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법칙을 무시하는 힘
“꺼어억.”
트림과 함께 진은 눈을 떴다.
‘아. 배불러.’
마치 밥을 한껏 먹은 것처럼 포만감이 가득했다.
몸은 나른하고, 눈이 감겨 왔다.
그때, 로메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괜찮아!?]
‘어. 괜찮아. 약간 위험하긴 했는데, 어떻게 잘 해결됐어.’
[……진짜 괜찮은 거야?]
로메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어. 괜찮은데?’
괜찮다는 말에도 로메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로메른만이 아니었다.
루나는 진의 몸을 확인했고, 검성은 심각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일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봐.]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진은 구슬 속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령들은 경악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진을 바라봤다.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진이 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검성. 네가 설명해 봐. 이게 가능한 거야?]
[……허어.]
[한숨만 쉬지 말고 말해 보라고! 네가 해 준 말을 떠올려서 한 거라잖아.]
[자네도 알고 있듯 내가 알려준 건 개념뿐일세. 그마저도 진이 이해하기 쉽게 변형한 정확하지도 않은 개념일세.]
[그래서? 가능한 거야?]
[솔직히 말하겠네. 이건 무도의 영역이 아닐세. 에너지 드레인과 육체 변형. 이건 오히려 자네의 전문 분야 아닌가.]
[아니. 무슨 육체 변형이야! 영혼 상태로 들어간 건데. 그리고 이게 무슨 에너지 드레인이야. 처먹었다잖아!]
점점 분위기가 과열되고,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진은 중재에 나섰다.
‘왜들 그래? 머리가 굳기라도 한 거야? 내 기억에 들어가서 보면 되잖아.’
진의 말에 정령들의 시선이 모였다.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흠. 나도 마찬가지일세.]
이 생각을 못할 정도로, 정령들이 당황했다는 뜻이었다.
‘심각한 일인 모양인데, 일단 한번 보고 이야기하자.’
진은 곧장 그 기억을 추출해 정령들과 함께 감상했다.
잠시 후 감상이 끝난 뒤.
[……미친.]
[허어. 이게 어떻게…….]
[신이시여…….]
-……대체.
정령들은 설명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악을 넘어서, 질렸다는 표정으로 진을 바라봤다.
‘또 니들끼리만 아는 이야기하지 말고, 간단히 줄여 줘.’
[후우…… 기다려 봐. 이야기 좀 해 봐야 할 거 같으니까.]
로메른은 그렇게 진에게 말한 뒤 정령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알아듣지 못할 온갖 용어들이 범람하길 잠깐, 이내 이야기가 끝났다.
[대충 정리됐어.]
진이 설명해 보라는 듯 로메른을 바라보자 녀석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무도의 극의, 흑마법과 마법의 극의, 성법의 극의.]
‘갑자기 뭔 소리야?’
진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로메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구슬 속 기운을 흡수한 건, 그 모든 것이 섞여서 만든 결과야.]
‘……어떻게?’
뜬금없었다.
저 극의를 다루는 건 진이 아니라 정령들이었다. 애초에 진은 극의를 다루기는커녕 잘 알지도 못한다.
[그 방법을 왜 우리한테 물어. 네가 한 거야. 귀찮음이 극에 달하니까 몸이 움직인 거야.]
‘……뭔 헛소리야.’
[정확하진 않지만 네가 정령사라 가능했던 일인 거 같아.]
‘정령사? 그건 더 뜬금없지 않아?’
[정령사의 극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해?]
‘정령사한테 극의가 있어?’
정령사에게 극의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애초에 그런 게 있었다면, 로메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진에게 극의를 알려 줬을 것이다.
[넌 특별하잖아. 정령사들에게 없는 써클이 있고, 념을 육체에 박기까지 했으니까.]
진은 로메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했다.
‘그래서 나한테 극의가 생겼다?’
[어. 귀찮음이 극의를 만들어 낸것 같아.]
뭐.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극의의 효과가 뭔데?’
[우리가 없어도 우리의 힘을 사용할 수 있어.]
로메른은 비장하게 말했지만, 진이 보기엔 별로 비장할 게 없었다.
