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158화 (158/210)

158. 탈출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한번 타오른 불은 이곳저곳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귀족가들의 저택이 불타올랐다. 그들이 쌓아 올렸던 부와 명예는 시민들의 분노에 모두 타 버렸다.

몇몇은 천벌이 무서워 불타 죽었고, 몇몇은 추하게 도망치다가 천벌에 맞아 죽었다.

“성왕국을 정화한다!”

“우리가 정의다!”

“새로운 성왕국을 위해!”

“착취는 여기서 끝이다!”

처음엔 분노였으나, 계속해서 타오른 분노는 이내 ‘광기’가 되었다.

성 왕국 도시엔 광기가 휘몰아쳤다. 더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쌓였던 분노를 쏟아낼 뿐이었다.

물론, 귀족들도 그저 당하고 있지만 않았다.

그들도 나름의 방법을 강구했다.

“활과 석궁을 들어라!”

“접근하면 쏠 것이다!”

“당장 물러가라!”

원거리 무기를 들고, 시민들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기 방패입니다!”

“상단이 왔다! 모두 방패 받아!”

“방패를 조밀하게 짜서 천천히 나아가는 겁니다!”

“무조건 우리가 이깁니다!”

“저쪽의 활은 수량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상단 측에선 방패를 시민들에게 건넸다. 방패가 부족하면 나무를 뜯고 임시로 방패를 만들어서 전해 주었다.

그렇게 방패 뒤에 숨어 안전을 확보한 뒤, 이쪽도 원거리 무기를 들었다.

새총과 조악한 활, 슬링까지.

원시적인 무기들이지만, 이쪽은 저택을 불태우기만 하면 승리였다.

게다가, 부상을 입어도 걱정이 없었다.

“성자님! 환자입니다!”

“활이 어깨를 관통했습니다!”

이쪽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치료해 주는 성자가 있었으니까.

덕분에, 도시에 있는 귀족가의 저택은 빠르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젠 귀족들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택에서 버텨봐야 그들에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천벌이 한 번에 얼마나 떨어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일시에 도망치면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두 산개해서 일시에 도망치는 겁니다. 도시만 벗어나면 저희의 승리입니다.”

“벗어나는 게 어렵다면, 왕성으로만 들어가도 일단은 안전이 보장될 겁니다.”

처음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한꺼번에 도망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천벌이라고 하더라도, 수십 명이 한 번에 산개해 도망친다면?

게다가, 단순히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천벌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그럼, 시민들 틈에 섞이면 어떻겠습니까?”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시민들을 붙잡아 휘두르는 건 문제 없습니다.”

“한 놈을 붙잡아 인간 방패로 사용하는 것도 좋겠군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은 천벌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그들도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모두 일시에 이탈한다!”

“들기 쉬운 녀석으로 붙잡아라!”

일시에 기사와 귀족들이 쏟아져 나왔다.

썩어도 준치라고, 신성력을 기반으로 힘을 사용하는 이들을 일반 시민들이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모두 도망쳐-!”

“천벌에 휩쓸린다!”

“벗어나!”

시민들을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기사들과 귀족들은 근처까지 다가왔다.

쿠구구구궁-

평소와는 다른 울림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기사들과 귀족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시민들을 붙잡아 천벌을 막는 방패로 썼으니까.

“신이 너흴 용서하지 않으실 거다!”

“닥쳐라! 방패 놈아!”

“날 살리는 데 사용됐으니 영광으로 알아라!”

“이, 이! 금수만도 못한 놈들!”

그 순간.

핏-----!

기묘한 소리와 함께, 귀족과 기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머, 머리를 봐!”

그들의 머리엔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 주위는 그을린 듯 거무튀튀했다.

그제야,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천벌이다!”

“신께서 우릴 살리신 거야!”

“너, 너희는 도망치지 못한다!”

“신께서 우릴 가호하신다!”

귀족들의 도주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 모습을 저택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귀족들은 절망에 휩싸였다.

“……정녕 천벌이란 말인가.”

그들이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대성법진으로 막혀 있는 도시에 방문한 이가 성자 외에도 한 명 더 있었다.

검은색 로브를 깊게 눌러 쓴 한 남자. 그는 귀족가의 저택에 스며들듯 들어갔다.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귀족은 자신의 뒤에서 갑작스럽게 난 목소리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기다렸습니다.”

오히려, 익숙한 듯 그에게 대답했다.

“성왕국에서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군요.”

“……이게 재밌습니까?”

“아.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부디 화내지 마시길.”

능글맞은 그에 말에 귀족은 한껏 화가 나 보였지만, 귀족은 그 화를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생명줄이었으니까.

“후우.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필요합니다.”

“방법이라…… 천벌에서 빠져나갈 방법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진짜 천벌이라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간단하다? 대체 뭐가 간단하단 말입니까.”

“이게 정녕 신의 천벌이라면, 신께 귀의한 자들에게만 효과를 발휘할 터.”

“서, 설마!”

“맞습니다. 신성력을 포기하면 될 일입니다.”

“……그게 무슨.”

부패하고 타락했지만, 한 평생을 모아 온 신성력이었다. 이는 마법사에게 써클을 포기하란 말과 다름없었다.

“힘이야 다른 걸 쌓으면 될 노릇 아닙니까? 저희에겐 빠르게 강해질 방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힘을 포기한 이후까지 지원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이미 성왕국과 지식의 해방은 동맹이나 마찬가지잖습니까.”

