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천국의 열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정리해 보자고. 그러니까 저 힘을 다루기 위해선 세계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거지?’
[……굉장히 많이 요약한 거 같지만, 결론만 말하면 그렇지.]
이면의 마왕처럼 세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작은 세계론 힘들다.
<저 힘은 나도 섣불리 다룰 수 없다. 그 힘이 너무 크다.>
이면의 마왕은 자격은 되지만, 힘에 손을 댈 수 없었고.
<흠. 난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손댈 수 있는 자격이 되질 않는다. 너무 많은 대가가 필요하다.>
지옥의 최강자 바알은 손을 댈 수는 있지만, 자격이 되지 않아 다룰 수 없었다.
‘그럼, 간단하네.’
이면 세계보다 더욱 커다란 세계.
그런 세계의 주인이 돼야 저 힘을 다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대륙의 주인이 될 순 없는 노릇인데…….’
아니.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사절이었다. 이건 가장 든든한 아군을 적군으로 만드는 최악의 수다.
‘저 위에서 놈을 견제해 줄 사람을 적으로 돌릴 순 없으니까.’
이 모든 일을 꾸민 놈을 견제할 수 있는 건, 이 대륙의 주인뿐이었다.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세상을 만들면 되지.’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까짓것 세상 하나 만들자. 어차피 만들려고 했어.’
[그러니까, 세상을 원래 만들려고 하셨다고요?]
세상이란 말에 로메른은 뭔 개소리냐는 듯 반응했지만, 한 단어만 바꾸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게임을 만들자.’
[게임? 그게 세상이랑 무슨 상관…… 너 설마?!]
로메른은 진이 무슨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상.
가상현실이란 세계의 주인이 되려는 것이다.
‘대륙보다 커다란 세계? 만들면 되지. 기왕 만드는 거, 행성을 여러 개 만들까? 행성 별로 국가별 서버 해 놓으면 되잖아.’
[해, 행성?!]
‘우주 전쟁이 일어나도 재밌겠네.’
[……미친.]
겨우 대륙 하나의 주인으로 만족할 수 없다.
적어도 태양계의 주인 정도는 되어야 하는 법.
‘뭐. 가상현실이긴 하지만.’
[넌 진짜…….]
로메른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아. 다 좋다고. 문제는 그걸 어떻게 만드냐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야! 이거 그 패턴이잖아!]
‘오. 눈치챘어?’
역시, 자주 써먹어서 그런지 로메른은 금세 그 방법을 눈치챘다.
‘네가 만들어야지.’
[이 나쁜 놈아!]
‘얼개는 다 말해 줬지? 서버별 행성으로 이뤄진 우주 전쟁급 가상현실을 만드는 거야.’
[그걸 어떻게 만드냐고!]
‘그건 네가 고민해야지.’
슬쩍 로메른에게 짬 때렸다.
[이런 놈이 무슨 세계의 주인이 된다고! 다 때려쳐!]
‘에이. 말은 그렇게 해도, 벌써 어떻게 만들지 고민 중이잖아?’
이런 아이디어를 던져 줬는데 벌써 몸이 근질근질할 터.
[……젠장.]
역시나 진의 생각대로였다.
‘부탁한다! 로메른! 세상을 구하는 거야!’
[나도 사람이야! 사람!]
진은 귀를 막고 편안하게 누웠다.
말만 저렇지 열심히 일해 줄 게 눈에 훤했으니까.
* * *
도와줘요! 로메에몽!
가상현실을 만들어 줘요!
이런 진의 전략은 성공했다.
며칠 뒤.
[……만들었어.]
정령이라 눈이 피곤을 느낄 리 없었는데, 고작 며칠 사이에 로메른의 얼굴은 처참해져 있었다.
‘오. 빠른데?’
[……이번에 지식의 해방 쪽 지식 복사해 둔 게 나름 도움이 됐어. 그게 없었으면 꽤 늦었을 거야.]
정말 같은 정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진다.
지구인들의 지식으로 진은 꿀을 빨았지만, 로메른은 뭔가 굉장한 걸 만들어 왔으니까.
‘지식의 해방이 도움이 됐나 보네.’
