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힘의 정체
로메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며칠간 자리를 비운 탓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오셨습니까. 보스.”
“대회는?”
“예. 마지막 결선만 남겨 두고 있습니다.”
타이밍 좋게 결선만 남은 게 아니었다. 마그마가 지금까지 결승을 뒤로 미루며 시간을 끈 것이다.
“잘했다. 문제는 없겠지?”
“예.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결선을 천천히 하길 바라는 눈치라 문제가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등장한 유일한 TV프로그램.
심지어 21세기의 자극적인 맛으로 뒤범벅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빠지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결승 끝난 뒤 내가 찍은 영상을 넘겨줄 테니, 결승까지 잘 마무리하도록.”
“예. 보스. 알겠습니다.”
영상이야 꿈속에서 뚝딱 찍어 주면 그만이었다.
시상식을 참석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게 맞았다.
진에게 관심이 몰리는 것보다 악들의 계약자인 참가자에게 관심이 몰려야 했으니까.
대회는 그렇게 처리한 뒤, 곧장 영지로 복귀했다.
“나와.”
진이 입을 열자, 허공에서 꼬마 아이가 나타났다.
“여기가 영지야?”
“어. 볼거리나 즐길 거리가 많으니까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어.”
“……드워프 찾아가도 돼?”
“어. 내 이름 팔면 곧장 장비 맞춰 줄 거야.”
“이것도 좋은 건데…….”
“개조해도 좋고, 뭐 마음대로 해. 자세한 건 드워프들이랑 이야기 나눠 봐. 내 이름만 대면 골드는 필요 없을 거야.”
“알겠어.”
그와 동시에 그녀는 다시 한번 허공으로 사라졌다.
말릭이 복귀하기 전까지 그녀가 할 일은 없었다.
‘이러면 당장 급한 일은 다 끝난 건가…… 아! 로메른. 필규 형님 데이터는 모으고 있지?’
[당연하지. 그건 걱정하지 마.]
필규 형님의 수련 과정 데이터는 그대로 쌓이고 있었다.
‘굳이 수련할 필요 없지. 필규 형님이 계시는데.’
육체에 념을 박는다는 듣도 보도 못한 발상을 날름 삼킬 수 있는 찬스였다.
게다가,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이제 당장 급한 건 끝났으니까 슬슬 낙인에 관해서 이야기해 봐.’
[여태껏 내가 발견하지 못한 힘이야. 이건 뭔가 이질적이야.]
‘이질적이라고?’
[일단, 꿈속으로 들어와 봐.]
‘알겠어.’
* * *
꿈속은 진의 통제를 온전히 받는 공간이다.
한데, 그런 꿈속에 이질적인 게 보였다.
“저건 또 뭐야?”
[낙인이야.]
“저게?”
하늘 위에 보이는 검은색 구체.
영롱하면서도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데, 그와 동시에 이질적이고 더러운 느낌이 드니 신기한 일이었다.
[낙인의 힘을 모아서 구체화한 거야. 원래라면 네 꿈에 나타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거지?”
[어. 이 힘은 법칙을 뒤흔들어.]
“그래?”
진이 호기심을 보이니, 로메른은 평소와 같지 않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법칙을 뒤흔드는 힘이 안전할 거라곤 생각하는 건 아니지?]
“위험해?”
[진짜 위험해. 애초에 난 이런 힘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
로메른이 비장하게 말하면 말할수록 진의 관심은 더욱 진해졌다.
“나쁘지 않은데?”
[아니. 위험하다니까 왜 더 관심을 가져?]
“법칙을 얼마나 뒤흔들 수 있는데?”
[법칙을 뛰어넘기 위해선 일종의 비용이 발생해. 한데, 이 힘은 그 비용을 무시해 버려.]
“영생과 퀘스트. 둘의 근원이 그 힘이란 거지?”
[맞아. 마나도 아니고, 신성력도 아니야. 이게 대체 무슨 힘인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야.]
“그 정도야?”
[어. 그야말로 신의 힘이라고 생각할 정도야.]
