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두 번째
지식의 해방 수뇌 회의가 급히 소집됐다.
원래라면 불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성자를 만나고 왔다는 소문에 모든 이들이 참석했다.
전에 이뤄진 회의보다 더욱 많은 이들이 회의장에 앉아 있었다.
“다 왔으면 빨리빨리 시작하자고!”
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엄숙한 회의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한데, 누구하나 그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두 번째로 이 세상에 떨어진 지구인이었다.
첫 번째와는 달리, 일신의 무력을 키우는 데 모든 것을 투자한, 지구인 중 최강의 무력을 지닌 남자였다.
“참을성 좀 기르시죠. 당신만 바쁜 게 아니에요.”
“수련마저 멈추고 왔다. 이런 쓸데없는 대화할 시간에 빨리 진행해.”
“후…… 시작하죠.”
첫 번째의 말에 보고가 시작됐다.
“다들 바쁘신 것 같으니 거두절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진과 대화를 나눈 ‘골드’는 두 번째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성자는 파악 불가의 천재입니다. 이미 이세계에 올 때 마나를 다룰 수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진이 해 줬던 이야기를 모두에게 설명했다.
육체를 터트리고, 영혼만 이동한 이야기를.
“그래서 새로운 지구인이 오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게 보는 게 합당할 겁니다.”
두 번째는 히쭉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놈인데? 나도 그 새끼한테 엿을 먹여 주고 싶었는데.”
“흠흠.”
골드는 헛기침을 한 뒤, 남은 것들을 보고했다.
“차원 이동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귀환을 원치 않는 이들에게도 꽤 솔깃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지부장은 사망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치 그는 신적 존재가 될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궤를 초월한 천재.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보고가 이어질 때마다 회의장에 모인 이들은 놀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그는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호. 경고?”
두 번째가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만약, 세상이 멸망하면 지구까지 쫓아와 복수하겠단 경고였습니다.”
회의장이 침묵에 잠겼다.
그런 침묵 속에서 두 번째가 웃음을 터트렸다.
“맘에 든다! 맘에 들어!”
유일하게 그의 웃음소리가 회의실을 채웠다.
첫 번째는 그 분위기를 환기하듯 말했다.
“확인이 필요해요. 그가 진짜 그런 힘을 가졌는지 확인해야 해요.”
“예. 그것도 맞습니다. 그에 관해 성자의 전언이 있습니다.”
“전언이요?”
“예. 초대만 해 주면, 홀로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두 번째는 그렇게 말한 뒤 첫 번째를 보며 말했다.
“앞뒤 재지 말고 바로 초대해라. 저번에 네 부탁을 들어주며, 내버려 두었던 빚을 받겠다.”
“그걸 여기에 쓴다고요?”
“쓰겠다. 만나고 싶군.”
어차피 초대해야만 한다면, 여기서 빚을 하나 줄여 두는 게 이득이었다.
“좋아요.”
첫 번째는 두 번째의 부탁을 승낙했다.
“그를 초대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성자의 방문이 결정됐다.
* * *
며칠 뒤.
저번에 찾아왔던 ‘골드’가 진을 만나기 위해 찾아 왔다.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빠르네요. 좀 더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만남 장소는 어디죠?”
“제국의 비밀 회의장 중 한 곳입니다. 이번 대화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곳입니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곳을 떠올리면서, 제 손을 잡으세요.”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워프게이트 타고 또 한참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이, 한 방에 가죠. 뭐해요. 얼른 잡아요.”
“공간 이동을 한다는 겁니까? 그것도 제 기억을 읽어 장소를 추론해서!?”
그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설명충이신가.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강하게 떠올려요.”
“……진짜 되는 겁니까?”
“아. 쫌 집중해요.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집중하고 있는 그걸…… 아무튼 이게 좀 복잡해요.”
그가 눈을 감고 집중한 순간.
‘부탁할게.’
[알겠어. 멋진 척할 준비나 해.]
로메른과 정령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진과 골드는 제국 비밀 회의장에 도착했다.
