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난 천재다
텐트 안에 식사가 차려졌음에도, 그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궁금한 게 많으실 겁니다.”
“…….”
“일단, 저 지구인입니다. 한국 사람이고요.”
“혼혈인가?”
“에이. 그럴 리가요. 이미 아시잖아요. 이 육체가 대륙의 존재인걸요.”
“…….”
어딜 떠보려고 들어.
“오히려 제가 되묻고 싶은데요? 왜 지구의 육체를 유지한 채 이곳에 왔습니까?”
“……그게 무슨.”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선택지가 있었는지 고민하는 모습.
“애초에 어떤 미친놈이 자신을 납치하는 상황에서, 왜 미친놈 말을 믿은 겁니까?”
“……그대도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면, 저항할 수 없었음을 알았을 텐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잖아요. 애초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데, 우리가 쫄 필요가 뭐가 있어요?”
“……마나?”
“예. 전 육체를 매개체로 거길 통째로 터트려 버렸는데요?”
“무, 무슨!?”
“어려운 거 아니잖습니까. 마나가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으면 그냥 쓱 하고 짠 하면 되는 건데.”
“그게 쉬울 리가…….”
지구인들은 마나조차 느껴 본 적이 없다.
처음 마나를 발견하고, 그걸 활용해서 폭발을 일으킨다?
솔직히 말하면 현자나 로메른도 불가능한 일이다.
진이 묘사하고 있는 자신은 그만큼 ‘천재’다.
“뭐가 어렵습니까. 마나야 어차피 내 손에 이끌려 움직이는 노예 같은 놈들인데.”
진이 손짓하자, 대기의 마나가 요동친다.
마치 주인을 모시듯, 경배하듯.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설마 안 되시는 겁니까?”
“…….”
“특별한 지구인들을 데려온 거 아니었어요? 평균 재능이 그래도 저의 반만큼은 되는 줄 알았는데.”
진은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기대 이하네요?”
그가 뭐라고 반응하기 전에, 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족쇄는 왜 차고 계신 거예요?”
“족쇄?”
“모르시는 거예요? 영생을 주고, 퀘스트를 주는 그거요. 영혼에 낙인을 박아서 작동하는 건 아시죠?”
“…….”
“설마 몰랐어요? 아니. 이 양반들이 진짜. 다들 여태 뭐 했어요? 추적해 보니까 수백 년은 대륙에 있었던 거 같은데.”
“…….”
진은 아공간을 열어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지부장의 영혼을 잘라 만든 영생의 반지였다.
“지부장님의 낙인을 제거해서 만든 반지에요. 애초에 전 낙인을 거부했고요. 아니. 영혼에 낙인을 찍는데, 그게 안 느껴지나? 이 고통을 어떻게 참으셨대.”
진은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건넸다.
“보여 드린다고 느끼시는 바가 있으려나 모르겠는지만요.”
“……그 정도 안목은 있다.”
아마도 진짜로 그 정도 안목은 있는 거 같았다. 그가 반지를 살펴본 뒤, 슬슬 믿는 눈치였으니까.
“……지부장은 죽었나?”
그는 진에게 반지를 되돌려주며 물었다.
“예? 그 양반을 왜 죽여요? 불쌍한 양반이던데.”
솔직히 말하면 눈곱만큼도 불쌍하지 않지만, 지금은 불쌍하다고 말해야 한다.
“불쌍하다?”
“예. 정신이 마모되다 못해 일부가 부서지셨더라고요. 거기다 조악한 육체 개조까지 하셔서 영혼도 일부 손상됐고요.”
“그게 조악하다니…….”
“미완성 아니었어요? 개선점이 많던데. 뭐, 미완성 타이밍을 노리고 공격한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그가 살아 있다면, 그는 어떻게 됐지?”
“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정신을 치료하고 새 인생을 살게 해 드렸죠.”
“그, 그게 가능하다고!?”
“예. 기억을 지우고, 육체를 아기로 바꿨어요. 모든 걸 잊고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사실 거예요. 한 왕국을 어둠 속에서 지배하시던 분의 소원치곤 소박했어요.”
그가 불쌍하다고 한 건, 지금을 위해서였다.
지구로 되돌아가기 싫은 녀석들에게, 대안을 제안해 준 것이다.
“……녀석답군.”
지부장과 안면이 있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궁금한 게 있었는데, 대체 세상은 왜 멸망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대도 퀘스트를 봤을 텐데?”
