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혁명의 불꽃
성왕국의 중앙 광장.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남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왕국은 변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이곳은 이미 썩을 데로 썩었습니다.”
“맞습니다. 주민들은 굶주리고 있고, 부의 격차는 커지기만 할 뿐 무엇 하나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제와 귀족을 제외한 모두가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성왕국은 정상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곳이 정상이 아닌 것을!”
“오직 우리만이 이 성왕국을 바꿀 수 있습니다!”
로브 밖으로 보이는 그들의 비장한 표정과 이야기만 들어보면, 광장에서 나눌 만한 대화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벌이 귀족들을 노리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밖이 더 안전했다.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천벌 때문에 귀족들의 발이 묶였고, 성자님도 있습니다.”
“확실히…… 지금이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은 성왕국을 위해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들의 얼굴엔 결의가 가득했다.
더 나은 성왕국을 만든다는 이상을 위해.
“더 나은 성왕국을 위해.”
“성왕국의 미래를 위해.”
그들은 결의를 다짐하며 하나가 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현자를 통해 그들의 대화를 들은 진은 혀를 차며 말했다.
‘열사들 납셨네. 납셨어.’
진이 보기엔 저들의 대화는 개소리나 다름없었다.
더 나은 성왕국을 위해?
‘퍽이나 그런 생각을 하겠네.’
혁명을 위해 움직이는 건 누굴까?
평민? 빈민?
둘 다 아니다.
당장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할 이들은 그런 생각을 절대 하지 못한다.
애초에 그들은 성왕국이 잘못됐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먹고살 만해야 혁명도 하는 거지.’
[맞아. 네 생각대로 전부 상단 쪽 인물들이야.]
값비싼 로브를 입고, 용병들의 호위를 받는 모습만 봐도 돈 좀 있는 양반들이란 게 느껴진다.
평민이긴 하지만, 골드라는 권력은 쥔 이들. 평민과 귀족 중간쯤 위치한 상단주였다.
‘사람의 욕심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저들은 정말로 더 나은 성왕국을 만들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니었다.
모두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다.
‘귀족들 덕에 돈을 벌어 놓고, 기회가 되니 귀족을 잘라 낼 생각을 한다니.’
성왕국은 모든 권력을 사제들이 독점하고 있다.
그런 성왕국에서 돈을 버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귀족과 결탁하는 것.
그들이 운영하는 상단의 진짜 주인은 성왕국의 귀족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잘라 낼 속셈이었다.
‘나쁜 놈을 덜 나쁜 놈들이 몰아낸다니…….’
코미디나 다름없는 촌극이었다.
알아서 일해 준다는 걸 생각하면 진에겐 땡큐였지만.
* * *
상단주들은 영리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귀족들에게 보내던 물자를 끊었다.
‘뭐, 여기까진 예상을 하긴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상단은 그 물자를 ‘진’에게 보냈다.
“저희의 물건들이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성자님께서 이렇게 힘쓰시는데, 저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성왕국의 모든 상단이 성자님의 활동을 지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놈들의 목적이 뭔지는 뻔히 보였다.
‘날 보험으로 써먹겠다는 거네.’
만약 혁명이 실패했을 경우, 진을 방패막이로 빠져나갈 속셈인 게 빤히 보였다.
그렇다고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성왕국에 빛이 남아 있었군요. 안 그래도 공물이 필요한 참이었습니다.”
준다는데 잘 받아서 사리사욕을 위해 써먹으면 될 일이다.
“공물이요?”
“기적엔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충족시킬 수 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공물이란 말씀이십니까?”
상단주는 애써 표정 관리를 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진 뻔히 보였다.
공물이 여기서 왜 나와!?
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상단주들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개소리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법.
성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왜? 꼬우면 니들이 성자 하던가.
“원래 공물을 바칠 땐 한 번에 많이 바치는 게 좋습니다. 나눠서 지원해 주려고 하셨다면 한꺼번에 해 주시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물론, 부담을 드리려는 생각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해 주실 수 있는 만큼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 예.”
진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못 준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들은 절대 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다른 상단주와 논의가 좀 필요하긴 한데…… 최대한 빠르게 공물을 바치겠습니다.”
아까 말했듯 진을 방패막이로 써먹어야 하니까.
‘와우.’
예상대로, 그들은 막대한 물자를 가져왔다.
“성왕국의 모든 상단들은 성자님을 돕는 것이 성왕국을 돕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진이 치료 봉사를 하느라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을 때를 노려서 찾아왔다.
“그래도 상단주들이 귀족들보다는 훨씬 낫네.”
“당연하지. 귀족 놈들이랑 상단주들이 같을 리 없잖아.”
“평민의 마음은 평민이 아는 거지. 상단주들도 다들 평민이잖아.”
“그렇지. 귀족들은 이런 마음을 모른다고.”
덕분에, 주민들은 상단주들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인식을 바꾼 것만으로도 상단주들은 손해가 아니었다.
“지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성왕국에 아직 빛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이 칭찬까지 해 주자.
“상단주님들, 고맙습니다!”
“앞으로 자주 이용할게요!”
“휘익! 멋있다!”
“상단 최고다!”
주민들이 환호를 지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환호를 듣는 상단주들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입금이 됐으면, 일을 해 줘야 하는 법.
진은 그런 환호 속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진의 몸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고, 상단주들이 가져온 물건을 감싸기 시작했다.
