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네트워크 마케팅
진이 텐트 안에서 드라마를 보는 동안, 아이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 노바팀의 두뇌인 용수바람이 제일 분주했다.
“무대 제작은 의뢰해 놨어. 확인은 날파람이 맡아 줘.”
“살바람은 성자님이 말했던 거 대륙 모든 도시에 뿌려 줘. 설치와 관련해선 폴카 님께 조언받으면 돼.”
“노란바람은 왕궁 쪽과 접촉해서 이번 대회 룰과 식의 진행 순서를 알려 주고.”
“주인님께서 맡기신 일이야. 철저하게 하자.”
역시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곁에 둬야 했다. 덕분에 진은 희희낙락 놀고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애들끼리 하기엔 시간 꽤나 잡아먹을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좋은 거야.’
대회를 여는 게 ‘뚝딱’ 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진이 생각한 것을 구현하려면 한참이나 걸릴 터.
‘이참에 회개하면서 내 신앙을 보여 주자고.’
[신앙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쉬는 거겠지.]
‘어허. 신성 모독이다!’
[신성은 네가 제일 모독하고 있거든?]
그렇게 희희낙락 밀린 드라마를 챙겨보던 진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등장한 것이다.
[진. 손님이야.]
‘손님? 귀족들은 근처도 못 올 텐데?’
[뭐, 귀족이라면 나름 귀족이야. 밤의 귀족.]
‘……흡혈귀 쪽에서?’
[어. 바로 텐트 앞에 있으니까 그냥 부르면 돼.]
그런 로메른의 말과는 달리 텐트 밖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회개 중 방문해 죄송합니다.”
텐트 안으로 들어온 건, 흡혈귀가 맞았다.
그는 진의 눈앞에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에겐 단순히 이질적일 뿐이었지만, 로메른에겐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오. 대단한데?]
‘뭐가?’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 얘 고위 흡혈귀야.]
고위 흡혈귀.
진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왕국에도 몇 없는 흡혈귀였다.
‘그럼 이 양반이 지도자급이란 거야?’
[그럴 거야.]
불청객인가 싶었더니 정반대였다.
진이 호의 가득한 미소를 띠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누추한 곳으로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불쑥 찾아왔는데, 성자님께서 이렇게 환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둠의 주민분들과 교단은 우방인데, 당연한 일입니다.”
“이거 참…… 소식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군요.”
우방이라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까지 환영을 받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거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교단이 어둠의 주민이 반목하던 시절은 인간에겐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지만, 고위 흡혈귀에겐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그런 그에겐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낯선 것이다.
‘흠. 용건이 뭘지 진짜 궁금한데…….’
그런데도 진을 찾아왔다는 건, 이곳에 온 이유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무례지만 혹시나 해서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급하신 일이십니까?”
“……아. 그게.”
“괜찮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이건 좀 이상했다.
‘상황만 보면 절실한데, 본론으로 들어오니까 당황한다고?’
[……이거 뭔가 복잡한 이야기로 흐르는 거 아니야?]
이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음. 아닙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이렇게 드릴 부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절단신공을 쓴다고?
이건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일은 뒤로 미뤄 봐야 좋은 게 없었다.
[이거 분위기가 이상한데? 나중에 똥 치우게 만들지 말고 빨리 말하라 그래.]
로메른의 말에 적극 동감이었다.
나중에 문제를 떠안느니 여기서 해결하는 게 좋았다.
“괜찮습니다. 사실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서로를 돕는 것이야말로 우방 아니겠습니까?”
그에게 할 부탁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일단 똥물이 넘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한데, 이런 진과 로메른의 걱정과는 달리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피를 조금 얻을 수 있겠습니까?”
피?
의문이 떠오른 것도 잠시.
‘그러니까. 내 피를 달라는 거야?’
그러고 보니 왕국의 다른 흡혈귀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진의 피를 보물처럼 여겼다.
[……에라이. 급한 일인 줄 알았더니.]
로메른은 흥이 식었다는 듯 말했다. 그건 진도 마찬가지였다. 진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제 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진이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그는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성자님의 피가 저희들 사이에서 보물처럼 여겨지는 걸 아십니까?”
“보물인 줄은 모르겠지만, 왕국의 몇몇 분께 드렸을 때 좋아하시는 건 봤습니다.”
“음. 이걸 보여 드리는 게 빠르겠군요. 저희 마켓에서 굉장히 유행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는 작고 얇은 책자를 하나 내밀었다.
[천상의 맛.]
진은 그 책을 받아 빠르게 살펴보았다.
‘……이 미친 양반들이 진짜.’
이 책자는 일종의 ‘리뷰’였다.
-어둠의 주민은 빛을 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피를 맛보면 그건 착각이란 걸 깨닫게 된다.
-가슴속에 빛이 퍼지는 이 환상적인 맛은 ‘천상’을 보여 준다. 난 이걸 ‘천상의 맛’이라고 생각한다.
진의 피를 먹은 흡혈귀가 얼마나 맛있는지 기록한 ‘리뷰’.
“이 책이 유행이란 말씀이십니까?”
“베스트셀러입니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진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 음. 영광입니다.”
“사실 성자님께서 회개 도중 흘리시는 피를 받아 가려고 했습니다만, 피를 흘리시지 않는 것 같아서 돌아가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텐트 앞에 서 있던 거였어?
