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방향을 잡다
키메라 공장-실패.
전염병-실패.
인조 가뭄-실패.
귀족 분열-실패.
…….
그 밑으로도 한참이나 실패가 박힌 퀘스트들이 보였다. 이게 전부 진이 박살 낸 계획들이었다.
‘보람찬데?’
그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참 밑으로 내리고 나서야, 실패가 아닌 퀘스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 멸망-진행 중.
세계 멸망이라는 퀘스트와 앞으로의 지침이 되어 줄 퀘스트가 나타났다.
왕국 탈출-미수락.
‘오호.’
진이 손을 옮겨 왕국 탈출을 눌렀다. 그러자 세부 내용이 나타났다.
왕국 탈출.
왕국을 탈출하시오.
보상-생존.
수락하시겠습니까?
진이 알고 있는 게임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좀 아쉽네.’
아무리 생각해도 상태창과 스킬창이 없는 건 정말 아쉬웠다.
‘그것만 있었으면, 깽판 치고 다닐 수 있었을 텐데…….’
물론, 그런 생각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힘이 있다면, 지식의 해방이 진즉 세상을 멸망시켰을 테니까.
‘이 퀘스트를 내가 할 수 있는 건가?’
진이 손을 옮겨 수락 버튼을 누르자, 눈앞에 변화가 생겼다.
왕국 탈출-진행 중.
‘흐음.’
진은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구체적으로 탈출할 방법을 알려주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지 않아? 애초에 지금 탈출이 가능하긴 해?]
‘호오. 이쪽에서 방법을 못 찾았다?’
[그쪽이 더 맞지 않겠어? 빅 브라더는 계속 진행 중이니까.]
‘그건 천천히 확인해 보자고.’
왕국을 진짜로 탈출했을 때, 진짜 변화가 생길 터.
그때 확인해도 늦지 않는다.
‘그럼 이거 빼도 되는 거지?’
[어. 퀘스트를 볼 때가 아니면 빼고 있어도 돼.]
‘그럼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찝찝했어.’
진은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뺐다. 그러자 눈앞에 있던 글자들이 전부 사라졌다.
‘일단, 이건 현자 네가 보관하고 있어.’
-알겠어.
그렇게 녀석에게 반지를 넘겨준 뒤, 진이 입을 열었다.
‘이러면 왕국은 끝이지?’
-어. 끝이야.
‘이제부터는 왕국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소린데…….’
벌써 귀찮음이 슬금슬금 밀려왔다.
‘일단 정보부터 모을까? 정보를 모아야 효율적으로 움직이지.’
그러니 일단 정보를 모은다는 핑계로 푹 쉬는 게 정답이었다.
물론, 그것을 티를 낼 순 없었다.
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각국 정보는 예전부터 조금씩 모으고 있었어. 걱정 안 해도 돼.]
물론, 그런 진의 개소리는 통하지 않았다.
[왜? 정보 모으는 동안 쉬려고 했어?]
‘무슨 소리야. 효율적으로 움직이자는 소리지.’
[그럼, 슬슬 올라가서 자료 확인하자. 왕국 밖의 정보를 확인해야지.]
‘……그래.’
진은 시무룩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진의 등 뒤로 로메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밖으로 나온 진은 곧장 타국의 정보를 확인했다.
귀찮고 지루한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시작부터 충격적이었다.
‘이거 좀 이상한데?’
왕국을 제외한 다른 곳은 평화로웠다. 그야말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왕국에선 지식의 해방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타 왕국은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심지어 왕국에선 다른 왕국으로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지식의 해방이란 녀석들이 위협적이며, 위험하다는 서신이었다.
한데, 그 서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위험을 알려줬는데도 무시하는 상황.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이미 먹힌 거야. 귀족들이 지식의 해방 쪽에 회유돼서 그쪽 편을 든 거지.]
‘다른 나라 왕들이 멍청이도 아닌데?’
[정보가 없으면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거야. 귀족들이 그 정보를 전부 쳐낸 게 확실해.]
산 넘어 산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위험하다고 듣지 않은 곳은 이미 썩을 데로 썩은 거다?’
[정답이야.]
이러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이젠 타국에 가서 활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진에겐 타국에서도 먹히는 신분이 있다는 점이었다.
‘성자인 게 다행이네.’
성자는 비록 종교가 다른 곳일지라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그나마 지식의 해방을 경계하는 곳?
아니면 아예 지식의 해방에게 삼켜진 곳?
어떤 곳을 먼저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슬슬 귀찮음의 임계치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냥 대륙 정복할까?’
핵 쏴서 싹 밀어 버리는 게 훨씬 빨리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워워. 진정해. 무작정 전부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 녀석 기억하지? 네가 지식의 해방 후계자인 줄 아는 놈. 걔가 왕국 밖으로 나가서 정보를 모으고 있어.]
로메른은 진의 말이 농담이 아닌 걸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은 곧장 타협안을 가져왔다.
‘……그래?’
진이 관심을 보이자, 현자 또한 로메른의 말을 거들었다.
-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인 거 기억하지? 수뇌부를 쓸어버리고, 앞으로 수뇌부가 생기지 못하게 만드는 거. 딱 이 두 가지만 해도 일단은 큰 위험은 끝이야.
로메른이 있어서 현자는 애써 말을 바꿔 말했지만, 녀석의 말은 간단했다.
지구에서 끌려온 이들을 쓸어버리고, 다신 지구에서 소환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알겠어.’
현자의 말대로 일단 저 두 가지만 끝내 놓으면, 남은 지식의 해방은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다.