[어. 발상 쪽은 확실히 지구 쪽이 굉장하더라고. 뭐 실질적인 기술은 악마 쪽에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악마 쪽?’
[어. 몽마들의 악몽을 꾸게 하는 기술을 변형한 게 가상현실 접속의 핵심 기술이야.]
지식의 해방 쪽 지식.
악마들의 기술.
대륙 최고의 마법사 현자와 흑마법사 로메른의 기술.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 가상현실이란 이적이 가능해 진 것이다.
‘그래서 완성품은 어디 있어?’
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가상현실 캡슐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거야.]
그 대신 로메른은 꿀렁거리는 슬라임 하나를 내밀었다.
‘슬라임?’
[어. 이게 바로 가상현실로 들어오는 접속기야.]
‘……이게?’
[어. 흑마법사한테 일을 맡겨 놓고, 뭔가 엄청난 기계를 가져올 줄 알았어? 아니. 그럴 거면 시간이라도 많이 주던…….]
로메른은 참고 있던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진은 그 불만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일종의 바이오 머신 같은 거네?’
[그렇게 말하니까 있어 보이네. 대충 비슷해.]
뭐. 원리나 작동 방식은 진이 듣는다고 이해할 것도 아니었다.
‘고생했어.’
[다만, 문제가 한 가지 있어.]
‘문제?’
[이 접속기는 네 꿈속에 접속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장치야.]
‘잠깐만. 내 꿈속? 왜? 가상 공간을 만들면 되지.’
[세상의 주인이 될거라며. 네가 악마도 아닌데 이면의 마왕처럼 세상의 주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잖아.]
‘……그건 그렇지.’
이면의 마왕이 된 건, 기본적으로 ‘악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원래 네 영역으로 설정해야 했어.]
‘하긴, 내 꿈은 내 거지.’
[맞아. 이미 넌 네 꿈의 주인이야.]
그제야, 녀석이 하는 걱정이 뭔지 이해가 됐다.
‘공간이 부족하구나.’
[어. 무한한 공간 같아 보여도, 꿈에는 한계가 있잖아.]
녀석의 말대로였다.
애초에 무한한 공간이었다면, 꿈속에 들어갈 때마다 바다나 산을 만드는 게 아닌 전부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일단, 내가 깨어 있어도 꿈 속 공간은 유지되게 할 수 있는 거지?’
[그건 어렵지 않아.]
그렇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공간이 문제면 공간을 구하면 되잖아?’
[어디서?]
어디서긴 어디서야.
‘꿈속에 접속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한테 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걸 어떻게 받게? 아무리 꿈이라곤 하지만 ‘의식’과 연관된 영역인데 그걸 주겠어?]
의식과 관련된 영역?
꿈?
지구인이었던 진이 듣기에도 어려운 단어인데 이 대륙 사람들이 그걸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이번엔 진이 지구의 지식 활용법을 보여 줄 차례다.
‘접속기 팔면서 약관 동의를 받으면 되지.’
[약관……?]
‘어. 슬쩍 끼워 넣는 거야.’
[야! 그거 부정 계약이잖아!]
‘뭐가 부정 계약이야. 약관 동의를 받았잖아? 명시를 안 해 놓은 것도 아니고.’
[악마도 안 하는 짓을!]
‘걔네가 쓸데없는 전통을 고집해서 안 하는 거지. 내가 악마였으면 바로 시작했을걸?’
[…….]
‘게다가, 교단이 판매하는 건데 약관 꼼꼼히 읽어 보는 사람이나 있을 거 같아? 그 교단이 판매하는데?’
로메른은 진의 발상에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뭐 나 좋자고 하는 일이야? 다 세상을 위한 거 아니야. 내가 이걸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어?’
뭐. 누릴 수 있다.
원래 게임은 소액 결제를 추가해야 맛이니까.
아무튼 그건 가상현실 문화가 확립된 다음이다.
‘일반 백성까지 전부 사용하려면, 거의 반쯤은 공짜로 풀어야 하는데. 자선 사업이지 솔직히.’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로메른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나중에라도 악마는 하지 않을 거지? 악마왕 같은 거 하면 안 된다. 약속해. 당장 해!]
