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예선전
이후, 진과 아길레스는 오랜 시간 동안 대륙의 미래를 논했다.
진은 먼저 아길레스만이 가능한 일을 부탁했다.
“악마들을 통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통제라…… 어떤 걸 제시하시냐에 따라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2위부터 15위까지의 순위 결정권을 드리겠습니다.”
<오호. 더 높은 순위일수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겠군요.>
“그렇습니다. 높은 순위가 많이 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높은 순위일수록 많이 벌 겁니다.”
<통제가 될 거 같군요. 아니. 돌발 행동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통제하겠습니다.>
‘뭐, 순위 조작이 조금 가슴 아프긴 하지만…….’
애초에, 대국민 투표로 뽑을 것도 아니었다.
대회 내에서 심사해서 순위를 정하는 건, 보통 이미 내정자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교단이 순위 조작을 할 거라곤 생각이나 하겠어? 아니지. 애초에 순위 조작도 아니야.’
고위 악마일수록 내려준 재능이 강할 테니, 사실상 실력 순으로 순위가 결정될 것이다.
거기에 아길레스의 입김이 약간 들어갈 뿐이다.
<한데, 1위는 내정자가 이미 있는 겁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이건 악마분들께 드리는 일종의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여기서 선물이 나올 줄은 몰랐겠지.
“로스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생각입니다. 다양성을 더해서, 죽어 가는 로스칼을 살릴 생각입니다.”
<오호.>
“파괴보다는 공생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일종의 환경을 만들어 드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아닙니다. 아길레스 님께서 절 도와주신다고 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자님과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까지 말해 주는데, 서비스 정도는 해 줘야 했다.
“하하. 앞으로 서열 1위가 되실 분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든든합니다.”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질 타이밍이었는데, 그녀는 진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소름이 끼치는군요.>
어? 갑자기?
우리 방금까지 훈훈했잖아!
다 와서 왜 그래.
내가 잘할게! 여기서 파토야!?
그런 진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조금 다른 말을 했다.
<성자님께선 ‘단 한 번의 수’로 지옥 전체를 회유하셨습니다.>
놀랍게도…….
[허허. 마계의 최고 서열이 될 자가 긴장을 하고 있군.]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진에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숨긴 상태였지만, 검성의 눈을 속이진 못했다.
‘어? 뭔 긴장?’
[아길레스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마치 무대 위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기분일 걸세.]
‘뭔 꼭두각시? 상부상조하자는 건데.’
[그럼, 서열 1위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네.]
‘아니. 아부를 해 줘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아부겠구먼.]
검성을 껄껄 웃음을 흘렸지만, 진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어째서 신께서 진 님을 성자로 임명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지옥은 성자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뭐, 나쁜 상황은 아닌 거 같았다.
오히려 이 오해는 그녀의 노선을 확실히 정해준 계기가 된 거 같았다.
“믿겠습니다.”
<저도 성자님께서 보여 주신 비전을 믿겠습니다.>
그렇게 둘은 악수를 끝으로, 대화를 끝마쳤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보자고.’
대회 준비는 모두 끝났다.
쇼미X머니의 예선과 미션.
갓 탤런트의 본선.
K-슈퍼스타의 TOP15.
이 모든 과정들이 자극적인 악마의 편집을 거쳐 방영될 것이다.
그렇게 사념을 악착같이 모은 뒤, 마지막으로 결선은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이건 성공할 수밖에 없지.’
무조건이다.
이미 지구에서 검증됐다.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노래하는 친구들 모아서 빛의 콜센터 같은 거라도 해 봐?’
대회가 끝난 이후에도 사람들의 사념을 달달하게 빨아 먹을 수도 있게 된다.
이 모든 걸 진이 다할까?
‘전혀 아니지.’
나중엔 악마들이 직접 움직일 것이다. 그들이 PD가 되고, 작가가 되는 것이다.
‘난 국장이지.’
모든 걸 총괄하는 총괄국장.
이렇게 계획을 세우니, 좀 웃긴 일이 벌어진다.
‘얘들이 편집하면, 진짜 악마의 편집인가?’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할 정도로 모든 상황이 잘 풀리고 있었다.
맨날 귀찮게 하던 지식의 해방마저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지옥의 서열 2위의 작업터에서 미쳤다고 날뛸려고? 아니. 날뛰어 줬으면 좋겠네.’
날뛰는 순간, 지식의 해방은 악마와 적대 관계에 돌아가는 것이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용수바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첫방 시작.
드디어 시작이었다.
* * *
화면 속에선 놀라운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거대한 신전. 고고한 거대한 신전이 신성한 빛을 뿜으며 반짝였다.
그 신전의 모습을 높은 하늘에서 보여 주다가, 이내 점점 가까워지더니 빠른 속도로 내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내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대륙의 형식과는 다른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가 하나씩 클로즈업된다.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같은 지구의 명화들이 대륙을 강타한다.
그리곤, 빠르게 신전 천장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그곳엔 색색의 유리가 들어차 있었다. 처음엔 그저 예뻐 보이는 유리일 뿐이었지만, 그곳으로 환한 빛이 쏟아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색색의 빛이 신전 중앙으로 쏟아졌다.
대륙민들이 보기엔 마치, 천상의 신전을 보여 주는 것만 같은 광경.
그곳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빛의 교단 성자, 진 세인트입니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진.
그의 목소리가 전 대륙에 울려 퍼졌다.
“신께서 가라사대. 종교란 모든 이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작은 아기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분의 뜻을 따라, 여러분들을 위해 작은 안식을 준비했습니다.”
