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선택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으시다고요? 가능합니다.”
회의 시작과 동시에 던진 폭탄 발언.
이렇게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올 줄 몰랐는지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게 진짜 가능하다고?”
“흐음. 만약 가능하다면…….”
“새로운 선택지가 생기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지던 것도 잠시.
“근데, 애초에 진짜 가능한 거야?”
의심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모든 운명을 진에게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진은 의심하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그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 보자고요. 의심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처음 봤는데, 덜컥 믿는다?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죠.”
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런 합리적인 의심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전 의심 속에서 발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런 합리적인 의심이 있는 여러분이, 퀘스트는 왜 믿는 겁니까?”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애초에, 진짜 세상을 멸망시키면 지구로 귀환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이런 의문을 여태 아무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럴 리 없지.’
의심되지만, 대안이 없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우리도 가능한 거 아닙니까?”
진의 물음에 대답한 건,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여인이었다.
“차원 이동은 불가능하단 결론이 나왔습니다.”
“영생을 얻었으니 여러분에겐 무한한 시간이 있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하겠죠.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린 한시라도 빨리 지구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뭐. 이해는 안 되지만 납득은 된다.
이건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성’의 영역이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기 위해 퀘스트를 믿었고, 계획을 진행했으며…….
‘마지막엔 성공한 거지.’
실제로 세계가 멸망해 정령들이 회귀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누군가 모든 의심을 불식시키고 추진했던 듯했다.
진의 시선이 상석 쪽으로 향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지구로 돌아가야 할 절박한 이유가 저 여자한테 있다는 건데…….’
솔직히 말하면 궁금하지 않았다.
가족이든 뭐든 어차피 뻔하디 뻔한 이야기일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만든 판은 진이 엎어 버렸다.
“뭐, 이젠 상관없지 않아요? 저 때문에 계획이 몇십 년은 후퇴하셨을 텐데요?”
“……잘도 우리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군요.”
“아니죠. 여러분은 저한테 감사해하셔야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
“제가 퀘스트를 주는 놈이라면, 여러분을 차원 이동시키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합리적일 거 같은데요.”
이들은 죽이는 방법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방법도 간단해요. 여러분이 여태 무시한 세월을 한 방에 주입하는 거죠. 그럼, 정리 끝 아닌가요?”
정적이 회의실에 맴돌았다.
영생을 혜택이라고 생각했지 그게 자신들의 목줄이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대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겠죠.”
“우리도 그걸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에요. 나름대로 약속을 이행받기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했어요.”
진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대비책을 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뭐. 생각만큼 멍청한 분들이 아니란 건 알아서 다행이네요.”
“우릴 모욕하는 건가요?”
“칭찬이에요. 그래도 정말 노답이 아니란 건 알았으니까요.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우릴 시험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당연하죠. 여러분이 기대 이하였다면, 차원 이동을 제시하기보다는 죽이는 게 싸게 먹혔을 테니까요.”
“그대는…….”
“성자가 그래도 되냐? 뭐 이런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죠? 당연히 됩니다. 여러분은 악이고 전 선이거든요.”
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식의 해방은 악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교단의 성자가 선이다.
심지어, 인간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잘 생각해 봐요. 여러분들의 카운터나 다름없는 제가 뚜둥 하고 성자가 됐어요. 아마 빛의 신도 제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요?”
진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황만 놓고 보면, 신조차도 진이 선이라고 말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여러분이 동의하시기만 하면 바이러스 개발을 비롯한 지구인 말살 계획은 전면 취소하겠습니다.”
회의장에 모인 이들은 바이러스 개발이란 말에 한 번 놀라고, 지구인 말살 계획이란 말에 한 번 더 놀랐다.
“……바이러스요?”
“예. 지구인들만 죽이는 바이러스를 개발 중이거든요. 여러분이 쌓아 준 데이터가 굉장히 도움이 됐습니다.”
진의 말에, 한 남자가 소리쳤다.
“그, 그게 가능할 리 없습니다! 지구인과 대륙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큰 틀에서 같은 인간입니다!”
그 말은 정답이었다.
애초에 이런 구분이 가능했다면, 지구인만 공격하는 마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난 초특급 천재야.’
이들에겐 진은 인지를 뛰어넘은 천재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사나이다.
“육체야 그렇겠죠. 영혼은요?”
“여, 영혼!?”
“쉽게 말하면, 여러분의 영생을 주는 그 낙인. 그 낙인을 촉매로 발동하는 바이러스면?”
“그,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편협한 사고방식을 좀 버리세요. 아직 진리의 도서관도 못 들어가 보셨죠?”
“진리의 도서관이 뭡니까?”
“아니. 그걸 모르신다고요? 세상에…… 그게 뭔진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세요.”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진의 반응에 바이러스 전문가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최고 전문가는 나야!
이걸 한 방에 보여 준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차원 이동 한번 해 보죠. 여러분이 세계 멸망을 포기하시면 연구해서 무조건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무조건이요?”
“예. 솔직히 시간이 좀 필요한 일이지, 별로 어려울 거 같진 않거든요. 정 못 믿으시겠으면 제 신성력과 그 근원인 신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사제에게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사실 진에겐 아무런 영향 없는 약속이다.
신성력은 빛의 정령인 ‘흑마법사’ 로메른이 만든 인공 신성력이고, 애초에 신을 믿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그들에겐 전혀 다르게 들렸다.
“진심이신 모양이군요.”
“예. 진심입니다. 뭐. 마나의 맹세도 해 드릴까요? 정령사 쪽은 맹세라고 할 게 없으니까요.”
