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천국의 도서관
투쟁의 땅 업데이트는 대성공이었다.
각국의 용병들과 기사들이 쏟아졌다.
게다가, 특별한 손님들 또한 쏟아졌다.
<준비된 인재! 투쟁의 땅의 악역! 34위 푸르푸르가 인사드립니다!>
<평범한 악역은 가라! 스토리까지 준비해 온 준비된 악역! 성스러운 동물 유니콘 출신 악마! 67위 암두시아스가 인사드립니다!>
중하위 악마들만 오디션을 보러온 게 아니었다.
<꽤 재미난 일을 한다고 들었다. 절망이 필요하다면, 내 도와주지.>
<서열 2위보다는 1위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최상위 악마라고 할 수 있는 아가레스와 바알마저 참석하는 대규모 오디션.
“전 공정히 심사할 뿐입니다. 오디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뭐든 스토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몰입하고, 그 안에서 힘쓰기 마련이다.
이 악마들이 퀘스트의 주체이며, 스토리를 이끌어 갈 ‘악역’이었다.
악역들이 투쟁의 땅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치에도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제일 참여율 저조한 애들이 누구야?’
[마법사. 이쪽은 쉽게 움직이질 않네. 한두 번 들어오긴 했는데, 그다음부턴 몇몇을 제외하고 들어오질 않아.]
‘투쟁의 땅으론 부족한가 보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마법사의 수련 방법은 기사들과는 다르니까.]
로메른의 말대로 마법사 계열은 ‘전투’로 실력을 상승시키는 건 한계가 있다.
결국은 연구와 실험으로 실력을 올린다. 그러니 그들이 들어올 만한 것들을 만들어 줘야 했다.
‘그럼, 마법사들이 꿈꾸는 곳을 만들어 주면 되지.’
[꿈꾸는 곳?]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로메른 네가 꿈꾸는 최고의 공간은 어떤 거야? 현자는?’
이쪽엔 마법에 한평생 매진한 두 사람이 있다.
둘은 최적의 공간의 발판이 되어줄 터.
-음.
[이거 막상 물어보니까 쉽게 대답 못 하겠는데?]
-실험 도구는 필수고…… 음. 연구실? 아니. 이건 마탑에도 있는 건데.
한데, 쉽사리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솔직히 말할게. 난 책만 있으면, 알아서 다 배웠어. 그냥 커다란 도서관만 있으면 될 거 같은데?
[틀린 말이 아니야. 그냥 보면 이해가 되는 건데, 뭐 꿈의 공간 같은 게 필요한가?]
다른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피를 토할 말이었다.
‘쯧. 이래서 천재들이란.’
현자와 로메른의 재능이 너무 뛰어난 게 문제였다.
돈이 필요하면 벌면 되고, 연구실이 필요하면 만들거나 받으면 된다. 둘은 필요한 공간을 직접 만들 능력이 된다.
그러니, 꿈의 공간이랄 게 없었다.
‘이 재수 없는 천재들.’
-어. 칭찬 고마워.
[솔직히 재능이 없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아.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아쉽게도 짬 때리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범재인 ‘진’이 떠올려야 했다.
대륙의 수많은 범재 ‘마법사’를 위해서.
‘그래도 너희가 도움이 되긴 하네.’
[갑자기?]
‘마법사들이 뭘 필요로 할지 대충 감이 잡혀.’
재능이 없는 이들은 ‘재능’이 필요하다. 물론. 재능을 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재능을 대체할 물건이 필요한 거지.’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 다양한 기능이 담긴 무언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를 붙잡았다.
‘엑셀!’
[뭔 셀?]
‘지구인들 머릿속 뒤져서 엑셀과 관련된 자료 전부 찾아.’
[이게 마법사들에게 도움이 돼?]
당연히 되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마법의 체계가 완전히 변할 것이다.
‘엑셀을 다루는 마법사와 다루지 않는 마법사로 나뉠걸?’
자신만만한 진의 말에 로메른은 엑셀의 관한 정보를 찾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니. 암산으로 하면 되는데 이딴 게 왜 필요해?]
‘쯧. 이래서 천재들이란.’
하여간 재수가 없어요.
누군 그 암산을 검증하기 위해 몇 년을 허비하기도 한다.
‘범재들이여! 일어나라! 엑셀의 시대가 왔다!’
[……이게 진짜 의미 있는 거야? 암산으로 된다고 말했지만, 워낙 복잡한 수식이라 어려울 텐데?]
‘어느 정돈데?’
[지구식 표현으로 따지면…… 슈퍼컴퓨터? 뭐 이런 게 있어야 할걸?]
