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갑과을
흡혈귀의 도움까지 받으며 공들였던 작업이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왜 이런 귀찮은 과정이 필요했을까?
그건, 모두 이 로스칼 왕국에서 터지는 문제 때문이었다.
‘미친. 이렇게 위험한 파산이 어디 있어?’
일반적으로 파산이 곧 세상의 멸망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건 규모가 왕국급이 된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왕국이야 사라지겠지만, 그 이상의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여간 멍청한 악마 놈들.’
한데, 여기선 그런 일이 벌어진다.
개인의 파산이 연쇄 도산으로 이어지고, 이곳은 지옥으로 변한다.
세계 멸망을 담당하는 거대한 축. 그게 바로 로스칼 왕국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정말이지 간단하다.
[어쩔 수 없잖아. 악마들도 원금은 회수해야 하니까.]
‘아니. 재능을 적당히 뿌려야지. 이러면 전체적인 가치가 떡락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뭐, 악마들이 거기까지 신경 썼겠어?]
이 로스칼 왕국에 너무 많은 재능을 뿌린 게 문제였다.
뛰어난 예술가들이 너무 많아지니 경쟁이 과열되고 가치가 폭락했다. 덕분에, 악마들은 투자금도 못 챙기게 생기게 된 것이다.
‘뭐, 아직은 괜찮은 거지?’
[괜찮긴 한데, 시간이 지나면 터질 거야. 아마 강제로 집행하겠지.]
그 강제 집행이 온화하고 평화로운 방법이 아닐 거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빚은 예술가 개인들이 졌지만, 그걸 회수할 땐 대륙 전체가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할 게 많다고 한 거야. 애초에 예술로 공략할 게 아니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고.]
물론,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네트워크 마케팅으로 준비는 끝냈다.
[뭐, 지금은 괜찮을 거 같은데? 애초에 이런 방법으로 악마들을 처리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로메른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안전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여전히 한 가지 걱정은 남았다.
‘로메른.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난 악마들이 굉장히 냉철한 사업가라고 생각하거든.’
[음. 좀 다르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런 악마들이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경쟁이 과열돼도 너무 과열됐잖아.’
[음. 틀린 이야기는 아니야. 이 정도면 거의 광기에 가까운 투자니까.]
이게 비트코인도 아니고, 악마들이 투자금을 때려 박곤 ‘떡상’을 외칠 만한 게 아니었다.
이건 경쟁이 과열되면 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다.
‘그 악마들이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할까?’
[악마라고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야. 감정에 휘둘리고 오판을 저지르기도 해.]
‘피같은 돈이 걸렸는데?’
[……흐음. 그건 또 이상하긴 하네.]
그러니,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일부러 파산을 유도하고 있다면?’
[일부러? 그래서 악마들이 얻는 이득이……. 자, 잠깐만!]
이득이 없을 리 없다.
강제 집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잃었던 돈 모두를 회수할 수 있게 된다.
[……가능성 있어. 오히려 강제 집행을 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게 더 현실적이야.]
‘그치?’
그러니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이런 일을 내버려 두면,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법이니까.
‘뒤통수 맞는 건 사절이야.’
쳤으면 쳤지, 맞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담당자 오라 그래!’
[기다려 봐. 미모 후작한테 연락해 볼 테니까.]
* * *
이후, 부탁을 받은 미모 후작은 지옥을 이 잡듯이 뒤져 진이 원하던 악마를 찾아냈다.
“고생했어.”
<아니에요. 저도 투자를 했으니까요.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 될 거 같은데요? 이 일에 끼워 주셨으니까요.>
그녀 또한 로스칼 왕국의 예술가와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괜찮은 거예요? 제가 준 재능은 사실상 재능이라고 할 순 없는데…….>
“괜찮아. 그게 핵심이니까.”
<그래요? 저야 투자금이 적게 들어갔으니 좋긴 한데. 괜찮나 모르겠네요.>
“이번 일이 끝나면 깜짝 놀랄 걸?”
진의 자신만만한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든든하네요.>
“아. 그건 내 말대로 했어? 천사 모습으로 재능 준 거 맞지?”
<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신성한 분위기에서 재능을 내려주고 계약했어요.>
역시 미모 후작이었다.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서 그런지 척 하면 척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누구야 대체?”
<들으시면 깜짝 놀랄 거예요. 아길레스가 주동자였어요.>
미모 후작의 말에 놀란 건 로메른이었다.
[하. 거물이네. 서열 2위 악마야.]
진은 로메른의 탄식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물이 개입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 거물일 줄은 몰랐네.”
<그죠? 조용했던 게 아니라, 은밀하게 이쪽 일을 추진하고 있던 거였어요.>
진은 이 상황이 뭔가 걸렸다.
“수익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차라리 10위권 악마였다면, 막대한 수익을 위해 이렇게 일을 추진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데, 2위라는 좀 과하다.
<제 생각도 같아요. 아마 순위 역전을 노리는 게 아닐까 싶어요.>
역시나, 진의 예상대로였다.
이런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정도 목적은 있어야 했다.
“만남 좀 주선해 줄 수 있어?”