‘뭔가 애매하네.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그냥 너희가 사용해 주면 되는 거니까.’
[뭐? 이 대단한 걸 이뤄 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넌 모든 분야에 극의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니까!?]
‘그래 봐야 너희만 못하겠지. 난 또 뭐라고.’
시큰둥한 진의 반응에 로메른은 아무런 말도 못했고.
[진답네요.]
[허허. 저러니 이런 힘이 허락된 것이겠지.]
-하긴 저게 진다운 반응이긴 하지.
다른 정령들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내 몸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이 난리를 친 거야?’
[……영혼이 성장했어. 아니. 성장이라고 하긴 뭐한가.]
로메른은 허탈하다는 듯 진의 물음에 대답했다.
‘씁. 쉽고 간단하게 말하라니까.’
[너 돼지 됐어. 영혼에 살이 뒤룩뒤룩 쪘다고.]
‘……뭐?’
[허허. 그 말이 맞군. 아주 돼지가 됐어. 영혼이 변했으니 육체도 자연스럽게 변할 테니 살이 빠르게 붙을 걸세. 뚱뚱한 성자라, 걸작이겠군.]
‘내 몸도 변한다고!? 그건 안 돼!’
단순히 살이 찌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뚱뚱한 성자는 큰 문제였다.
폭식이란 삿된 욕망을 품은 게 되고 만다.
[아무거나 주워 먹으니까 그렇게 살이 찌지.]
‘……아니. 살려고 먹은 거야!’
[그런 놈이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
‘…….’
그렇다고 이 비만이 나쁜 건 아니었다.
[뭐. 나쁘진 않아. 격이 올라갔다는 소리니까.]
‘격?’
[돼지가 된 것도 대충 이해가 돼. 전부 소화시키지 못하고, 그냥 비축 에너지가 된 거겠지.]
‘그래서 지방이 됐다?’
[아마도?]
진의 눈이 빛났다.
‘그럼, 이걸 사용하면 살이 빠진단 소리지?’
[그렇지.]
‘당장 쓰자. 내가 살찌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거 알지?’
사뭇 진지한 진의 표정에 로메른 또한 진지하게 대답했다.
[급한 건 알지만 천천히 진행해야 돼. 함부로 낭비할 수 없는 힘이니까.]
‘실험이 필요하다는 거지?’
[당연하지. 이건 무조건이야.]
그 말에 진이 곧장 입을 열었다.
‘뭐 해? 바로 시작해야지.’
구슬 속에 있던 힘을 사용해 볼 차례였다.
* * *
법칙을 무시하는 힘.
‘이 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지?’
[그렇지.]
‘그럼, 실험해 볼 건 정해져 있지 않아?’
[정해져 있다고?]
‘당연하지.’
진은 그렇게 말한 뒤, 곧장 ‘현자’를 불렀다.
‘현자. 나와 봐.’
진의 말에 미니 드래곤 하나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난 갑자기 왜?
왜긴 왜야 미루고 미뤘던 일을 할 차례니까 그렇지.
‘이 녀석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게 어때?’
엄밀히 따지면 현자는 ‘사념’일 뿐이었다.
존재조차 없는 ‘사념’. 그런 사념에 존재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때?’
-…….
현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진짜 난놈이야.]
로메른은 감탄을 터트렸고.
[가끔 짓궂긴 해도 진은 정말 따듯한 사람이에요.]
[허허. 이러니 내가 그대를 돕는 것일세.]
성녀와 검성은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당장 사람이 될 순 없으니까. 일단, 정령까지 가 보자고.’
[나쁘지 않네. 어차피 우리들도 정령에서 사람이 될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실험이긴 해도 필요한 데 쓰는 게 좋은 법이지.’
진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릴 때.
-……진.
‘왜 또 궁상이야?’
-고마워.
현자의 말에 진이 표정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 됐어. 오그라들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진심이야. 정말 고마워. 모든 게. 네가 없었다면…….
‘1절만 해. 감사 인사를 하고 싶으면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해.’
-……알겠어.
정령들은 그 모습을 훈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눈빛들이 불경해.’
[허허. 쑥쓰러워하는 표정이 걸작이군.]
[정말 귀엽다니까요.]