일단, 핑계부터 대야 했다.
“아. 그건 제가 과분하게 사랑을 받아, 회개를 할 때 상처가 나지 않습니다.”
“소리만 들어도 엄청나던데 상처가 나지 않으신다니…… 신께서 직접 보호하시는 모양이군요. 과연 성자님이십니다.”
묘한 오해를 하게 만든 것 같았지만, 뭐 나쁘지 않은 오해였다.
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때, 로메른이 끼어들었다.
[진. 피 주자! 무조건 줘야 돼!]
‘어? 아. 주긴 줄 건데. 왜?’
[일단 줘.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좋은 생각?’
로메른의 생각이 자신에게 해가 될 리는 없었다.
‘루나, 부탁할게.’
[네. 진짜 ‘천상의 맛’이 뭔지 저들에게 보여 줄게요.]
진은 곧장 흡혈귀에게 말했다.
“예. 피를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많은 양은 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주셔도 영광일 겁니다!”
아니. 대체 뭔 환상을 품고 있길래 저 지경이야?
로스칼 갓 탤런트를 시작도 하기 전에, 문화의 위력을 맛보고 있었다.
이내 진의 몸에 상처도 없이 손끝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루나가 무슨 짓을 했는지, 피 냄새가 진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비릿하고 역겨운 피 냄새가 아닌, 뭔가 향기롭고 신비로운 향이.
“……허.”
그는 넋이 나간 듯 그 피를 빤히 바라봤다.
작은 물주머니가 부풀어 오를수록, 그의 입은 점점 벌어졌다.
“이, 이렇게나 많이 주시다니요.”
나중엔 그가 말릴 정도였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드린 겁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앞으로 또 드리긴 힘들 것 같은데…….”
“예! 오히려 그편이 좋습니다!”
“예?”
“성자님의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니까요.”
아니다.
진은 그의 표정 변화를 봤다.
그건 맛있는 걸 혼자만 먹겠다는 표정이었다.
‘괜찮겠네.’
이건 오히려 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냥 피 주머니 하나 쥐여서 보내면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알아서 관리해 줄 분위기였다.
그때,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우리 좀 도와 달라고 그래.]
‘우리? 도움받을 게 있어?’
[흡혈귀들 좀 대대적으로 빌려 달라고 해. 최대한 시간 단축할 수 있게.]
‘……어!?’
이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흡혈귀에게 일을 짬 때린다니!?
문제는 진이 쉴 시간도 줄어든다는 것이었는데.
[지식의 해방이 끼어들기 전에 빠르게 진행해야 돼.]
녀석의 말은 틀린 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했다.’
[당하긴 뭘 당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말해.]
진이 입을 열었다.
“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우방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하.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흠. 이게 대규모 도움이 필요한데…….”
진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흡혈귀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일 방법.
‘보상.’
그건 문제될 게 없었다.
진에겐 피가 있으니까.
그때, 머릿속에 재미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아십니까?”
“네트워크 마케팅이요? 처음 들어 봅니다.”
“이게 참 좋은 건데…… 잠깐 앉으시겠습니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예.”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그 해결책이 바로 네트워크 마케팅입니다.”
아. 좋은 정보가 있어서 그렇다니까?
일단, 들어보기만 해.
너랑 내가 얼마나 친한데, 너한테 해가 되는 말을 하겠어?
* * *
진은 나름대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텐트였던 진의 숙소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50인용은 되어 보이는 텐트로 변했다.
그 안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러분은 이 대륙에 여덟밖에 없는 다이아몬드 회원님이십니다. 대륙을 위해 헌신하는 여러분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진의 손이 닿지 않는 여덟 왕국의 ‘지도자급’ 흡혈귀들이 텐트 안에 모여 있었다.
“여러분은 네트워크 연합의 정점입니다. 우리의 고유 시스템 ‘네트워크 마케팅’은 이미 이해하셨을 겁니다.”
흡혈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란 진의 말은 거짓이 아닌 걸 확인했다.
‘진작 이렇게 할걸.’
뭐, 솔직히 말하면 왕국 쪽이 더 편하긴 했다.
당장 눈앞에 적이 있으니, 흡혈귀를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한데, 이쪽은 좀 다르다.
눈앞의 적도 보이지 않고, 아무리 우방이라도 함부로 이들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 네트워크 마케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 첫 번째 의뢰를 하겠습니다.”
진의 말과 함께 그들 앞으로 서류가 날아갔다.
“활동하시는 왕국의 주요 도시에 설치해 주시면 됩니다.”
원래라면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야 하는 일이.
“작업 진척도와 속도를 고려하여 천상이 지급될 겁니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흡혈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트워크의 힘을 보여 주세요. 우린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죠? 여러분은 다이아몬드입니다!”
곧이어,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시작하겠습니다! 네트워크 연합의 첫 활동입니다!”
[……아니. 그래서 네트워크 마케팅이 대체 뭔데? 아니. 쟤들은 또 왜 이렇게 의욕적이야?]
로메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왜? 관심 있어?’
[……아니. 됐어. 네 표정 보니까 이건 들으면 안 되겠네.]
이래서 눈치 빠른 정령은 싫다니까.
대회 준비가 ‘초고속’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진은 놀라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미친. 벌써 준비가 끝났다고?’
네트워크 마케팅의 효과는 확실했다.
대회 시작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