[좀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네가 말하면 진짜 될 거 같으니까.]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내가 뭐 진짜 하겠다고 한 소리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아까 네 표정은 진심이었는데?]
그렇게 로메른과 진이 투덕거리고 있을 때.
“보스. 왕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새로운 직위를 받으러 잠깐 들리시랍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소식이 들려왔다.
* * *
대공 취임식.
앞에 ‘대공’ 칭호만 보면, 국가적인 행사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각 도시엔 왕명으로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한데, 그런 밖의 상황과는 달리 절차는 매우 간략했다. 그저 왕궁에 도착해 배지를 하나 받은 순간 끝이었다.
“이제 자네는 대공일세. 그대가 사치스럽고 번거로운 걸 싫어하니 최대한 간략히 한 것일세.”
왕의 생각은 진의 취향에 정확히 일치했다.
쓸데없는 파티나 번거로운 과정은 시간만 아까울 뿐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해먹에 누워 쉬는 게 최고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하. 그대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좋군.”
왕의 표정엔 호의가 가득했다.
그가 이렇게 움직인 이유는 진도 대충 예상이 됐다.
‘성자’를 왕국의 대공으로 삼아 왕국에 귀속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도 이 감투는 나쁘지 않아.’
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왕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왕국의 모든 어둠을 걷어냈지만, 내가 보기엔 이게 끝이 아닐 것 같군.”
“맞습니다. 세상엔 여전히 지식의 해방이 암약하고 있습니다.”
진의 말을 들은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대공의 직을 내린 걸세. 그대가 왕국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대공의 직위는 ‘성자’의 지위보다 더 큰 힘이 되어줄 걸세.”
물론, 그렇게 진이 ‘대공’의 이름으로 활동하면 왕국의 힘이 된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 할 필요는 없었다. 상부상조라고 생각하면 나쁠 건 없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그대가 이 왕국에 입힌 은혜를 생각하면 대공 자리로도 부족할 걸세.”
“아닙니다.”
“아니긴…… 그대가 아니었다면, 다른 왕국과 같은 꼴이 났을 걸세.”
“…….”
“다른 왕국은 이미 대부분 먹힌 상태일세. 왕은 힘을 잃고, 귀족들에 의해 눈과 귀가 멀었지.”
“알고 계셨습니까?”
“그대도 이미 조사한 모양이군.”
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곳은 아직 회생할 수 있지만, 이미 회생이 불가한 곳이 몇 군데나 있다네.”
왕이 손짓하자 뒤에 기립하고 있던 근위 기사가 움직였다.
그는 커다란 지도를 가져왔다. 그곳엔 다른 국가가 검정색과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빨간색은 아직 회생이 가능한 곳일세. 그곳은 내가 도움을 줄 생각일세.”
“왕께서 말씀이십니까?”
“이미 몇 곳과는 비밀스럽게 연락하고 있다네.”
왕은 왕이었다.
진이 다음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도 그다음을 보고 있었다.
“우린 지식의 해방에서 벗어났지만, 주위가 모두 무너진다면 우리도 고립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걸세.”
그의 말대로였다.
“내가 하는 일은 세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왕국이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진을 빤히 바라봤다.
“내 이유가 너무 세속적이어서 그대가 실망한 게 아닌가 걱정이군.”
시험?
아니. 진은 이제 왕에게 시험을 받을 급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왕국을 전복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게 진의 위치였으니까.
저건 시험이 아니었다.
‘함께 가자는 거네.’
오히려 도박을 한 것이다.
왕은 지식의 해방이 세상에 얼마나 뿌리 깊게 내려 있는지 진만큼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길이 이유는 다르지만, 진과 같다는 것을 모두 보여 준 것이다.
대공의 직위 또한 진과 함께하기 위해 바치는 뇌물이나 다름없었다.
“아닙니다. 저 또한 세상을 구하는 이유가 따듯한 햇볕을 쬐며 유유자적 살고 싶어서입니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이유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같은 길을 걸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르실 겁니다.”
왕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다행이군. 다행이야.”
왕은 일생일대의 도박에 성공했고, 진은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
“왕께서 세운 계획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왕좌에서 일어나 지도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내려왔다. 손수 지도를 짚어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까 말했듯 빨간색으로 칠해진 곳들은 이미 연락하고, 내부를 천천히 바꾸는 중이라네.”
“지원은 필요 없으십니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네. 교단의 지원을 좀 받았으면 하는군. 이곳과 이곳은 같은 종교를 믿으니 교단이 지원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걸세.”
이 양반, 보면 볼수록 괜찮은 양반이었다.
대륙에서 빨간색으로 칠해진 곳을 제외하면 2/3의 지역이 사라진다. 일을 2/3나 줄여 준 것이다!
“교단에 바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진짜 문제는 이 지역들일세.”
그는 곧장 검은색으로 칠해진 곳들을 가리켰다.
“이곳의 왕들은 이미 끝장이 난 곳일세. 회생 불가한 지역. 내 영향력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지.”
한마디로 이쪽은 진이 맡아 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럼, 검은색 지역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지도를 받아 가도 되겠습니까?”
“가져가게. 그대에게 주기 위해 만든 지도이니.”
대공의 직위와 귀찮음이 확 줄어든 덕분에, 진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대가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 다행일세. 앞으로 잘 부탁하네.”
“아닙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은 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진은 그 손을 잡았다.
왕과 진. 둘 모두가 만족할 만한 대화였다.
‘짬 때리기도 전에 이미 짬 때려져 있었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