없었다.
[현자 넌 누굴 만났어?]
로메른이 기다리지 않고, 질문을 쏟아 냈다.
그리고.
현자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명계의 왕. 염라대왕을 만났어.]
[만났다고!?]
[어. 다들 만나고 온 거 아니야?]
[진짜 만났어요?!]
[아니. 그럼 너희는 아무도 안 만났어?]
[허어. 그래도 다행이군.]
모두 만났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 진은 다른 것에 집중했다.
‘잠깐만. 염라대왕?’
[어. 염라대왕이라고 하던데.]
‘……이름은 뭐라는데?’
[‘윤 차사.’]
‘차사?’
염라대왕.
차사.
‘윤’이라는 성.
전부 지구 쪽에서 사용하는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