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예술의 나라
진은 오랜만에 미모 후작을 만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성자님. 아니. 이젠 대정령사님이라 불러 드려야 하나요?>
“아 쫌. 그거 내가 그만하랬지.”
진짜 저 대정령사 소리는 언제 들어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애초에 미모 후작은 진이 싫어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기가 막히게 줄을 타면서.
<어머나. 여기 귀한 분이 계셨네요.>
언제 진을 놀렸냐는 듯,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서, 성자님?”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악마와 진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악마! 악마예요!”
<맞아요. 전 악마랍니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건 예상했다.
용인족은 세상을 지키는 드래곤을 모신다. 그런 이들이 악마에게 호의적일 리 없었다.
“맞아. 악마야. 처음 보는 모양이네?”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멸망시키려는 악마잖아요! 보면 큰일이죠!”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심지어 성자인 진이 악마를 불렀으니, 굉장히 혼란스러울 터.
‘뭐, 방법이 있지.’
폴카의 혼란을 한 방에 잠재울 방법이 있었다.
<이렇게 칭찬해 주시니.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네요.>
“치, 칭찬 아니에요! 성자님에게서 떨어져요!”
<어머나. 전 임자가 있는 악마랍니다. 우리 자기가 화내서 애초에 가까이 가지도 못해요.>
“이, 임자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황도 잠시 그녀의 얼굴에 슬슬 적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진이 입을 열었다.
“폴카. 적이 아니야.”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는 교단에 귀의했거든.”
“……네?”
“우리 빛의 교단 신자야.”
“아, 악마가 교단의 신자라고요!?”
폴카의 뜨악한 표정이 재밌었는지, 미모 후작이 쐐기를 박듯 거들었다.
<성자님의 설득에 저는 빛에 귀의했답니다.>
“…….”
<악마라는 종족만 보고 저를 적대하시는 건, 종족 차별이 아닐까요? 용인족이 이렇게나 편협한 종족일 줄은…….>
“아, 아니에요! 용인족 전체가 그런 게…… 아니. 악만데….”
진이 뒤에서 슬쩍 성호를 보여 주자, 그녀는 알겠다는 듯 자연스럽게 성호를 그었다.
<성자님께선 많은 것들을 알려 주셨어요. 혼란에선 그 무엇 하나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마치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빛의 신께선 차별이 없으시다는 것을요. 제 눈을 뜨게 만들어 주셨어요.>
미모 후작의 모습은 악마라곤 생각할 수 없는 자비롭고 자애로운 모습이었다.
“…….”
폴카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본 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악마마저 회개시키시다니…… 역시 성자님…….”
이런 폴카의 생각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 줘야 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어.”
<뭐든 물어보세요. 성자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요.>
미모 후작은 이 상황이 꽤 재밌는 듯 연기를 이어 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남은 기만하고 속이는 것만으로도 악마는 행복한 법이니까.
“예술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로스칼 왕국 알지?”
<그럼요. 악마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곳인걸요.>
폴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을 바라봤다.
“성자님은 대단하셔. 진짜 회개시키신 거야.”
미모 후작도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입꼬리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진이 표정 관리하라고 눈으로 말하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로스칼 왕국에는 ‘악마의 재능’을 지닌 예술가들이 정말 많아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시겠어요?>
“……진짜 악마가 재능을 내려준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구에선 악마의 재능이란 건 경외의 표현이었는데, 여기선 진짜 악마에게 재능을 받은 거였다.
<어떻게 움직이실지 모르겠지만, 이 왕국은 ‘예술’ 쪽으로 공략하는 건 힘드실 거예요.>
“아. 이건 좀 까다롭겠는데.”
<게다가…… 이쪽은 악마들이 뿌리 깊게 암약하고 있어서, 섣불리 움직이시면 악마들의 견제를 받으실 거예요.>
“그것도 이해했어.”
나쁜 소식이었지만, 좋은 조언이었다. 이것도 모르고 악마를 자극했다면 괜한 적을 또 만들게 됐을 테니까.
“고마워.”
<아니에요. 빛의 길을 따르는 제게 이건 당연한 일이에요.>
당연한 일이긴…….
악마는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다. 준 만큼 받는다는 말이다.
“말릭은 잘하고 있어?”
<아. 그 인간이요? 정말 잘해 주고 있어요. 어찌나 악마…… 아니. 좋은 인간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진은 이미 선불을 낸 상태였다.
리치와 미모 후작 쪽에 말릭을 지원 보낸 상태였다.
“웬만하면 위험한 곳 위주로 보내. 아주 죽ㅇ…… 아니. 위험할수록 성장하는 친구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알아서 위험한 곳만 가던데요?>
“그래. 그거면 됐어. 수고했어.”
이제 그녀의 정보를 바탕으로 계획을 짜야 했다.
한데, 그녀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함께 기도해 주시지 않는 건가요?>
“같이 기도도 해 주셨어요!?”
폴카를 놀리는 재미에 푹 빠진 거 같았다.
“미안한데, 좀 바빠.”
진이 빨리 가 보라는 듯 손짓하자,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돌아갔다.
미모 후작이 돌아간 뒤, 폴카는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다가와 종알거렸다.
“성자님, 전 믿고 있었어요! 악마가 나타날 때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진은 반성했다.
‘애들은 못된 걸 빨리 배운다는데.’
폴카가 저렇게 된 건 자신의 탓이 아닐까 하는 그런 반성을.
“그럼, 나도 폴카가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요? 역시!”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꿔 버린 건가…….’