곧이어 화면이 전환됐다.
이번엔 로스칼 왕국의 수도가 보였다.
거리의 악사들의 모습과 함께 그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짤막하게 지나갔다.
그 다음은 추수를 하는 농부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들은 추수를 하며 노동요를 불렀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많은 이들의 모습이 짧게 짧게 비쳤다.
“노래는 우리에게 힘을 주기도 하, 안식을 주기도 합니다. 천사님들의 이 아름다운 노래처럼, 여러분들의 안식이 될 수 있는 노래를 뽑는 대회를 개최합니다.”
다시 한번, 화면이 전환됐다.
진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예선전부터 본선까지 모든 것을 이 화면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교단의 이 행사가 여러분께 작은 안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화면이 점점 꺼지더니, 이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저녁 6시, 방송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첫 방송이 끝났다.
그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그러니까, 교단에서 노래 대회를 연다는 거지?”
“그런거 같구먼. 이거 매일 저녁이 기대되는데?”
처음엔 그저 상황을 파악했지만.
“성자님이라더니 괜한 말이 아니었어. 그 성스러운 모습이라니.”
“자네 말대로 굉장하더군. 봉사 오시는 사제님들이 그리 자랑하시는 것도 이해가 되더군.”
성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데, 그 신전은 어디인 거야? 왕국에 있는 교황청인가?”
“그건 아닐 걸세. 크기를 생각해보게.”
“허. 마치 홀린 기분이야. 그야말로 빛의 신전 같았다니까?”
화면 속 봤던 거대한 신전의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저게 그 성자군.”
그를 경계하는 자들도 있었고.
“흐음. 교단과 협력한 왕국을 생각하면…… 그들과 함께하는 것도 괜찮겠어.”
오히려 반기는 자들도 있었다.
이렇듯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대회가 대륙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 * *
일일 방송.
지구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선 상관없다.
편집은 정령들이 하고, 촬영은 미니 드래곤이 하지 않는가.
생각해 보면, 판타지 세상이야말로 방송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덕분에, 바빠진 건 진이었다.
어물쩍거릴 시간이 없었다.
일일 방송을 위해 곧장 예선전을 시작했다.
로스칼 왕국 중앙 광장.
수많은 사람들이 간격을 벌리고 서 있었다. 이들이 예선전에 참가한 이들이었다.
‘쇼미X머니 예선전이 제일 재밌었지.’
뭔가 현장감 넘치기도 하고, 화면으로 보여주기엔 이게 최고였다.
심사위원은 용수바람, 진, 폴카, 평론가로 유명한 흡혈귀 이렇게 총 4명이었다.
“예선전을 시작합니다!”
“우와아아아아!”
그 말과 함께, 외곽에 구경 나온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심사위원 넷은 빠르게 흩어져, 심사를 시작했다. 진은 한 참가자 앞에서 곧장 입을 열었다.
“시작하세요.”
“예!”
힘찬 대답과 함께, 그는 바이올린과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 미쳤는데?’
시작부터 왜 로스칼이 예술가의 나라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연주를 듣고 있는데, 마치 서커스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하고 긴장되고 전율이 인다.
기교와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악마가 내린 재능.
이 녀석은 ‘악마’와 계약한 게 확실했다.
“그만.”
진은 곧장 연주를 멈추고, 목걸이 하나를 걸어 주었다.
“합격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자신이 합격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진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심사를 이어 갔다. 솔직히 말하면 연주도 들어 볼 게 없었다.
‘……악마와 계약하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떨어지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교와 실력이 달랐다.
그 격차는 노력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계약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탈락한 건 아니었다.
여유로운 계약자들과는 달리, 잔뜩 긴장한 채 몰입하고 있는 한 참가자.
♬-♬-♪-
기교도 부족하고 실력도 부족하지만, 묘한 울림이 있다.
전율은 일지 않지만,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났다.
이런 진의 감상과는 달리, 로스칼 왕국의 사람들은 실망한 눈치다.
음악을 많이 들어 봤기에, 참가자의 실력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렇다고 저들의 귀가 맞을까?
‘아닐걸.’
진이 찾고 있는 이들은 이런 이들이다.
악마와 계약하지 않아 실력은 부족하지만,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합격입니다.”
일대 파란이 불었다.
분명히 떨어져야 하는 사람인데, 합격했으니까.
진은 입을 열었다.
“실력은 다른 분들에 비해 부족합니다. 하지만 가슴을 간질이는 음악이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게다가, 진만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흡혈귀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도 진과 비슷한 결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더 재미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악마와 계약한 한 참가자는 미친 듯한 기교가 들어간 곡을 연주했는데, 기교가 너무 과한 게 독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음악인지 소음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곡이었다.
“대단한 건 알겠는데, 이건 너무 과합니다. 난해하다 못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 이건 최신 연주법인…….”
“최신 연주법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가자는 누구를 위해 연주하고 있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
“음악은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지식이 없으면, 감동하지 못하는 음악이 정녕 음악입니까?”
“…….”
지구의 미술이 그렇다.
수없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일반인이 보면 대체 이게 뭔지 모를 것들이 명화라 떠받들어진다.
“무엇을 위한 연주입니까? 기교와 자기만족을 위한 음악을 하고 계신 게 아닙니까?”
진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거였다.
‘악마와 계약한 사람이 잘한다는 건 편견이라니까.’
여긴 그 편견이 통할 만큼 고일대로 고여 있었다.
“한 번 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다시 해 보세요.”
물론, 합격은 시켜야 했다.
악마님들 화나지 않도록.
예선전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