로브를 뒤집어쓴 자의 정체는 바로 지식의 해방이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솔직히 나갈 수만 있다면, 신성력이 없어도 저 개돼지들은 충분히 처리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하. 맞습니다. 성기사들의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천벌의 영역에서 벗어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후엔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귀족의 얼굴엔 어느새 환희가 떠올라 있었다.

“전 이 소식을 다른 분들께도 알려 드려야 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게다가, 다른 이들도 신성력을 포기한다면 자신만 약해지는 게 아니었다.

“바쁘신 분을 제가 붙잡고 있었군요. 부디 성왕국의 모두를 도와주시길.”

귀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브를 깊게 쓴 남자는 어둠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됐어. 살았다.”

그가 누구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 * *

굳게 닫혀 있던 귀족가의 문이 일시에 열렸다.

“나올 테면 나와 봐라!”

“천벌에 맞아 죽을 놈들아!”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며 소리쳤다. 한데, 귀족가의 있는 이들은 그걸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천천히 나가 봐라.”

“예!”

한 명이 주춤주춤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 천벌이 떨어질 거다!”

사람들은 그들이 천벌에 맞고 쓰러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백작님! 괜찮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대, 대체 어떻게!”

“신께선 천벌을 거두신 건가!”

천벌 때문에 가려졌던 공포가 다시 한번 사람들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 난 네놈들의 얼굴을 잊지 않을 것이야!”

귀족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도 천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기사들은 검을 꺼내 저들을 멸하라!”

청천벽력 같은 말이 귀족에 입에서 흘러나오고, 사람들의 얼굴은 공포를 넘어 새하얗게 질렸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기사들에겐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절망이 내려앉았다.

한데,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자신들과 별다른 것 없는 움직임과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신성력이 보이질 않았다.

그저, 병사와 같은 모습.

그때 사람들 틈에서 묘한 말이 튀어나왔다.

“화살을 쏴! 신성력이 없다!”

신성력이 없다는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성기사들이 허둥지둥 뛰어오기 시작했다.

“젠장! 서둘러 제압하라!”

하지만, 늦었다.

퉁-

사람들 틈에서 쇠뇌가 하나 발사됐고,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성기사 하나가 그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쿵-

달려오던 성기사들이 멈췄다.

“쇠뇌가 있다! 모두 방패를 들어라!”

그들은 방패를 든 채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이쪽은 석궁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기름을 뿌리고 불화살을 쏴라!”

천천히 다가오는 성기사들의 방패 위로 기름이 뿌려지고, 불화살이 날아온다. 성기사들은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신성력이 없는 지금, 당하면 끝이었다.

“물러서라!”

물러서라는 성기사들의 대장.

“당장 죽여! 저 버러지들을 죽엿!”

죽이라는 귀족.

저택 앞은 혼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성기사들의 대장은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

“백작님.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죽여! 절대 용서치 않겠다!”

“왕성으로 합류해서 한 번에 쓸어버리시면 됩니다!”

“내 말을 거역하는 것이냐! 죽이란 말이다!”

그는 곧장 결단을 내렸다.

“백작님을 모셔라! 왕성으로 이동한다!”

“죽여! 저놈들을 당장!”

성기사들은 백작을 강제로 데리고 천천히 왕성 쪽으로 이동했다.

시민들을 피해 도망치는 치욕이라니. 한평생 느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건,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성을 향하는 길엔, 방패를 든채 귀족을 호위하는 성기사들이 가득했다.

“대열을 맞추고, 방진을 구축하라!”

“백작님과 합류하라!”

그들은 거북이처럼 몸을 숨긴 채 천천히 왕성으로 나아갔다.

도시의 시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모습만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사람들 틈에서 흘러 나왔다.

“다들 이러지 말고, 귀족가 저택으로 들어갑시다! 우릴 착취해서 번 돈인데 나눠 가집시다!”

눈앞의 녀석들에게 손댈 수 없다면, 저택을 털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귀족가의 저택에 우리의 피와 땀이 있다!”

“모두 회수하러 가즈아!”

“가자!”

시민들이 귀족가의 저택으로 몰려갔다.

“저, 저 악귀 같은 놈들!”

“저놈들은 악마다! 악마야!”

“내 재산을!”

귀족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법 금고를 구매하길 천만다행이구나.”

무지렁이에 불과한 저들은 마법 금고를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귀족들은 애써 화를 삼키며 왕성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진! 쓸 만한 게 굉장히 많은데? 성유물도 있어!]

[와우! 이 나쁜 놈들 알뜰살뜰히도 모아 놨는데?]

[이것 좀 보세요. 이런 명화를 이런 추악한 자가 가지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당신들의 마법 금고?

‘전부 챙겨! 좋은 일 하는데 이 정도 보수는 챙겨 가야지.’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타락한 사제는 죽어서 보물을 남겼다.

‘아 아직 안 죽었나?’

그건 이제부터 하면 될 일이다.

녀석들은 단순히 신성력을 포기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교단과의 마지막 연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타락 사제는 아마 이단으로 취급받지?’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고작해야 부패한 사제가 아니다.

신을 저버리고, 신성력을 버린 이들. 이런 이들을 일컬어 ‘타락 사제’라고 말한다.

[그냥 이단도 아닙니다. 최우선 말살 존재로 지정돼요. 뭐, 이제는 잊힌 정말 옛날이야기지만요.]

‘옛날이야기? 우리 교단이 그런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키잖아.’

교단은 고루하며, 규칙과 약속을 절대로 잊지 않는 존재다.

그런 교단이 옛날이야기라고 지키지 않을 리 있을까?

‘자 마무리하러 들어가자!’

이젠 더는 혁명이 아니었다.

이단 사냥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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