“공간 이동이 뭐 어려운 거라고…… 그렇게 눈을 질끈 감으십니까. 도착했습니다.”
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
그는 멍하니 회의장 입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하하하하하-!
대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 그 안에 담긴 마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빨리 도착할 줄은 알았지만, 공간 이동이라니.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한 남자가 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잠깐 대화 좀 하고 들여보낼 테니, 꺼져라.”
그가 골드를 보고 손짓하자, 골드는 대답도 하지 않고 호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와. 의리 없네.”
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돈놀이하는 놈들의 생리는 저런 법이다.”
“뭐, 그것 때문만은 아닌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하죠.”
진의 시큰둥한 말에, 그는 히쭉 웃었다.
“기개가 있는 놈인 거 같던데, 한번 손을 섞어 보는 건 어떠냐.”
“아. 칭찬은 감사한데 그다지 안 당기는데요. 강하신 거 같아서 귀찮을 거 같네요.”
“허. 그 말은 이긴다는 소리 같은데?”
“당연히 이기죠. 저와 선생님은 추구하는 게 다르니까요.”
“추구하는 게 다르다?”
“예. 선생님께선 무도를 추구하지만, 전 뭐랄까, 좀 다른 걸 추구하거든요.”
“보고 싶군.”
딱 봐도 열혈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런 양반들은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이지.’
굳이 이 싸움을 피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직접 싸울 필요가 없기도 했으니까.
“음. 원래라면 도망쳐서라도 사양했겠지만…… 견디실 것 같으니까 가볍게 한번 해보시죠.”
“가볍게?”
“아. 저한테 가볍단 뜻이에요. 아저씨는 죽기 살기로 하셔야 할걸요?”
진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좋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만약 내가 지면 빚을 진 걸로 하겠다.”
“오. 그거 좋은데요? 저도 제가 지면 빚 하나 진 걸로 할게요.”
“크하하핫. 점점 더 맘에 드는 군!”
스르릉.
그는 허리춤에 맨 투박한 검을 한 자루 꺼냈다.
그와 동시에 진 또한, 뒤통수 쪽 머리카락을 몇 개 뽑은 뒤 머리카락을 날려 보냈다.
‘검성, 부탁할게. 죽이진 말고.’
[허허. 재밌군, 재밌어. 로메른. 저 머리카락이 연쇄적으로 자랄 수 있게 부탁하네.]
[알겠어. 걱정 말고 싸워.]
그리곤, 진이 입을 열었다.
“분신술.”
펑-
머리카락 하나에서 빛이 나더니, 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분신술이라! 재밌겠군!”
그는 분신이 튀어나오자마자 앞으로 달려 나갔지만,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허허. 놀라운 육체군. 기예가 아닌 육체를 갈고닦은 자야. 하나, 그렇기에 부족하지.]
서걱.
분신의 첫 검에 그의 검이 부서졌고.
[기예를 등한시 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야.]
펑-
서걱.
두 번째 검에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을 베었으며.
[그러니, 이리 약한 것이지. 그래도 지금껏 쌓아 온 무가 헛되진 않은 모양이구나. 훌륭하다.]
펑-
서걱.
세 번째 검에 그의 마음을 베었다.
‘뭐? 저게 약한 거라고?’
그건 어디까지나 검성의 기준일 뿐이었다.
“크하핫!”
저 괴물 같은 인간은 검성의 검을 3번이나 받고도,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만약 저자와 진심으로 싸운다면?
‘어때?’
[분신 30개체 혹은 그대의 오른팔이면 죽일 수 있다네.]
분신 30개체면 그게 얼마야!?
사람 하나 죽이자고, 도시 하나를 던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른팔이 회복은 되는 거지?’
[회복되는 기준이면, 반년은 요양해야 할 걸세.]
‘미친. 무슨 반년을…….’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른 왕국은 몰라도, 제국에는 저만한 강자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빡세네.’
지식의 해방과 결전을 벌였다면, 진짜 골치가 아파졌을 것이다.
“만족하셨습니까?”