그는 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퀘스트 보상이 지구로의 귀환인 건 알아요. 근데, 굳이 왜 퀘스트를 하냐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지?”
“그냥 차원 이동하면 되잖아요. 왜 멀쩡한 세계를 멸망시켜요?”
“그게 가능했다면 우리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설마, 그대는 가능하다는 건가!?”
“어? 고작 차원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거예요? 진짜요? 설마설마했는데…….”
오만한 천재의 모습을 연기한 이유.
차원 이동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는 한 번에 믿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다면, 그대는 왜 이곳에 있지?”
“어. 이곳이 더 좋아서요? 지구 쪽 지식이야 인스턴트 느낌이잖아요. 그냥 책 보면 머릿속에서 호로록 정리되니까요. 지겹거든요.”
“…….”
“이쪽 세계는 재밌는 게 지천으로 널려 있어요. 마나, 신성력. 두 가지만 파고들어도 평생 동안 재밌게 놀 수 있을걸요?”
“놀 수 있다라…….”
진의 말에 그는 흡사 충격이라도 먹은 거 같았다.
그들에겐 ‘생존’ 그 자체였던 곳이 눈앞의 진에겐 놀이터일 뿐이었으니.
“예. 그게 중요하죠. 특히 신성력이 얼마나 재밌는지 아세요? 제한이 빡세긴 해도, 그만큼 이질적인 힘이라니까요?”
“신성력에 제한이 있나?”
“예. 이쪽 빛의 교단은 죄를 범하면, 출력이 확확 떨어지거든요. 제가 괜히 착한 척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전 이 신성력을 연구해서 빛의 신을 한번 만나 볼 생각이에요.”
“그게 가능하다고!?”
“아직은 불가능해요. 그래도 신의 존재는 확인했으니. 어떻게 잘 비비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빛의 신? 그딴 걸 왜 만나.
괜히 만났다가 세상을 부탁한다고 하면 골치 아파지는 것이다.
“그렇게 빛의 신을 만나서 힘 사용법을 훔쳐 배운 뒤에, 절 끌고 온 놈을 엿 먹일 생각이에요.”
하물며, 진을 이곳에 끌고 온 녀석에게도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다.
신의 일은 신끼리.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이고, 오랜만에 말 통하는 분을 만나서 그런지 말이 많아졌네요. 성자가 이게 안 좋다니까요? 어디 가서 잘난 척을 할 수가 없어요. 아무튼, 절 찾아오신 이유는 뭔가요?”
이만큼 정보를 풀었으니 대화의 방향을 정했을 터, 그에게 배턴을 넘겼다.
“우린 그대가 우릴 데려온 존재가 아닌, 이 대륙의 관리자…… 이를테면 빛의 신에게 세상을 구하라는 퀘스트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아. 그래서 찾아오셨군요. 이제 싸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다.”
“근데, 좀 경솔한 거 아니에요? 우릴 부른 존재의 목적이 변했다면, 그대들이 버림패가 됐다면요?”
“……그것도 고려하고 있다.”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지구로 귀환하기 싫어하는 쪽이 총대를 멘 거네요.”
“그렇다.”
“축하합니다. 도박에 성공하셨네요.”
“그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역시나 그는 의심을 전부 지우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진이 흉내 낸 ‘천재’의 모습은 그만큼 이질적이었으니까.
“믿으시든 안 믿으시든 별 상관은 없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식의 해방과 체스를 두듯 싸우는 것도 제법 재밌었고요.”
“…….”
“아이고, 이거 실례했습니다. 앞에 모셔 두고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무튼, 전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우리가 진심으로 움직이면, 그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알아요. 제 계획대로면 적어도 2~3년은 지나야 엇비슷해지거든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상관없다?”
“예. 질 거 같으면 도망치면 되니까요. 빤스런하고, 연구나 하면서 살면 되죠.”
“그대에게 이 대륙은 아무런 의미가 없나 보군.”
“그건 아니에요. 세상이 발전하며, 제 연구의 일부분을 도와주니까 솔직히 말하면 세상이 번성하면 할수록 좋긴 하죠. 정 안되면 도망친다는 거예요. 아쉽지만 전 살아야죠.”
“성자가 도망친다고?”
이런 적이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상상한 성자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자였을 테니까.
“일단 도망은 쳐도, 전 그 일을 잊지 않을 거예요.”
