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바알
악마들의 방송국 입사가 끝날 때쯤, 아길레스가 찾아왔다.
<데려왔어요.>
그녀가 바알을 데리고 왔다.
<그대가 성자인가.>
아길레스마저 두려워하던 지옥의 왕.
그의 외모는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일고여덟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꼴로 그대를 만나게 돼서 유감이군.>
그렇게 말을 하며 바알은 아길레스를 빤히 바라봤다. 아길레스는 바알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한 걸 다행으로 아세요. 생각 같아선 그대의 존재를 지워 버리고 싶었으니까요.>
<알고 있다.>
바알은 담담하게 아길레스의 말을 인정했다.
둘의 대화를 들어 보면, 바알이 저런 모습이 된 건 아길레스가 ‘무언가’를 한 덕분인 거 같았다.
<다만, 그대가 두려움을 떨쳐 낸 건 좀 신기하군.>
<난 당신을 두려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아길레스가 그렇게 말하자 바알의 분위기가 일순 변화했다.
고작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 모습에서 압도적인 절망이 아른거렸다.
<작은 아길레스야.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공간 자체가 바알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 같은 느낌.
아길레스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애써 참아 냈다.
‘꿈에서 만나길 다행이지.’
진이 가볍게 손짓하자, 공간을 휘감고 있던 바알의 힘이 사라졌다.
이 공간의 주인은 진이다.
“그만하시죠.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자고 이곳에 모인 게 아니니까요.”
바알은 조금 놀랐다는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과연…… 그렇군.>
그는 뭔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의 두려움을 떨쳐 준 게 자네였군. 악마를 경외하고 빠지게 만드는 성자라…… 재밌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아길레스의 그 멍청한 계획을 막은 것도 자네겠군.>
<……알고 있었나요?>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대를 천천히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게 난데 내가 몰랐을 리 있겠나?>
<…….>
아길레스가 바알이 무섭다고 한 이유를 알 거 같았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그저 지켜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단 뜻이었다.
‘왜?’
그 이유가 무엇일까.
‘로메른. 바알이 서열 1위를 유지한 게 얼마나 되는지 알아?’
[잘 모르겠는데. 우리 쪽 역사에 기록된 걸 보면…… 원래부터 1위였고 마지막까지 1위였어.]
‘부동의 서열 1위라.’
뭔가 감이 잡힐 거 같았다.
진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2위로의 추락은 어떠셨습니까? 즐거우셨습니까?”
그를 도발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 질문에 대답에 따라 그가 추구하는 게 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재밌더군. 고작 한 계단 내려왔을 뿐인데, 지금껏 쌓았던 모든 게 사라졌지.>
“상대가 여기 있는 아길레스 님이니까요.”
<그렇지. 한참 부족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대가 잘 채워 준 거 같더군. 날 위협할 만한 악마가 됐어.>
바알이 추구하는 게 뭔지 보였다.
‘이런 재수 없는 캐릭터가 진짜 있네.’
적수가 없다는 데서 오는 ‘권태’.
그는 그 권태를 잊기 위해 아길레스를 내버려 둔 것이다.
게다가 아까 로메른이 한 말을 떠올려 보면, 놀라운 결론이 나온다.
마지막까지 1위.
회귀 전 미래에선 아길레스는 결국 바알에게 패배한 것이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착각?>
“아길레스 님은 부족하신 게 아닙니다. 바알 님께서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 부분이 바로 역전의 열쇠였습니다.”
아길레스는 바알처럼 천재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노력파에 가까웠다.
섭리를 뛰어넘는 재능이 없으니, 더욱 철저해졌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모든 수를 동원한다.
실수하지 않으며, 철저하기까지 한 사람이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주위의 도움마저 받는다.
그녀가 2위인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녀가 ‘진’의 조언을 듣고 움직인 결과,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아길레스 님이 아닌, 바알 님을 먼저 만났다면, 전 지옥과 상생한 다는 걸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위험하다.
과거 지옥의 기조였다면, 바알을 배제하는 게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그대는 내가 보기엔 꽤 위험해 보이는군.>
바알의 말에 아길레스가 깜짝 놀랐다.
다른 악마도 아닌, 바알이 다른 이를 위험하다고 표현한 건 처음이었다.
“만약 저와 바알 님이 싸웠다면 승부가 어떻게 났을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지금 같은 결과는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그렇군.>
“전 아길레스 님과 함께 세운 새 시대가 꽤 마음에 듭니다.”
<새로운 시대라. 제법 재미있겠어. 다만,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그대가 날 너무 일찍 꺼냈다. 아직도 2위라니.>
“에이. 밑바닥 녀석들 제치며 올라오는 게 뭐가 재밌습니까. 챔피언을 잡는 것만 못한데요.”
<그리 오래 즐길 수 없을 텐데.>
진은 아길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길레스 님. 1위에서 내려올 생각 있으십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하시는데요?”
<내려가고 싶어도 그건 불가능해요. 애초에 지금 1위와 2위의 차이는 예전 제가 2위일 때의 차이보다 극심하니까요.>
바알의 카리스마엔 못 미치지만, 아길레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찌 됐든 이젠 그녀가 지옥의 서열 1위였다.
<게다가, 전 질 거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군요. 애초에 즐길 여유조차 없을 겁니다.>
싸늘한 그녀의 눈빛을 바알은 기특하다는 듯 바라봤다.
아길레스는 그 눈빛이 거슬리는 듯 울컥하려고 한 순간.
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상이 좀 변한 덕분에, 옛날 같지 않으실 겁니다.”