슈퍼컴퓨터.
뭔가 엄청난 말 같아 보이지만.
‘만들면 돼. 우리도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
[우리한테 그런 게 있어?]
있다.
그것도 요즘 꿀만 빨며 놀고 있는 슈퍼컴퓨터가.
‘어딜 놀아. 주인이 일하고 있는데…….’
절대 놀고 있는 게 열받아서 데리고 오는 건 아니었다.
* * *
“팔자 좋다?”
따듯한 기운이 사방에 가득했다.
숨을 쉴 때마다 마치 숲을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야. 바즈라. 대답 안 해?”
이런 편안한 공간에서, 엘프들의 사랑을 받으며 꿀을 빨고 있다니!
이 부러운 녀석!
“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허공에서 바즈라로 보이는 존재가 튀어나왔는데…… 문제가 있었다.
“……너 꼴이 왜 그래?”
녀석은 분명 남자였다.
선이 굵고 남자답게 잘생긴 남자.
한데, 허공에서 튀어나온 바즈라는 ‘남자’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되더니. 이렇게 변화했습니다.”
여자였다.
심지어 종족마저 변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녀석은 이제 누가 봐도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야. 존재마저 변한 걸 보니 이제 진짜 세계수라고 불러도 되겠어.]
당연하긴 뭐가 당연해!?
남자가 여자가 됐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해 줘야할까.
진은 심사숙고해 한마디를 건넸다.
“……힘내라.”
“예?”
“아니. 그냥 힘내라고.”
이 이상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즈라는 여성으로 변한 걸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괜찮습니다. 그저, 전 알을 깨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 알이 무슨 알인진 모르겠지만, 진이 보기엔 안쓰러웠다.
“그래. 만족하면 됐지.”
“예. 주인님.”
외모만 변한 게 아니었다.
성격이나 행동 또한 변했다.
[전에 말했지? 녀석은 가짜 신이라고.]
‘어. 위신인데 진짜 신처럼 변화하는 거라고 했잖아. 뭐 이 다음에도 복잡한 이야기가 있었던 거 같은데.’
[쉽게 생각해. 진짜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생각하면 돼.]
‘신이라도 되는 거야?’
[예전이라면 그렇다고 대답했겠지만, 이젠 잘 모르겠네.]
세계수를 신으로 취급하기엔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다.
진짜 신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움직인다.
지구인을 데려온 흑막과 그를 막는 이 대륙의 주인.
둘이야말로 진짜 신이라 할 만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지금 중요한 건, 그래서 세계수가 쓸모가 있냐 없냐 하는 것이었다.
진이 보기엔 충분히 쓸모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너 요즘 한가하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나랑 일 하나 하자. 엘프들에게도 도움 되는 일이니까.”
“엘프들에게도요?”
당연한 일이었다.
천국에 출입하는 건 인간만이 아니었다.
진의 영지에 살고 있는 엘프와 드워프들 또한 천국에 접속했다.
“천국 들어 봤어?”
“예. 성자님께서 천계와 협상 후 받으신 영토라고 들었습니다.”
대체 저 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진 모르겠지만, 이젠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곳에 도움이 필요해.”
“예!”
바즈라는 어떤 도움인지 묻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 수락했다.
그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저……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주인님.”
“뭔데?”
“엘프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게, 절 그곳에도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존재하게 해 달라고?”
“예. 제 아이들은 천국에 가면 그곳에 제가 존재하지 않으니 상실감을 느끼는 듯합니다. 제 아이들이 천국이란 곳에 가지 못하는 게 너무 가슴 아픕니다.”
어쩐지 엘프들의 접속률이 부진하다 싶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건 생각 못 했네.’
[세계수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전 단절된다고? 이건 좀 신기한데?]
게다가 바즈라의 부탁은 진이 하려는 일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좋아. 안 그래도 내가 하려는 부탁이랑 비슷한 부분이 있네.”
“그렇습니까?”
“그래. 너, ‘서버’가 돼라.”
“……예?”
슈퍼컴퓨터의 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진은 바즈라를 그냥 계산기로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기회에 천국의 가장 큰 짐을 치울 생각이었다.
천국에서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륙을 구성하는 땅?
아니면, 사람들이 쉬는 건물?
대륙을 감싸 안은 거대한 바다?
전부 아니었다.
‘정보.’
모든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놀랍게도 정보가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했다.
덕분에, 묘한 게 생겼다.
‘정보의 바다.’
그저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로 깊은 바다 속에 정보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꿈속 세상에 바다가 필요 없는데도 존재하는 이유다. 오직 정보를 담아 놓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 덕에, 정보를 보관하는 데 가장 많은 ‘자원’이 투입됐다.
