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방문
진의 예상대로 지식의 해방 쪽은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다들 로갓텔 보셨습니까?”
한 사내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이게 뭔지 아실 겁니다. 아메리칸 갓 텔런트. 그걸 그대로 가져다 썼더군요. 이게 우연이라고 보십니까?”
그럴 리 없다.
성자가 만들어 ‘갓’이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건 너무 공교로웠다.
“심지어, 내부 오디션 진행 방식이나 편집 방식은 명백히 지구의 것입니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벽화 중 그려져 있던, 천지창조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그건 지구의 양식이었습니다.”
성자가 방송을 통해 보여 준 것들은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켰다.
[성자는 지구의 지식을 사용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성자에 관한 조사 자료는 진작 받아 보셨을 겁니다. 그는 대륙 출생입니다.”
“저 자료를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몇 번에 걸쳐 충분히 확인을 거쳤습니다.”
진 세인트 대공.
그는 대륙 출생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가 성자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인데…….”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진즉 드러났을 겁니다.”
“우리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것도 상정해야 합니다.”
“이러면 계획을 수정해야 합니다.”
지식의 해방에서 성자를 대응하기 위해 만든 계획은 간단했다.
“우리가 세운 계획은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싸움을 피해 손해를 최소화하고, 현재까지 진행된 계획을 보전하는 것이었지요.”
진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일견 멍청해 보이는 계획이지만 가장 확실한 계획이다.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
자신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으니, 그저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한데, 그의 뒤에 우리와 같은 지구인이 있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앞으로 제2의, 제3의 성자가 계속 나타날 겁니다.”
회의장이 침묵에 잠겼다.
이건 단순히 기다린다고 지나갈 게 아님을 모두가 깨달았다.
“그럼, 적극적으로 공세로 전환하자는 겁니까? 수많은 손실이 있을 겁니다.”
“손실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자 뒤에 있는 자를 배제할 수 있다면, 손실은 감수할 만합니다.”
그를 배제해야 한다는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여기까진 모두가 동의했지만, 자연스레 새로운 문제가 대두된다.
“그 뒤에 있는 지구인은 누굴까요?”
대체 그는 누구인가.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때 가장 상석에 앉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 중에 배신자는 없습니다.”
확언에 가까운 말.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당연히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전부 확인했으니까요.”
“화, 확인이라니…….”
“왜요? 불가능할 거 같은가요?”
서늘한 그녀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라면 가능했다.
처음으로 이 대륙의 소환된 최초의 지구인인 그녀라면.
“아무튼 우리 중에 배신자가 없는 건 확인했어요. 배신의 가능성은 배제해도 괜찮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 뒤, 한 남자에게 손짓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예를 취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 정보를 미리 받아 다각도로 분석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건 심각한 문제임을 깨달았습니다.”
“배신자가 아니란 게 더 문제란 소린가?”
“그렇습니다.”
적어도 내부의 적은 없다는 소린데, 어째서 이게 더 큰 문제가 되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이다.
“성자를 돕는 지구인은 어떻게 이 대륙에 오게 됐을까요?”
“그거야…… 어?”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했다.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지구인을 이 대륙으로 끌고 오는 건 그자만 할 수 있는 일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시죠. 우리 쪽 지구인의 수급은 끊기고, 새로운 지구인은 성자를 돕고 있습니다.”
“서, 설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이유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이미 버리는 패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이제 우리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퀘스트는 여전히 유지가 되고 있잖습니까.”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착각이라고 하기엔 상황이 너무 딱 맞아떨어집니다.”
“…….”
사방이 고요해졌다.
불편한 침묵이 주위에 가득했다.
여태 설명하고 있던 이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말했다.
“그리 당황하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최악의 상황일 경우를 말씀 드린 겁니다.”
“그럼, 최악의 상황이 아닐 경우엔요?”
“이쪽은 오히려 긍정적입니다. 우리를 이쪽으로 끌고 온 자는 누군가를 경계했습니다. 그가 경계하던 자를 이쪽 세계의 ‘관리자’라고 가정해 보죠.”
“관리자라.”
“그 관리자가 지구에서 몰래 들어오는 사람을 발견했다면?”
“그래서 추가적인 유입이 끊겼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관리자가 그를 회유 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겠군요. 이쪽도 지금 상황에 대입해 보면 대부분이 설명됩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이쪽 관리자는 뭘 대가로 제시했을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보상 아니겠습니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정말 골 때리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굳이 세상을 멸망시킬 필요가 없겠군.”
“예.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지금껏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모두 보상 때문이었습니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정적이 회의실을 채웠다.
그때, 상석에 있는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예. 맞습니다. 우리 생각대로 지구로 돌려보내 주는 게 보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예. 어쩌면 모든 상황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에서 수호하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가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이건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대들 중에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도 있음을 압니다.”