<재밌군. 재밌어.>
“새로운 판. 그것도 도전자의 위치에서 한번 날뛰어 보시겠습니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도전자의 위치에 서 보는 게.>
“일단, 어떤 세상이 찾아왔는지 한번 보시죠.”
진은 등 뒤로 화면을 띄운 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만. 이해했다.>
대략적인 설명만 했을 뿐인데, 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방법으로 상생을 고안하다니 제법 재밌군. 기조가 바뀌는 것도 이해가 돼.>
“아직 설명이 한참 남았는데, 자세한 설명은 더 필요 없으십니까?”
<충분하다. 핵심은 이미 서론에서 모두 나왔으니.>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음에도, 그는 단번에 그 핵심을 파악한 것이다.
‘역시 재수 없다니까.’
오만할 자격이 있을 정도의 천재.
이 정도 되니 ‘권태’란 감정을 느낀 것이다.
“예.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예. 제가 이미지를 하나 잡아왔습니다. 싫어하실까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좋아하시겠군요.”
<호오. 기대가 되는군.>
진은 등 뒤에 있는 화면을 바꿨다.
그곳에는 숫자 ‘2’가 쓰여 있었다.
“제가 생각해 온 이미지는 ‘2등’의 악마입니다.”
2위로 추락한 자에게 이런 이미지를 권하는 건, 무례를 넘어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2등의 악마라…….>
권태로운 삶을 보내는 그에겐 재미난 요소일 뿐이었다.
“2등의 악마가 되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애초에 이제 2등이시잖습니까.”
진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바알이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이러니 아길레스가 날 풀어 준 거군.>
그는 불쾌해하기보다는 재밌다는 듯 진을 바라봤다.
<아길레스에게 감사해야겠어. 그대와는 적이어도 재밌겠지만, 아무래도 함께하는 게 더 재밌어 보이는군.>
아길레스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바알이 누군가와 이렇게 즐겁게 대화는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좋다. 나도 합류하지.>
“뭐, 몇 가지 주의 사항은 드려야 하지만…… 알고 계시죠?”
바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이 판을 부수는 것일 터,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귀찮아지는 게 싫을 뿐이죠.”
그 말을 들은 바알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적으로 만났어도 재밌었겠군.>
“칭찬 감사합니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뒤에 떠 있는 화면을 바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지옥을 위한 다음 계획도 슬쩍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계획?>
이번엔 바알마저 놀란 거 같았다.
지옥의 기조가 변한지 고작해야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음 계획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예. 뭐, 아직은 계획 중이고, 그저 비전을 보여 드리는 것뿐입니다.”
<궁금하군.>
뒤 화면에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프로젝트 가상 현실.
<가상 현실?>
진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살아가며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알은 그 시간이 뭔지 눈치챈 것 같았지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뒤의 화면이 변했다.
-꿈.
“수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런 수면 시간 동안 또 다른 현실에 접속한다면 어떨까요?”
<……새로운 세상.>
과연, 천재였다.
그는 핵심을 파악하고, 곧장 결론에 도달했다.
“예. 꿈속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그대는 신이 될 생각인가?>
“아니요. 그거 신성 모독입니다. 오히려, 연극 무대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악마분들과 전 ‘연출자’가 되는 거죠.”
<…….>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진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표정을 찡그리기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지만.
<기대하겠다.>
그는 결국 진이 보여 준 ‘비전’에 긍정적인 답변을 던졌다.
“그 외에도 더 생각나면 계속 추가할 생각입니다. 제가 죽을 때까진 지겨울 시간이 없으실 겁니다.”
<……먼 훗날.>
“예?”
<그대가 죽음을 맞이하면, 내가 그대를 악마로 만들어 주마.>
놀랍기보다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게 가능한 거야?’
[……이건 나도 모르겠는데?]
진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아길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 내 격과 존재를 나누면 되는 일이니까.>
<…….>
아길레스는 정말 놀랐는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미친. 그렇게 악마를 만들 수 있다고? 아니. 그게 가능한가? 바알이라 되는 건가?]
그건, 로메른도 마찬가지 인거 같았다.
“감사한 이야기입니다만,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시죠. 제 평생이라고 해 봐야, 바알 님껜 얼마 안 되는 시간일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기다리겠다.>
이쪽은 대화가 마무리가 되려고 하고 있었는데, 아길레스가 정신을 차리고 바알을 쏘아붙였다.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이죠?>
<그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괜찮다는 거죠? 성자님께 섣불리 손댈 생각하지 말아요.>
<그런 게 아니다. 지옥의 공석에 앉혀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옥의 공석?
<……진심으로 하는 소리에요? 당신조차도 부족하다며 공석으로 비워 둔 자리잖아요.>
돌아가는 분위기가 좀 묘했다.
뭔가, 저 공석이 굉장한 자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내게 없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너와 내가 성자를 돕는다면 가능할 것이다.>
<……확실히 가능은 하겠지만.>
언제 싸웠냐는 듯 둘의 시선이 모였다.
대충 저게 뭔 자린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대를 지옥의 왕의 자리에 올리고 싶다. 인간의 죽음은 금세 찾아오니 대답은 천천히 해도 된다.>
“…….”
그러니까, 지금 성자한테 지옥의 왕이 되라고 스카웃한 거지?
아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이야. 우리 진 출세했는데?]
[허허. 난 진작에 그대가 악마 같은 녀석이란 걸 알고 있었다네. 악마 왕이라니. 썩 어울리는구먼.]
정령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렇게 지옥 쪽 문제는 모든 게 해결됐다.
‘이제 시작이야.’
이번 대회는 단순히 악마를 끌어들이고 로스칼 왕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슬슬 의문을 떠올릴 테지.’
지구식 오디션이 대륙에서 펼쳐졌다.
지식의 해방은 어떻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