“만족했다. 모든 기예는 순수한 육체에 패배한다는 게 내 지론이었는데, 그 가능성을 본 것 같군.”
그 말을 들은 검성이 입을 열었다.
[흠.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매우 다르다네. 굳이 저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 또한 틀린 방법은 아닐세. 육체에 념을 담을 수 있다면, 그가 원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일세.]
진은 그 말을 그에게 그대로 전해 주었다.
“이해하셨습니까? 념입니다. 일종의 개념 같은 건데…….”
“뭔지 대충 감이 잡힌다.”
“그곳에 원하시는 게 있을 겁니다.”
“…….”
그는 뜨거운 눈빛으로 진을 바라봤다.
원래 열혈 캐릭터는 싸운 뒤, 이렇게 조언을 던져 주면…….
“3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총 3번 도와주마.”
이렇게 알아서 호구가 되는 법이다.
검성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그가 어떤 캐릭터인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그에겐 이 세상이나 지구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무의 뜻을 두고, 정진하는 과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지구 보다는 대륙에 가까운 인간이다.
“조금 전의 빚까지 포함하면 총 4번입니까?”
“하하. 욕심도 많구나. 좋다! 4번!”
음메에에에.
흑우, 아니. 호구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 호탕하십니다. 들어가시죠.”
“좋다! 가자!”
“그리고 보니, 형님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형님?”
“예. 어르신은 좀 별로 아니에요?”
“그하핫. 그것도 그렇군. 난 최필규다.”
“오오. 이름에서도 기백이 느껴지시는데요?”
“역시, 동생이 뭘 아는군. 내가 통천 최씨…….”
그렇게 둘은 대화를 나누며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회의장 안에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가장 상석에 앉은 이가 입을 열었다.
“결과는요?”
“졌다. 강하더군.”
“……무예는 당신보다 뛰어나고, 마법은 공간 이동을 할 정도고, 신성력은 성자이며, 심지어 대정령사의 칭호까지 얻은 자라는 거네요.”
저게 칭찬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칭찬이 아닌 ‘팩트’다.
진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 대정령사는 좀 과장이 있는 겁니다. 진짜 대정령사는 아닙니다. 그저 재능이 그 급이라는 거죠.”
“……정령술은 급격한 발전 여지마저 있다?”
“뭐, 그렇죠? 그나마 정령술 발전이 제일 빠르긴 할 테니까요.”
“…….”
그녀는 말없이 진을 바라봤다.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네요. 그 정도 재능을 한 사람이 몰아 받았다니.”
“뭐,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법 아니겠습니까?”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옆에 있는 호구 형님을 보며 물었다.
“형님. 어디 앉을까요?”
진의 말에 회의장이 침묵에 잠겼다.
두 번째에게 형님이라니!?
저렇게 친근하게 대화하는 사람은 첫 번째가 유일했다.
그야말로 경악할 만한 일이었는데, 그의 대답이 더더욱 놀라웠다.
“동생 자리 찾을 필요 없다. 이 둘이 비켜 줄 거다.”
그 말과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두 사람이 후다닥 일어났다.
“친절하신 분이네요.”
“저딴 놈들 신경 쓰지 말고, 와서 앉아라. 동생.”
“예. 형님.”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동생과 형님이 돼서 온 걸까.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한데, 시선은 온통 진에게 몰려 있었다.
애초에 두 번째는 대답해 주지 않을 걸 알았으니까.
“다들 저와 형님의 관계가 궁금하신 거죠?”
회의장에 모인 이들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지구에서의 인연은 아닙니다. 그저, 서로를 인정한 거예요. 전 형님의 무학을, 형님은 제 잡학을.”
“잡학이라고 낮잡아 부를 게 아니다.”
“에이. 이것저것 섞였으니 잡학이죠. 아무튼 그런 겁니다. 그 무협지에 고수끼리 통하는 뭐 그런 겁니다.”
“고수라…… 동생의 표현법이 마음에 든다.”
“에이. 사실이잖아요. 형님.”
“그하핫. 좋군. 좋아.”
둘의 꽁트와 함께 회의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