진에겐 작은 거짓말이었지만, 그녀에겐 가치관을 뒤흔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
그 순간,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깐만…….’
고정 관념을 바꾸면 된다.
진에겐 작은 거짓말이겠지만, 로스칼 왕국 모두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일을 만들면 된다.
‘로메른! 이번 일, 내 방식대로 해 봐도 돼?’
[괜찮겠어? 악마들 문제도 있고 하니, 예술 쪽으론 접근도 힘들 텐데.]
‘아니지. 이건 오히려 예술 쪽으로 접근해야 돼.’
[……어떻게? 악마의 재능은 장난이 아니야. 특히 여긴 고일 대로 고인 로스칼 왕국이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었다.
‘악마의 재능을 받은 게 훨씬 좋다는 건 편견이 아닐까?’
[어? 아니. 당연히 좋지. 무슨 개소리야?]
‘이 개소리가 핵심이야.’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빗발치고 있었다.
‘내 방식대로 갈 거야, 말 거야.’
[……불안하긴 한데, 또 의외로 통할 거 같단 말이야. 아. 근데, 말했듯이 이쪽 실패하면 큰일 나는 거 알지?]
‘아. 괜찮아. 이건 된다니까!’
[아니. 그래서 그게 뭔데?]
‘로스칼 갓 탤런트.’
[뭐? 로스칼 신 재능? 이게 뭔대?]
뭐긴 뭐야.
왕국을 처리할 열쇠지.
‘나만 믿어!’
각이 나왔다.
* * *
교단에서 보낸 공문 하나에 로스칼 왕국은 난리가 났다.
-성자의 방문.
이 소식에 왕실은 물론, 귀족들 또한 난리가 났다.
로스칼 왕국은 엄밀히 따지면 ‘강대국’이 아니다. 군사력도 형편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왕국의 형태를 유지하는 건, 도시의 수많은 예술가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수출하는 음악, 그림, 조각상 등등 수많은 예술들 덕에 왕국이 유지됐다.
솔직히 말하면, 로스칼 왕실과 귀족들은 성자의 방문이 썩 달갑지 않았다.
대륙을 감싸고 있는 묘한 분위기를 모를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다음 소식 내용 때문에 거부할 수 없었다.
-교단이 주관하는 예술 대회.
예술가들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예술 대회’가 열린다면 그 이득이 얼마나 막대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어디서 소문이 새 나간 건지 이미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예술가들은 이미 ‘대회’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성자의 방문을 거부한다?
그땐 예술가들이 폭도가 되는 거야!
덕분에, 진은 성대한 환호 속에 로스칼 왕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우와와아아아-!”
“성자님을 환영합니다!”
“로스칼 왕국에 축복을!”
성자를 환영한다기보다는, 대회 유치를 환영하는 것이었지만.
성자를 마중 나온 귀족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성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한데, 일행은 이분들로 끝이십니까?”
진은 굉장히 단출한 인원으로 로스칼을 방문했다.
노바와 아이들, 폴카, 진.
6명이 끝이었다.
성자의 방문이라고 생각하기엔 단출한 인원이었지만.
“희망의 4기사와 이쪽 마법사님께선 마도사의 경지에 이르신 분입니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제야, 귀족들은 깨달았다.
일행이 적게 온 게 아니라 소수 정예로 온 것이라는 것을.
“아닙니다. 대회를 연다고 해 놓고 이리 단출하게 왔으니 의아해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귀족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말대로라는 표정이었다.
“로스칼 왕국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모든 준비는 로스칼에 살고 계시는 분들에게 부탁할 생각입니다. 예산도 넉넉히 챙겨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의 말에 귀족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결국, 이 로스칼 왕국 내부에서 돈이 돌게 되니 그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
“이리 배려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대회 준비는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대회는 그분을 위해 교단이 준비한 일이니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제가 그분을 위해 준비했다면, ‘그분’이 누군진 명확해진다.
빛의 신.
신을 위한 대회란 뜻이었다.
“아. 종교적 행사셨군요.”
빛의 교단 사제가 ‘신’을 언급했는데,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 리 없었다.
귀족의 표정은 한결 좋아졌다.
“그렇습니다. 사제는 삿된 욕심을 가지면 안 되지만, 그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니 대륙 최고라는 로스칼 왕국에서 하자고 교황께 청을 드렸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왕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진을 왕궁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왜냐? 가면 굉장히 귀찮아진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따로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
“아까 말씀드렸듯 삿된 욕심을 가졌습니다. 회개의 시간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회개의 시간이란 말에, 귀족은 흠칫 놀랐다.
교단 사제들이 회개를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소 소리가 날 수 있으니, 외진 곳에 텐트를 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채찍으로 등을 후려치는데, 조용할 리가 없었다.
“무, 물론입니다!”
귀족은 질렸다는 얼굴로 황급히 대답했다.
“준비는 이분들께서 하실 겁니다.”
진은 주위에 자신의 일행을 가리켰다.
단순히 귀찮아서 이렇게 한 게 아니었다.
이들의 적대감을 없애기 위해선 이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교단 ‘사제’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물론, 귀찮은 것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게 준비는 슬쩍 짬 때린 뒤.
진은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촤악-!
“신이시여.”
촤악-!
“이 못난 종이 회개합니다.”
촤악-!
“몸 안에 깃든 삿된 욕심을.”
촤악-!
“버리겠나이다.”
촤악-!
…….
이내 텐트 속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소리일 뿐.
‘아. 좋다.’
진은 누워서 밀린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