[후. 잘 컸다니까? 다들 알지? 진 내가 키운 거?]
진은 그런 정령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아 쫌!”
진의 말에 정령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됐고 무슨 실험할지 정했으면,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진의 닦달에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근데, 실험은 어떻게 진행할 건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여기서부터는 여러분이 해 주셔야죠.’
[……달라졌나 싶었더니. 똑같네, 똑같아.]
로메른은 그렇게 말한 뒤, 본격적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영혼의 힘이니까 흑마법의 관점에서 봐야 하나?]
[영혼과 관련된 힘 사용법은 교단에도 있어요. 이쪽을 참고하는 건 어때요?]
-마법 쪽에도 있긴 해.
[놀랍게도 무도 쪽에도 있다네.]
그 말에 로메른의 눈이 빛났다.
[이거 뭔가 느낌이 오는데? 진이 했던 것처럼 하나로 묶어 보자.]
[이걸 하나로 말인가? 가능할지 모르겠군.]
-무슨 생각인지 알겠네. 기억 속에서 어떻게 합쳤는지 확인하겠다는 거지?
[정답이야. 이미 성공작이 있는데, 이게 어려울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네요.]
빈둥거리던 진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것을 각 분야의 대가들이 연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연구는 금세 난관에 봉착했다.
[아. 생각보다 너무 복잡한데? 이걸 저 녀석은 감각만으로 해치웠다는 거야?]
-……이 정도면 무서울 정돈데?
[샘플이 있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계산이 너무 복잡해.]
-하. 우리가 이걸 쓸 줄은 몰랐는데.
다행히 방법이 있었다.
[바즈라랑 직통 라인 연결할게. 모든 계산을 바즈라한테 밀어 줘.]
-알겠어. 계산은 전부 위임할게.
슈퍼컴퓨터 앞에 계산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와. 생각보다 편한데? 계산을 떠나서, 마법 색인 검색이 미쳤어.]
-……상상 이상으로 편리해. 이러면 생각보다 일찍 끝날 거 같아.
바즈라의 참전으로 상황이 반전됐다.
한참이나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던 연구는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하더니.
고작 며칠 만에 결과가 나왔다.
* * *
[……완성해 보니까 더 어처구니가 없네. 이걸 감각으로 했다는 거지?]
며칠간 휴식을 만끽한 진이 입을 열었다.
‘된 거야?’
어느새 통통하게 살이 오른 진.
이놈에 살 때문에,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꿈속 세상에서 뒹굴뒹굴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쁘지 않았다.
[어. 다 됐어. 이제 시작하기만 하면 돼.]
‘내가 할 일은?’
[그냥 누워 있어.]
‘그건 내가 제일 잘하지.’
진이 편하게 눕자, 주위에 수천 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와. 멋진데?’
진이 입을 연 그 순간, 더 멋진 게 등장했다.
거대한 마그마 드래곤.
현자의 본체가 꿈속 세상에 강림했다.
그렇게 준비가 되는 사이, 어느새 로메른이 진의 곁으로 와 입을 열었다.
[계획대로라면 정령이 되긴 할 거야.]
‘되긴 할 거다? 뭔가 말이 이상한데?’
[……어떤 정령이 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어. 그건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
‘정령사의 영역이란 거지?’
[어. 우리 쪽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뭐. 무슨 정령이든 상관없잖아?’
중요한 건 ‘현자’였지, 그가 어떤 정령이 되든 상관없었다.
[어떤 정령이 되든 놀라지 말란 뜻이야.]
‘놀라긴 왜 놀라? 이상한 거면 놀리면 되지.’
진이 짓궂은 표정을 짓자, 녀석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그럼, 시작하자.’
진의 말과 함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고,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이건 또 뭔 정령인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현자를 정령으로 만드는 건 성공했다.
한데, 문제가 좀 있었다.
정령이 된 현자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과는 굉장히 많이 달랐다.
‘아니. 이걸 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진의 반응이 이런 이유는 간단했다.
‘마그마 드래곤’이었던 현자는 그 모습 그대로 ‘정령’이 되었다.
[크아아아아.]
현자가 울부짖었다.
‘정령 드래곤이라니…….’
완전 멋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