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마지막 열쇠
오늘은 내가 스튜 요리사!
진은 여러 냄비를 오가며 스튜를 만들었다.
뭐, 엄밀히 따지자면 진이 만들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진이 스튜를 만드는 방법 따윌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이거 오랜만인데?]
스튜는 정령들이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의외인 점은 메인 셰프가 바로 로메른이란 점이었다.
[야! 루나! 넌 빠져. 네 손만 타면 파멸적인 맛이 나니까.]
[흥! 과장도 심하군요. 파멸적이라니.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죠? 성녀예요. 성스러운 맛이 난다고요!]
[헛소리 말고, 루나 그대는 빠지게. 농담이 아닌 진심일세.]
[검성! 당신까지!]
-솔직히 루나는 손대지 말자.
봉사를 다니며 요리 경험이 많았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성녀는 요리에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성녀가 빠지고 흑마법사가 요리한다니.’
[허허. 각자 재능이 있는 법이지.]
검성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고기와 채소가 썰렸고.
-로메른. 어떤 스튜로 할 거야?
[재료 보니까 마구잡이 스튜로 가야겠는데?]
-그럼 마구잡이용 마법을 쓸게.
현자는 마법을 이용해 불을 조절했고.
[솜씨 좀 발휘해 볼까.]
‘……의왼데?’
[의외는 무슨. 요리는 연금술이랑 똑같아. 정확한 레시피와 타이밍. 거기다 재료의 속성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마치 포션을 만들듯 로메른이 스튜를 제조했다.
진이 보기엔 정령들이 그저 스튜를 끓여 주는 모습이었지만, 빈민가에 사는 이들에겐 전혀 다르게 보였다.
“저게 대체…….”
“재료가 날아다녀!”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늘 위로 재료가 날아다녔고, 진은 가만히 있는데 수십 개의 냄비에서 스튜가 끓여지고 있었다.
“사제께서 정령을 부리시는 거야?”
“정령을 부리는 사제님이라면…… 서, 설마!?”
“성자님?!”
“성왕국에 성자님이 오신 거야?!”
그런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진의 정체를 깨달았다. 대륙에서 정령을 부리는 사제는 진이 유일했으니까.
정체를 깨닫고 나자, 지금까지 봤던 놀라운 일들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진짜 기적이었구나.”
“성자께서 기적을 보여 주신 거였어.”
“아무렴, 빵과 고기를 만들어 내셨는데 그거야 말로 진짜 기적이지.”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다들 오셔서 드셔 보세요.”
어느새 요리가 끝나 있었다.
“벌써 끝나셨습니까?”
“스튜는 푹 끓여야 맛이 배어 나올 텐데…….”
적당히 일찍 끝난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너무 일찍 끝난 요리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런 그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크으! 이 깊고 진한 풍미라니!”
가장 먼저 스튜 맛을 봤던 사람이 소리쳤으니까.
“……뭐?”
“다들 쉰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먹어! 국물이 끝내줘!”
“정말이야?”
“안 먹을 거면 말어. 내가 먹을 거니까!”
“아, 기다려 보게!”
곧이어, 곳곳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크으. 이거 참 국물이 시원하구먼.”
“캬. 이 풍미는 못 참지!”
“12시간을 끓인 것보다 더 맛있어!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이게 기적이지!”
그렇게 행복한 한 끼 식사가 시작됐다.
* * *
함께 식사한다는 건, 그리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식구(食口)란 말처럼,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더 친밀한 관계가 됨을 의미한다.
고작해야 스튜를 끓여 한 끼 식사를 한 것이 아니다. 진과 그들의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문 것이다.
실제로 식사 후 분위기가 변했다.
빈민가의 주민들은 더는 벼락을 두려워하며, 진의 곁으로 오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음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거라 생각했는데.
“치료가 필요하신 분 있으십니까?”
빈민가의 사람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아무도 안 온다고?’
이 흐름이라면 사람들이 떼로 몰려 치료해 달라고 아우성을 쳐야 하는데, 아무도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났을 때, 쭈뼛쭈뼛 한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치료비는 얼마나 내야 합니까?”
그제야, 이들이 다가오지 않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치료비는 전혀 필요 없습니다. 신께서 내려 주신 이 힘은 사람을 돕기 위해 있는 법인데, 어찌 사례를 받는단 말입니까?”
성왕국엔 교단이 없다.
이들이 본 사제는 이곳의 귀족들뿐이다. 이러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지, 진짭니까!?”
심지어, 진의 말을 들은 그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 교단은 돈을 받고 치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여기 없다고 해도, 소문은 들으셨을 텐데요?”
“……성왕국을 깎아내리려고 교단에서 만든 소문인 줄 알았습니다.”
누가 누굴 깎아내려!?
어처구니없던 것도 잠시, 이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부패하고 타락한 사제뿐이지만, 이들은 평생을 성왕국의 종교를 믿고 자란 이들이다.
“전혀 아닙니다. 사례금은 물론이고, 어떤 종교를 갖고 계시는지도 상관없습니다.”
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들의 얼굴엔 놀라움이 떠올랐다.
“아무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말이 끝났을 땐, 시위가 조용했다. 그 침묵을 깬 건, 진이었다.
“치료가 필요하신 분 있으십니까?”
아까와 동일한 물음이었지만, 이번엔 그 반응이 전혀 달랐다.
“받고 싶습니다!”
“저도 허리가 좋지 않습니다!”