줄지어 이어져 있는 마차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설의 마법인 아공간을 이따위로 사용할 생각을 한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로메른은 툴툴거리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수레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단순히 사라지기만 해선, 기적이라 부를 수 없다. 수레가 사라진 빈자리를 음식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전엔 빵과 고기만 나왔다면, 이번엔 밀가루와 함께 더욱 다양한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기적이구나.”
뭐, 솔직히 말하면 가성비는 극악에 가까웠다.
상단주들이 가져온 물건들의 가치를 생각하면 고작 음식으로 바꾸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가치는 절대적인 게 아니다.
지금 성왕국엔 식량이 금보다 비싸다.
“우와와아아! 기적이야!”
“성자님의 기적이 함께한다!”
“신께선 우릴 버리지 않으셨다!”
“성자님! 성자님!”
“상단! 상단!”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에, 다시 한번 환호가 쏟아졌다.
‘이쯤 해 줬으면 됐겠지?’
입금받은 만큼 판은 깔아줬다.
이젠 혁명의 불꽃을 기다릴 차례다.
* * *
상단주들을 평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우린 언제까지 착취당하며 살아야 합니까?”
“성왕국은 정상이 아닙니다.”
“내부는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대체 이런 나라가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와서들 보세요. 이곳이 정상이 아닌 걸 깨달을 겁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세상은 어디나 비슷하다. 이렇지 않은 나라를 찾기 더 힘들다.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성왕국이 비정상인 걸 일깨워 준 뒤.
“신께서 저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계십니다. 저들이 정말 ‘사제’입니까?”
“우리가 움직일 차례입니다! 어차피 저들은 천벌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이미 신께서 저들을 벌하고 계십니다. 그런 이들에게 어떻게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사제들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입 밖으로 말하는 것조차 죄가 될만한 일이었지만, 지금을 그걸 막을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하긴, 성자님을 봐 봐. 그게 진짜 사제지.”
“교단이란 곳은 모두 성자님 같다던데?”
“신을 모시는 분이란 그런 거 아닐까?”
심지어, 보고 비교할 수 있는 성자란 존재까지 있었다. 사람들은 선동에 휩쓸려 분노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의 분위기가 변했다.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사제라면 당당히 나와라! 천벌이 떨어지는지 보자!”
사람들이 귀족가로 몰려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감히 누구에게 그딴 망발을 하는 것이냐! 모두 죽고 싶은 게냐!”
서슬이 퍼런 반응에 처음엔 겁을 내기도 했지만, 이내 모두가 깨달았다.
“그럼 나와 보든지? 죽여 봐!”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겁쟁이 놈들이!”
저들은 천벌이 무서워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아무리 뒤흔들어도 저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한다.
물론, 밖으로 나온 이들도 있었다.
“기사들은 뭐 하는 것이냐! 당장 나가서 저 녀석을 죽여라!”
발작하는 귀족 덕에 밖으로 기사가 뛰어나오고.
콰과과과광!!
천벌에 맞아 바싹 구워졌다.
“절대로 나가선 안 됩니다!”
“적의 공격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는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정의다!”
“신께서 천벌을 내리신다!”
“적이라니! 너희들에겐 신의 힘이 적이냐!”
나오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자, 사람들의 행동은 더욱 과격해졌다.
그저, 소리를 지르던 이들이.
“이거나 먹어라!”
“너희는 사람도 아니다!”
“왜? 죽이게!? 죽여 봐!”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챙그랑!
유리창이 깨지고, 저택이 조금씩 파손되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니 귀족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는지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식량은 시시각각 떨어지고 있었고, 밖으론 나가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 누가 저택에 불이라도 지른다면?
끝이다.
불타 죽던지, 천벌에 죽던지.
아무튼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의 걱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저택이 하나 있었다.
“대체 데려간 아이들은 어떻게 한 거냐!”
“내 아이를 돌려줘!”
“우리 마을에서만 다섯을 데려갔잖아!”
“아이들을 돌려달라고!”
사제 교육이란 명목으로 아이들을 데려간 사제의 저택.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가 아이들을 돌려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가라!”
“사제 교육 중이다!”
“신의 뜻을 계승 중인데, 어딜 방해냐!”
사뭇 험악한 분위기에도 앵무새처럼 못 돌려준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사람들이 다르게 요구했다.
“그럼 얼굴만이라도 보여 줘!”
“살아 있긴 한 거야!?”
“애들이 죽어 나간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
얼굴만 보여 달라는 요구.
하지만, 그 요구마저 이뤄지지 않자 사람들은 비로소 소문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분노한 시민들은 그 분노를 저택에 쏟아부었다.
온갖 것들을 저택을 향해 날아갔다. 그중에 어째서인지 ‘기름과 횃불’이 포함되어 있었다.
“불이야!”
“당장 불을 꺼!”
귀족과 기사들은 얼른 불을 끄라고 하인들을 닦달했지만, 하인들은 그들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저, 저 천한 것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붙잡아 둘 수도 없었다. 애초에 우물은 저택 밖에 있었으니까.
“자작님 도망치셔야 합니다!”
“어, 어디로 간단 말이냐!”
“밖으로 가셔야 합니다!”
안에 있으면 불에 타 죽고, 밖으로 나가면 천벌에 타 죽는다.
“……신이시여.”
자작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오랜만에 신을 찾았다.
혁명의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