신의 힘.
이곳에 보낸 존재를 생각하면, 신의 힘이란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았다.
“우릴 지구에 보낸 존재가 신이라면?”
[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뭐. 진짜 신은 아니더라도 신적 존재 비슷한 걸 수는 있잖아. 아무튼 가정을 해 보자고.”
[……그래. 그 녀석이 진짜 신과 비슷하다고 치자. 그러면 뭐가 달라져?]
“달라지지. 우리의 가정이 맞았다는 소리니까.”
진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어느 곳에서 진짜 신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했겠지만.]
“그런 말 못하겠지?”
[어. 가능성 있어. 이게 신들이 다루는 진짜 힘일 가능성.]
그 가능성이 있으면, 재미난 일이 가능해진다.
“마도의 끝 너머, 저게 있는 거야.”
[…… 법칙을 무시하는 힘.]
“그래.”
그런 대화에 무투파 검신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도 그리 다르지 않다네.]
“어?”
[결국, 우리가 무를 추구하는 건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네. 생각할수록 비슷하군. 결국, 무도 또한 법칙을 무시하기 위해 수련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마법도 비슷해. 현실을 바꾸고 뒤틀어 법칙을 무시하는 게 목표야.
[그렇게 따지면 흑마법도 다를 게 없지.]
[신성력 또한, 신의 힘을 통해 법칙을 무시하고 사람을 구하는 힘이겠네요.]
진이 던진 화두가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 힘을 파악하는 게 먼저겠네.”
[아. 이걸 어떻게 손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그걸 왜 네가 해?”
[……그럼?]
“이런 건 일단 전문가를 찾아가야지.”
[전문가가 있어?]
당연히 있다.
이건 없을 수가 없다.
“너희들 말만 들어 보면, 결국 센 놈들이 대충 알고 있다는 거 아니야?”
[경지에 관한 고찰을…….]
검신은 충격을 받았는지 중얼거렸지만, 진이 신경 써 줄 건 아니었다.
게다가, 진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들 말대로라면 결국 센 놈들은 저 힘에 보다 가까이 다가갔다는 뜻이니까.
“그럼, 가자.”
[어디? 대체 누굴 떠올린 거야?]
“이면의 마왕과 지옥에서 마왕에 제일 가까운 악마. 둘을 만나면 해결되지 않겠어?”
진은 확언할 수 있었다.
신을 제외하면, 저 둘이 세상에서 제일 강할 것이다.
[이게 있네…….]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 * *
진의 꿈속 건물 안.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군. 내 영토 안에, 그대의 영역이 있다니.>
이면의 마왕은 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됐어. 다른 손님이 있거든.”
<손님?>
그 순간, 허공에서 악마가 나타났다.
오만하고 권태로운 표정의 미청년.
“벌써, 청년까지 힘을 회복하신 겁니까? 적응이 빠르시네요?”
<그대가 만들어 준 세상이 너무 좋은 덕분이지.>
바로, 2의 악마 바알이었다.
바로, 2의 악마 바알이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흔쾌히 참석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다. 그보다…… 재미난 자가 있군.>
소개를 시켜 주기도 전에, 바알이 대화의 물고를 텄다.
<내게 한 말인가?>
<네가 소문으로 듣던 이면의 마왕이냐?>
아니.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알았으면 고개를 조아려라. 악마야.>
<고작해야 이면의 왕 따위가. 감히 내게 그따위 말을 하는 것이냐?>
괴수 대전이 발발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진은 그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
‘꾸, 꿀잼!’
그 싸움을 흥미롭게 관찰 중이었다.
[이면의 마왕은 한 세계의 주인이 됐지만, 온전한 세계의 주인이 아니야. 이를테면 소국의 왕 정도지.]
심지어, 이런 훌륭한 해설자까지 있는데 이 싸움을 말리는 건 옳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 바알은 대국의 공작 정도 되겠네?’
[맞아. 소국의 왕과 대국의 공작. 비슷한 힘을 가진 이들이라고 할 수 있어.]