‘어. 사람 일이란 게 모르는 건데…….’
[당장 하라고! 이 위험한 놈아!]
‘어. 음. 알겠어. 진정해.’
로메른의 반응을 보아하니 진은 자신의 계획이 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약속하면 뭐 해 줄 건데?’
[이! 악마 같은 놈아!]
‘오. 악마 추천?’
[아, 아냐! 진짜 하려는 건 아니지?]
‘어. 당연히 안 하지. 저번에 바알 봤잖아. 무슨 세계의 주인도 아닌데 저 힘을 만질 수가 있어…….’
잡담은 여기까지였다.
‘일단, 이걸 판매할 방법부터 생각해 보자고.’
[그냥 팔면 되는 거 아니야?]
‘안에 뭐라도 있어야 팔리지. 기다려봐. 채워 넣을 건 내가 고민해 볼 테니까.’
세상을 만드는 건, 이제 시작이었다.
* * *
교황청에서 대규모 사업이 발표됐다.
이 대륙의 모든 교구에 전달됐다.
-신성 아카데미 설립.
-입학 제한 없음.
-수업료 무료.
-지역 상관없음.
-이사 갈 필요 없음.
-야간 수업으로 진행됨.
-최대한 많은 학생을 받을 것.
갑작스러운 아카데미 설립에 교구의 사제들이 술렁였다.
“아카데미라니…… 분명 좋은 일이긴 한데.”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이 조건이라면 참석 의사가 쏟아질 겁니다. 저희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부족한 일손 때문에 추진하고 있는 봉사들에 문제가 생길 텐데…….”
“최대한 많은 학생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사제들이 걱정하던 것도 잠시.
-총 책임자: 성자 진 세인트.
서신에 적힌 ‘성자’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그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허허. 성자님께서 추진하시는 계획이라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성자께선 이상을 현실에 맞춰 구현하시는 분이니까요.”
“대체 어떤 놀라운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실지 기대가 됩니다.”
“입학생을 최대한 많이 받겠습니다.”
“예. 저도 주말 예배 때 주민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교단의 사제들이 입학생을 모으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놈도 교육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글도 읽고 셈도 배우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교단에서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인데, 성자님의 은총 덕에 이제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고, 사제님. 수업료는 많이 비쌉니까?”
“무료입니다. 멀리 보낼 필요도 없고, 낮에 일을 돕는 것도 문제없을 겁니다.”
“그,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예. 성자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습니다. 게다가, 단순히 교육만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다양한 이능을 경험하게 해서, 재능이 있는 친구들을 도와줄 생각입니다.”
“허어. 그, 그런 것 까지 알려주신단 말씀이십니까?”
대륙에서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건 귀족이나 부자들만 가능한데, 그런 걸 무료로 해 준다는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아들만 생각하십니까?”
“예?”
“형제님께서도 배우실 수 있습니다. 농법에 관련된 교육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간단한 글과 셈을 알려드릴 수도 있고요.”
“허어. 늙은 제가 배울 수 있을지…….”
“체험만 해 보셔도 괜찮습니다. 전 이미 아카데미에 가 봤는데, 정말 놀랍습니다.”
“아카데미 말입니까? 새로 지은 건물은 보지 못했는데…….”
“사제들끼린 이런 말을 합니다. 성자께서 ‘천국’의 일부분을 받아 오셨다고요.”
“처, 천국 말입니까!?”
“이 땅에서 배우는 게 아닙니다. 교육은 천국에서 진행이 됩니다.”
“예?!”
놀란 그를 향해 사제는 신성한 빛을 뿜어내는 팔찌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천국으로 가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녹색 슬라임은 개조를 통해 신성해 보이는 팔찌로 탈바꿈했다.
“모든 교육은 잠이 들면 이뤄집니다.”
“……예?”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사제는 약관 서류를 하나 그에게 내밀었다.
“글을 모르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이 필요해 이런 게 필요합니다.”
“아이고, 믿습니다. 사제님!”
“그래도 들어 주세요. 성자님께서 꼭 말씀드리라고 했습니다.”
“허어.”
이런 식으로 대륙 전체에 ‘천국의 열쇠’가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