비귀환파.
굳이 지구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들. 그들에겐 세상의 멸망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적극적으로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권력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건 그대들에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이곳에서 얻은 부와 명예를 평생토록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비귀환파에겐 이건 희소식이었다.
“그러니, 이번 확인은 비귀환파에서 진행하는 게 어떨까요?”
상석에 앉은 여인은 그저 담담히 말했을 뿐이지만, 비귀환파는 알고 있었다.
저건 경고였다.
여태껏 너희 비귀환파를 배려해주었으니, 밥값 하라는 경고.
“예. 저희 쪽에서 성자와 접촉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가 쌓이는 대로 회의를 다시 한번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지식의 해방 ‘수뇌부 회의’가 끝났다.
* * *
며칠 뒤.
진에게 손님이 방문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이 요청은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그마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둘 중 하나였다.
정말 특수한 경우거나.
돈이 되는 경우거나.
“어느 쪽 손님이야?”
“둘 다 해당하는 손님입니다.”
“둘 다?”
“예.”
“자세히 설명해 봐.”
마그마는 곧장 손님에 관해 설명했다.
“처음엔 성자님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는 일반적인 손님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한데, 계속 만남을 거부하자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무슨 행동?”
“돈을 줬습니다.”
“……뭐?”
성자인 진에게 뇌물을 쓸 생각을 한다?
이건 미친놈이나 다름없었다.
“얼마길래 뇌물을 받아?”
마그마가 욕심이 많긴 하지만,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받았다는 건, 그 금액이 상상을 초월하는 게 분명했다.
“그게…… 영지 한 달 수입에 육박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진의 영지 한 달 수입이면, 웬만한 영지 반년 수입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만남을 주선해 달라는 요청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성자님께 말만 전해 드리면 된다고 했습니다. 만남을 거부하셔도 골드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진이 말해 보라는 듯 마그마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아메리칸 갓 텔런트.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오직 지구인만 아는 단어.
만남을 요청하는 건, 지식의 해방이었다.
설마하니 지식의 해방 측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찾아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함정일까?’
아니. 함정이어도 상관없었다. 그 정도 준비는 이제 진도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만남은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만나자 그래.”
“예. 알겠습니다. 보스.”
그렇게 마그마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와우.’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부자였다.
그것도 굉장한 부자.
그의 겉모습만 봐도 얼마나 돈이 많은지 보였다.
보석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음에도 천박해 보이지 않았고, 금으로 도금한 듯한 옷을 입었음에도 기품이 흘러넘쳤다.
“제국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골드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황금상단의 주인이셨군요.”
제국 제1의 상단이라 불리는 ‘황금 상단’.
1년에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웬만한 왕국보다 더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유명했기도 했고, 교단에게도 중요한 상단이었으니까.
“예. 교단에 얼마나 많은 기부를 해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저 세상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 황금 상단의 주인이 지식의 해방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지식의 해방이 이 대륙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저와 만남을 요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어떤 일 때문에 만남을 청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만남을 허락하신 성자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었다.
진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긴 침묵이 흐르고.
“대회의 이름을 지어 주신 분과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만나고 싶다?’
직접 만나러 와 놓고,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놈들, 설마.’
진의 뒤에 누가 있다고 생각한 게 확실했다.
하긴 그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왕국의 지부장만 봐도 지구인들은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이 대륙으로 넘어왔다.
오히려 진이 특이 케이스였다.
‘그러면…….’
이 상황은 이용할 수 있다.
“무슨 이야기 하시는 겁니까? 대회의 이름은 제가 지었습니다.”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
진은 눈을 사용하며 말했다.
그의 본모습이 보였다.
“딱 보아하니 머리는 염색하신 거 같고, 피부색도 좀 고치신 거 같네요.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손대셨어요. 동양인이시네요?”
“……무, 무슨.”
그가 당황하던 것도 잠시.
“원래 얼굴은 약간 동아시아 느낌이신 거 같은데. 어이구, 아예 복원이 안 되게 작업해 놓으셨네요? 돌아갈 생각 없으시구나?”
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
“저번에 지부장님도 그러더니 다들 돌아갈 생각이 없으신 거 같네요. 그러고 보니…… 지부장님도 한국분이시던데. 한국분이세요?”
움찔 떠는 그 모습을 보니, 확실했다. 저자도 자신과 똑같은 한국 출신이었다.
“맞네. 맞아. 한국 쪽 사람들만 넘어온 거예요? 헬조선 헬조선 하더니 진짜 지옥인가, 사람을 막 납치하네.”
“……넌 뭐지?”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진에게 물었다.
“저요? 여러분보다 좀 더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죠.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은데…… 식사는 하셨어요?”
진은 그렇게 말하며,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모든 판을 뒤엎는 천재 소년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