<괜찮겠어요? 계획의 변동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괜찮아. 그쪽에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니까.”
<흠. 알겠어요. 불러올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인과 함께 나타났다.
화려한 미모 후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여인이었다.
뿔테 안경과 진한 다크서클, 거기에 흐트러진 정장까지.
피곤에 찌든 회사원 느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길레스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다만, 15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대화가 시작되자, 미모 후작은 조용히 물러갔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로스칼 왕국에 준비해 놓으신 계획 잘 봤습니다.”
<무슨 계획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저 모습만 보면 전혀 연관이 없는 것만 같았다.
“예.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제가 이 로스칼 왕국에서 무엇을 할지 들어 주면 됩니다.”
<흐음. 이런 시간 낭비는 하지 않는다는 주의지만, 성자님이시니 이번 한 번만 듣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척하면 척이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듣겠다고 돌려서 승낙한 것이다.
“로스칼 왕국의 계획은 제법 나쁘지 않습니다. 시간만 들이면 대륙 전체에서 수익을 뽑아 낼 수 있으니까요.”
<…….>
“다만, 아쉬운 것도 있습니다. 결국 수익을 뽑아 주는 근본 자원이 희생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건 장기적으로 보면 큰 문제입니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게다가, 강제 집행이기 때문에 손실률도 높고요. 이러한 단기적 관점이나, 아까 말씀드렸던 장기적 관점 모두 손해입니다.”
<…….>
“가장 큰 문제는 변수까지 있다는 겁니다. 세상이 위험해지면 저를 위시한 교단이 개입할 겁니다.”
그녀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재밌다는 듯. 흥미롭다는 듯.
그녀는 진을 빤히 바라봤다.
“이건 지금까지 제가 봐 온 악마분들의 느낌이 아닙니다.”
사뭇 도발적인 진의 말에도, 그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악마를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대화가 통하는 합리적인 분들을 싫어할 리 없잖습니까. 게다가 전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흔히 생각하는 악마의 모습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꾸며 낸 모습일 뿐이라는 것을요.”
<……흐음. 성자님께선 좀 특별한 관점으로 저흴 바라보시는군요. 재밌네요.>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지금껏 경험한 악마분들은 모두 그러셨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예.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고 그게 합리적이라면 따라 주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표정은 피곤으로 찌들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전혀 달랐다.
형형하고 서늘하게 빛나는 눈빛.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전 ‘공생’을 하고 싶은 거지. 세상을 위해 악마분들이 양보하셔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진이 말을 이어갈수록 그 눈빛은 더 진해졌다.
“물론, 아길레스 님은 이 로스칼에 투자한 적이 없으시겠지만요.”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이건 단순히 입을 다문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선택권을 넘긴 것이다.
똑똑하다면, 반응이 올 것이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떤 대안을 제시할지 듣고 싶은데,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역시, 딱지치기로 서열 2위가 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진이 제시할 대안은 간단했다.
“강제 집행 없이 강제 집행만큼의 수익을 만들어 드릴 생각입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강제 집행으로 얻을 수익이면 로스칼 왕국을 통으로 팔아도 안 될 거 같은데요?>
그 말대로였다.
강제 집행엔 그만큼의 수익이 나오니, 은밀하게 추진한 것이다.
물론, 그건 그녀 생각이었다.
“됩니다.”
<……무슨.>
“시간이 없으시다니, 뜬구름 잡는 소릴 하는 것보단 직접 보여 드리는 게 낫겠군요.”
‘로메른.’
[알겠어!]
진의 뒤로 구슬이 하나 떠오르더니 빛을 뿜어냈고, 이내 어떤 풍경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도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진의 텐트를 하늘에서 찍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 보시는 건, 로스칼 중앙 광의 모습입니다.”
<……풍경의 모습을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는 마도구라니 꽤 신기한 물건이군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기록이 아닙니다.”
그 말과 함께 진은 신성력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화면에도 변화가 생겼다. 텐트에서 빠져나온 신성력이 화면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록이 아닙니다. 실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도구가 대륙의 모든 주요 도시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자, 잠깐만요.>
그녀는 진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눈치 챈 것 같았다.
“제가 준비하고 있는 대회를 모든 사람들이 볼 겁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녀는 너무 놀라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할 말이 무엇인지 진은 잘 알고 있었다.
‘돈이 된다는 소리지!’
대륙민들은 대회를 보고 엄청난 사념을 뿜을 것이다.
물론, 온 대륙이 전쟁에 빠졌을 때 벌어들일 사념에 비하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더 길게 본다면?
전쟁은 언젠가 끝난다.
심지어 사념을 생산할 인류가 대폭 줄어든 상태로.
하지만, 이건 다르다.
인류가 줄어들 리도 없고, 오랜 기간 달달하게 벌어다 줄 것이다.
“인류는 계속 존속할 테고, 악마분들은 사념을 챙길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생각한 공존입니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했다.
“딱 15분이군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누가 갑인 줄 알겠지?
15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갑이었겠지만, 이젠 아니다.
“바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오늘 있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겠습니다. 성자님.>
드디어 대화할 준비가 됐다.
하여간 괜히 2위가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