“저희 어머니 좀 살려 주십쇼!”
사람들이 하나둘 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진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모든 분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전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천천히 오셔도 괜찮습니다.”
“서, 성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치료가 진행된다고 식사 시간은 빠지지 않았다.
그 결과, 진은 완벽하게 빈민가에 녹아들었다.
“성자 님. 나오셨습니까?”
“오늘은 스튜 어떠십니까? 스튜를 하신다고 하면 모두 냄비를 가지고 나올 겁니다!”
이들은 진에게 극진한 예를 표하면서도,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존경하면서 친근한 진이 원하던 관계가 된 것이다.
‘슬슬 분위기가 잡힌 거 같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까? 저쪽도 조급함을 느끼는 거 같은데.]
로메른은 도시 중앙을 가리켰다.
벼락이 떨어지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신과 접촉하기 위해, 저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내려가자.’
이젠 슬슬 이곳에서 내려갈 때였다.
* * *
빈민가 모두를 치료하고, 서로 익숙해질 때쯤.
“이제 슬슬 이동할까 합니다.”
진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놀라운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성자님. 조금만 더 함께해 주십쇼!”
“보답해 드리지도 못했는데, 벌써 떠나신다니요!”
“저희가 더욱 잘하겠습니다요!”
고작해야 며칠 전 방문한 사제가 떠날 뿐인데, 마치 저들은 나라를 잃은 표정이었다.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완전히 떠나는 건 아닙니다. 아직 그분께선 제가 이곳에 머물길 원하시니까요.”
진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울상이던 얼굴엔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 도시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이고, 뭐든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희가 발 벗고 나서서 돕겠습니다!”
성자는 성왕국의 귀족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다들 이미 알고 있다. 그런 진의 부탁이기에 주민들은 진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은혜를 받았다 생각하며 어떻게든 보은하고 싶어 했다.
“여러분께 해 드렸던 것을 다른 분들께도 나눠 드릴 생각입니다. 간단한 통제 같은 걸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암요! 가능합니다!”
“저희가 한꺼번에 몰려가면 복잡해져 오히려 폐가 될 테니, 의견을 모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성자님. 오히려 저희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왕국을 들어올 땐 혼자였지만, 빈민가에서 움직일 땐 혼자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과 함께 진이 움직였다.
내려와서도 진이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식사를 권하고.
“치료가 필요하신 분은 말씀해 주세요.”
치료를 권하고.
“제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무엇 하나 바라지 않는 일을 이번에도 반복했다.
원래라면 내려와서도 약간의 쇼맨십이 필요했겠지만, 빈민가 사람들이 함께인 이상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성자님이십니다.”
“진짭니다. 저희가 사는 곳으로 먼저 오셨습니다.”
진을 대신해 주민들을 설득해 주었고.
“줄을 서시오!”
“거, 새치기 안 해도 우리 성자님은 어디 안 가신다니까요!”
“다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진을 대신해 주민들을 통제해 주었다.
그렇게 또다시 며칠이 흘렀을 때.
“아이고, 성자님 나오셨습니까?”
“성자님! 좋은 아침입니다!”
“성자님. 이번에 저희 아들놈 생일입니다. 축복 한번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진은 성왕국 자체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모두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사제로.
* * *
판타지 세상에선 왜 ‘혁명’이 일어나지 못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힘의 격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마나란 만능의 존재는 세상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절대 혁명이 일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하다못해 지식의 해방만 해도,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이 ‘마나 사용자’다.
결국, 지식의 해방 또한 기득권 중 일부가 단체를 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데, 지금 성왕국의 상황은 묘하다.
밖으로 나오면 천벌이 떨어지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덕분에,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건물 내부에 발이 묶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의 힘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게다가 완벽한 대조군이 등장했다.
성왕국의 부패한 사제(귀족)들과는 달리, 신실하며 부패하지 않은 완벽한 사제.
그에게서 교단에 관해 들었을 땐, 모두들 충격을 금치 못했다.
“삿된 마음이 들면, 채찍으로 등을 후려친단 말입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신성력은 곧 신의 힘. 그런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 어긋나는 건 결코 안 될 일이니까요.”
“그럼, 사제님들은 대체 무슨 재미로 사시는 겁니까?”
“사제는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이들입니다. 뭐, 여러분의 미소를 보면 즐겁긴 하지만요.”
진은 마지막에 농담을 덧붙였음에도, 아무도 그 농담에 웃지 못했다.
“사제가 그런 존재였다니.”
“아니. 아무리 사제라고 하더라도…….”
“그럼, 밖에 소문이 전부 진짠 거야? 상단 놈들이 말하던 교단의 그 소문.”
“허어…… 우린 대체.”
물론, 교단을 이제야 접한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교단에 관해 알고 있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 성자님께선 이곳에 무엇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신께서 절 이곳으로 인도하셨을 뿐입니다.”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예. 그것을 알 때까지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지낼 생각입니다.”
모두 감탄을 터트릴 때, 여태 이야기를 듣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교단에 관해 이미 알고 있던 자들 중 하나였다.
“성자님께선 한동안 이곳에 계신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그렇습니다. 다친 분들을 치료해 드리고, 물자가 막혀 지금 굶주리시지 않게 힘을 보태 드릴 생각입니다.”
“과연…… 잘 알겠습니다.”
진에게 말을 건 저 녀석이 바로 성왕국 해결의 마지막 열쇠.
바로 ‘혁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