“……부탁드릴게요.”
“뭐. 어려운 거라고 부탁까지 하시나요.”
진은 곧장 마나의 맹세까지 했다.
[후후.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내가 만든 특제 서클을 익히라고 한 거야. 언제 적 마나의 맹세야.]
물론. 이것도 아무런 소용없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진짜 차원 이동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맹세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다.
“…….”
진이 아무 거리낌없이 맹세하자, 그녀는 진을 빤히 바라봤다.
“너무 쉽게 해 주니까 오히려 찝찝하신가 보네요.”
“……그래요. 이렇게 곧장 수락해 주실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게다가 우리에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으시군요.”
“예. 새로운 대안이 나왔는데 여러분들이 굳이 절 자극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돌아가기 싫으신 분들은 대륙에 남아 있으셔도 괜찮습니다. 모두 돌아가셔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남을 사람은 남아도 된다는 건가요?”
“당연하죠. 솔직히 말하면 전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저 같은 분들이 있을 텐데요.”
당장 진을 찾아왔던 황금상단의 주인 ‘골드’만 해도 그랬고, 수련에 미쳐 있는 ‘최필규’도 그랬다.
“어떻게 할지는 여러분에게 온전히 선택권을 넘기겠습니다.”
이쪽에도 대안을 제시해 줘야 날뛰지 않는 법이다.
“어떠십니까. 이제 여러분이 세계를 멸망시켜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괜히 나중에 뒤에서 헛짓거리하지 말고, 필요한 거 빨리 말하세요.”
진의 말에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두 번째, 최필규였다.
“동생. 난 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자면서도 수련할 방법이 있나?”
“에이. 우리 사이에 뭘 사고팔아요. 그 방법 있어요. 저도 써먹었던 방법인데…… 따로 말씀드릴게요.”
“오오! 역시!”
그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손을 들고 말을 했다.
“영생을 꼭 포기해야 하는 겁니까?”
정말 좋은 질문이었다.
“아뇨. 그 영혼에 찍힌 낙인이 문제인 거지. 여러분이 영생을 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흡혈귀가 되시는 거나, 리치가 되셔도 됩니다. 다양한 방법이 있겠네요.”
“……차후 어떤 방법으로 영생을 살든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예. 대륙에 피해만 주지 않으시면 상관없어요. 전 굳이 오래 사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이쪽 연구는 전혀 안 했지만요.”
진은 자신이 수명에 별다른 욕심이 없다는 걸 자연스럽게 보여 줄 수 있었다.
“인간으로 영생을 살 순 없는 겁니까?”
“있겠죠. 연금술, 마법, 단련, 흑마법, 신성력.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것마저 떠먹여 달라는 건 아니시죠?”
“……아닙니다.”
아니긴, 표정을 보니까 욕심이 넘쳐나는구먼.
물론 진은 그 속내를 내색하지 않았다.
“왕이 되거나 권력을 잡아도 상관없습니까?”
“당연하죠. 여러분의 향상심을 거세할 생각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셔도 돼요. 다만, 대륙 정복 같은 걸 하시면 저랑 싸우게 되는 건 아시죠?”
“이것도 된다니…….”
“능력이 있는 자가 권력을 잡는 게 왜 문제겠어요. 말 통하는 지구인 여러분이 권력자면, 오히려 좋습니다.”
진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세계 멸망만 아니면, 무슨 짓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뭐. 인간을 죽이면서 쾌락을 느끼는 싸이코패스는 없으시죠?”
진의 말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중 그런 자는 없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시죠? 특별하지도 않은 일반인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 왔는데 정상이라고요?”
“……충분히 통제하고 있어요.”
“아이고야.”
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몇몇 특별한 분들이야 있겠죠. 지구로 돌아간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거나, 형님처럼 단련의 끝을 보겠다는 그런 분들. 하지만…… 보통은 아니잖아요?”
진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다들 어딘가 망가진 부분이 있어요. 여태까진 무시하거나, 애써 숨기셨겠지만…… 목표가 귀환이라면서요. 그 꼴로 지구를 가면 멀쩡해져요?”
“…….”
“지구로 그 상태로 돌아가면, 여러분만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진짜 위험합니다.”
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당장 왕국에서 잡은 지부장만 해도, 미친놈에 가까웠다.
다른 이들이라고 다를까?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대륙에 남으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며 남은 인생 사실 거예요? 기왕 사는 인생 해피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면, 정신적 트라우마가 될 만한 일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제가 왜 여러분을 죽이는 걸 먼저 생각했을까요? 기본적으로 여러분은 망가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 멀쩡한 분들에겐 죄송합니다.”
진이 이들을 도와주는 대신 원하는 건 딱 한가지다.
“그러니, 치료를 받으세요.”
물론. 치료란 건 명목일 뿐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일단, 이 지구인들의 위험성을 ‘거세’하는 게 먼저였다.
“제가 여기까지 와서 치료를 권할 정도면, 지구의 정신과 치료 같이 허접한 게 아닐 거란 건 예상되시죠? 약 같은 건 절대 안 먹일 테니 걱정하진 마시고요.”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전 여러분께 모든 선택지를 드렸으며, 맹세까지 했습니다. 이 제안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선택해.
평화롭게 치료받을지.
아니면, 전쟁을 시작할지.
진은 선택권을 그들에게 넘겼다.
‘자. 어떻게 나올래?’
진이 기다리고 있는 반응은 눈앞의 지구인만이 아니었다. 진의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 하나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