물론. 아쉽게도 싸움이 벌어지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쯤하실까요?”
진의 말에, 으르렁거리던 둘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차피 마왕님이나 바알 님 두 분 다 제대로 힘을 사용하진 못하시잖아요.”
<틀린 이야긴 아니군. 물론. 내가 더 강하겠지만.>
<하. 여우들 사이에서 왕 노릇을 한다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바알이여.>
엄격, 근엄, 진지한 양반들이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인지.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어떠세요?”
<어떤 방법이지?>
<난 동의한다. 왕의 인재인 성자라면 믿을 수 있다.>
진이 손짓하자, 건물이 사라지고 꿈 속 하늘이 보였다.
“저 검은 구체는 경지의 끝 너머에 있는 힘이라고 추정되는 기운이에요.”
<경지의 끝 너머?>
“예. 제가 확인한 바로는 법칙을 무시하는 힘 정도 되는 거 같네요.”
<그대가 모은 것인가? 그대는 경지의 끝에 도달해 저 힘을 쟁취한 것인가?>
바알은 어쩐지 흥분한 얼굴로 진에게 물었다.
“아뇨. 훔쳤습니다.”
<…… 뭐?>
“훔쳐 왔어요. 그나마 두 분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니까 조언을 듣고자 모신 거예요.”
진의 말에 이면의 마왕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고, 바알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저 힘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지?>
“음. 이걸 어떻게 설명드려야 하지. 다른 곳에서 온 인간들이 있는데, 그들을 돌려보낼 생각이에요.”
뭔가 새로운 질문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이질적인 인간들을 말하는 모양이군.>
바알은 그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알고 계셨어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길레스의 계획을 방관한 건 그들 때문이었다. 한 번 청소할 필요가 있었다.>
대체 어떤 사고방식이어야 그들을 청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바람이 그들을 알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저도 동의해요. 그들은 배제될 필요가 있어요. 저는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에요.”
<역시, 왕이 될 남자는 달라도 다르군. 내 반만큼 보는 놈들도 없었는데…….>
아니. 형님. 지금 악마왕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일단, 그 악마왕은 덮어 두죠. 지금은 저걸 활용할 방법이 필요해요.”
<알겠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나도 저것과 비슷한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역시, 세계관 최강자.
진은 이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로메른은 아닌 모양이었다.
[진짜? 저걸? 가능하다고!?]
설마, 악마가 아는 걸 자신이 몰랐다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 힘과 존재를 희생하면 법칙을 비틀 수 있다. 그대를 악마로 만들고 왕으로 만들려는 방법이었다.>
“저번에 이야기하신 그거네요?”
바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나 했더니 우리가 회귀한 방법이랑 비슷하네. 우리는 법칙을 무시한 게 아니라. 상응하는 대가를 바친 거지만. 어쨌든 법칙을 비틀긴 했으니까.]
로메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쨌든 상응하는 대가를 바친다면, 법칙을 비틀 수 있다는 거지?’
[어. 그 조율이 미치도록 어렵긴 하지만.]
그럼, 이제 다른 쪽의 의견을 들어 볼 차례였다.
진이 이면의 마왕을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영역과 힘이 가장 강해지는 피라미드 안에서 힘을 사용할 때, 저것과 비슷한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조건이 좀 많이 붙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 비슷하긴 하지만, 훨씬 상위의 존재가 사용한 힘이다. 저건 ‘세계의 주인’의 힘이다.>
이 둘을 부른 건 정답이었다.
힘의 정체가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대도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예?”
<이 꿈속의 주인은 그대다. 이곳은 그대의 영역이자 영토. 내 것과도 비교도 되지 않게 미약한 힘이겠지만, 어쨌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어떻게 저 힘을 사용할지 대충 감까지 잡을 수 있었다.
‘만약…… 생각대로라면 차원 이동, 진짜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가상현실인지 뭔지에 처박아 두는 거 아니었어?]
‘기다려 봐. 기가 막힌 생각이 났으니까.’
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건 볼 때마다 어째 더 불안해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