‘원래라면 용암 골렘에 때려 박았겠지만.’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용암 골렘은 현자가 되었으니,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가짜라곤 해도 나름 신이라 불리는 세계수니까.’
그런 의미에서 ‘바즈라’는 최적이었다.
“일단, 계약서부터 작성하자.”
“계, 계약서요?”
진에게 이미 당할 대로 당한 바즈라는 계약서가 나오자마자 뒷걸음질 쳤지만.
“야. 너한테 더 뽑아 먹을 게 있을 거 같아? 이미 넌 내 거야. 이제 와서 뭘 무서워해.”
남자일 땐 몰랐는데, 여자로 변한 바즈라에게 하기엔 너무 쓰레기 같은 말이었다.
‘아니. 속으면 안 돼.’
바즈라는 남자다.
겉모습에 현혹되면 안 된다!
“빨리 와서 안 써?”
[이야. 그 계약서를 실제로 쓰는 때가 오는구나? 정신 100% 넘기는 인간 말종 계약서잖아 그거.]
진은 로메른의 말을 못 들은 척했지만, ‘바즈라’는 그 말을 들었다.
“이, 인간 말종 계약서!?”
“야. 넌 이미 내 거라니까? 빨리 안 와?”
“저 주인님?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시가아안? 너 겉모습이 변했다고, 아주 옛 기억까지 싹 지웠나 보다?”
진은 기세등등하게 소리쳤지만 속마음은 굉장히 복잡했다.
바즈라가 남자였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전과 달리 죄책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 검성이 겉모습에 현혹되는 줄 알아? 우리 검성은 쓰레기라 그냥 다 패. 바뀌고 뭐고 없다니까?”
“히, 히익! 검성!”
검성 이야기가 나오자,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원래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난 그런 자가 아닐세!]
“아. 저런 모습이면 더 때린다?”
[아니. 그게 대체…….]
검성은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사, 사인하겠습니다!”
바즈라는 호다닥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역시 검성.
효과 확실하구만?
[이, 이런 무도한!]
검성이 분통을 터트리는 약간의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였다.
“자. 가 보자.”
진은 그렇게 말하며, 검은색 팔찌를 바즈라에게 건넸다.
천국에 ‘서버’가 생겼다.
* * *
환상 마법으로 유명한 플랙탈 마탑.
한창 연구 시간인 지금, 1층 홀로 마법사들이 전부 내려오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 난리야?”
“교단 쪽에서 뭘 소개한다고 왔다던데?”
“대체 뭔데 연구시간에 마법사들을 불러?”
“마탑주님 지시야. 뭐가 있긴 있나 보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그들은 귀한 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단 질병 연구부에서 나온 주교 후시린입니다.”
교단의 질병 연구부란 말에 마법사들은 깜짝 놀랐다.
“그 질병 연구부?”
“주교면…… 연구부장급이잖아!?”
질병 연구부 사제들은 조금 독특한 이들이다.
사제이면서도 마법사에 가깝다.
이들은 평생을 연구실에서 질병을 고칠 성법을 만든다. 마치 마법사가 새로운 마도를 연구하는 것처럼.
“이번에 연구부 쪽에서 큰 진보가 있었습니다.”
주교가 입을 열자 소란스럽던 주위가 조용해졌다.
“핵심만 설명해 드리자면…… 성법을 제작한 뒤, 모든 검산 과정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마법사들의 반응은 미묘했다.
그게 뭔 개소리냐는 듯한 반응.
한데, 주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반응도 여러분과 비슷했습니다. 저조차도 성자님께 그건 불가능하다고 단정했을 정도니까요,”
‘성자’란 말이 나오자, 미묘하던 분위가 일변했다.
“한데, 성자님께선 그게 가능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새로 짠 마법을 검산하는 과정이 제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걸 다들 아실 겁니다.”
모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가 늦어지고, 오류가 생기는 건 전부 저 ‘검산’ 과정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마법일수록 여러번 교차 검증을 한다.
7차, 8차…… 많으면 10차까지 검산에 투입되는 시간과 자원은 막대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만 사용하고 싶다는 삿된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마법사들은 이해한다는 듯 주교를 바라봤다.
만약 정말로 그런 게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자님께선 진보는 성법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마법 또한 세상을 구성하는 한 축. 함께 사용하는 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주교는 마치 사과하듯 마법사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구슬 하나를 꺼냈다.
“직접 보시는 편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소개하겠습니다. 모든 검산 과정을 해결해 줄 천계의 도서관, ‘엑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