“…….”
“전 언젠가 빛의 신을 만날 거고, 그 힘으로 날 엿 먹인 놈들에게 배로 갚아 줄 거예요.”
성자답지 않게, 진의 눈엔 일종의 광기가 일렁인다.
“지구로 도망쳤다고 방심하지 마세요. 지구마저 부숴 버릴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런 분위기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다행이네요. 그런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니까요.”
“……보고할 시간이 필요하다.”
“예. 충분히 드릴 수 있습니다.”
“제국으로 초대하겠다.”
“불안하시면 혼자 가겠습니다.”
“……그대는 겁이 없는 건가?”
“왜 없겠어요. 그저 도망칠 자신이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의 마법 체계로 마법을 배우셨다면, 절 못 막아요.”
“……연락하겠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텐트를 나섰다.
‘자 그럼.’
맘껏 질렀으니.
‘다들 모여 봐. 할 말이 있어.’
이제 정령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할 차례였다.
* * *
진은 한껏 분위기를 잡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다들 방금 대화를 듣고 의문을 떠올렸을 거야.’
여태까지 숨겼던 비밀.
지구인이란 사실을 녀석들에게 알려야 했다.
‘미안해.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너희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진의 진지한 분위기와는 달리, 정령들의 분위기는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다.
‘……분위기 왜 이래? 이거 진지한 이야기라니까!’
[얼씨구, 방금 미안하다고 한 녀석이 화를 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게 중요한 이야긴데 다들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거 같으니까 그렇지!’
[허허. 이 상황에도 분위기를 잡으라 말하다니. 진 그대답군.]
애써 진지한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해도, 전혀 분위기가 잡히지 않았다.
[야. 진. 너 우리가 바본 줄 알아?]
‘갑자기?’
[너한테 뭔가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 애초에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선택한 녀석인데, 우리가 정말 신경도 안 쓰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어. 음. 그것도 그렇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렇다.
진이 연기한 가짜 천재 저리가라 할 정도의 인재가 바로 정령들이었다.
[현자랑 네가 쿵작쿵작할 때부터 대충 눈치를 챘어.]
‘……그래?’
-난 진이 그러자고 해서 그랬을 뿐이야.
‘어!? 인제 와서 나한테 떠넘긴다고!?’
이미 정령들은 대충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현자 저 음흉한 녀석이 정령사를 랜덤으로 선택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어.]
[허허. 랜덤치곤 이보다 딱 맞는 인재가 없긴 했지. 처음엔 의심도 했지만, 지금은 나도 그댈 인정하네.]
[그때 당시엔 누굴 추천해도 싸웠을 테니까요. 괜히 마지막에 랜덤으로 정해진 게 아니죠.]
정령들이 진실을 듣고 실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반대의 흐름이었다.
[뭐, 어찌됐든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돼. 대화 들으면서 대충 예상이 되니까.]
[예. 굳이 따지자면 묻고 싶게 많지만, 참을게요. 모든 일이 끝나고 제대로 말해 주셔도 돼요.]
‘너희들…….’
이건 좀 감동이었다.
녀석들의 말에선 진한 ‘신뢰’가 느껴졌다.
[그대가 여태 쌓은 신뢰일세. 우린 그만큼 그대를 믿고 있다는 뜻일세.]
[솔직히 결과로 보여 주고 있잖아.]
[설마하니, 지식의 해방과 싸우지 않는 선택지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평소엔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던 진도, 지금은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저도요. 미안해요.
[됐어. 현자가 음흉한 건 애초에 알았고, 진이야 현자의 계획에 휩쓸린 거니까.]
[이 이야기는 뒤로 미뤄요. 그보다, 어쩔 생각이에요?]
[나도 그게 더 듣고 싶다네. 대체 그 천재 흉내는 무엇이었나.]
정말이지.
진은 이 대륙이 싫지 않았다.
지식의 해방 모두가 억지로 끌고 온 것을 저주하지만, 진은 정반대였다.
고마웠다.
이들을 만나게 해 준 것을.
‘내가 말한 건 전부 실현될 거야.’
[어. 음. 잠깐만 믿어 주는 건 고마운데 아무리 현자랑 내가 있다고 해도 차원 이동은 못해.]
‘내 방식대로 차원 이동하는 거야. 그러니까…….’
진실을 밝히는 자리는, 앞으로 움직일 방향을 설명하는 자리로 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