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네가 손대면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대체 어떤 훈수를 해 줬길래 얘가 저렇게 변해!?]
로메른이 소리쳤지만, 진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거야 나야 모르지.’
[뭐?]
‘그냥 구경이나 하면서 대충 훈수했는데?’
[……의도치 않은 일이다?]
‘개똥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더라고. 변화를 유도하긴 했는데, 이렇게 격하게 변할 줄은 나도 몰랐어.’
로메른이 이렇게나 소란스럽게 구는 이유는 신녀가 단숨에 국왕파의 거두가 됐기 때문이다.
귀족들 사이에 이런 말이 나돌 정도로.
-그녀가 천사의 얼굴로 자비를 내밀 때 그 받아들여라. 네가 거부한다면 넌 괴물을 마주할 것이다.
그녀는 완벽한 ‘정치 괴물’이 되어 버렸다.
‘나쁠 건 없지 않아?’
[……그건 그렇긴 한데. 이러면 적이 생기지 않겠어?]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을걸?’
[하긴, 왕궁 쪽에서 온 정보만 봐도 걱정할 필요 없을 거 같네.]
결과적으로 모두 괜찮았다.
한데, 로메른은 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또 뭐.’
[그냥 네가 손대면 다 조금씩 이상해지는 거 같아서.]
‘……기분 탓이야. 내가 톡 건드렸다고, 확 바뀌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게 맞긴 한데…… 네가 톡 건드리면 대부분 이상해지던데?]
‘어허. 일 열심히 하고 온 사람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와. 열받네. 결과적으로 좋아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로메른은 정령인 주제에 속이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렸다.
‘그나저나 마그마 그 녀석은 잘하고 있어?’
진은 해먹에 편하게 누워 로메른에게 질문을 던졌다.
[……쓸데없이 잘하고 있어. 대체 녀석한테 뭘 주고 갔길래 그래?]
특별한 걸 준 건 아니었다. 그저, 지구의 영업 비법이 적힌 양피지를 건네줬을 뿐이다.
‘약간의 영업 비법?’
[……효과가 좋나 보던데? 골드가 들어오는 양이 장난이 아니야.]
‘그래?’
사람이 참 간사하다.
로메른과 약초를 팔아 몇백 골드를 벌었을 때는 그렇게 기뻤는데,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돈을 버는 지금은 의외로 덤덤했다.
물론, 로메른은 덤덤하지 못했다.
[말 잘했다. 드워프들도 문제가 있던데?]
‘무슨 문제?’
[……골드를 너무 좋아해.]
‘뭐?’
자본주의 드워프?
[말했지? 네가 손대면 다들 이상해지는 거 같다고, 지금은 장인이 아니라 반쯤은 장사꾼이 다 됐다니까?]
‘…….’
여기서 당황하면 안 된다.
진은 담담히 말했다.
‘원래 기술 발전은 돈이 돼야 빠르게 발전하는 법이야. 학문과 예술이 돈을 벌지 못하는데 발전할 수 있겠어?’
진은 그렇게 되물은 뒤.
‘언제까지 장인들이 배고파야 돼? 예술과 기술은 배고픔 속에서 피어나는 게 아니야! 쏟아지는 금에서 피어나는 거지!’
[……됐다. 말을 말자. 엄밀히 따지면 틀린 이야기도 아니니까.]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하 연구소로 날아갔다.
진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육포를 꺼내 씹었다.
‘아. 날씨 좋다!’
햇빛이 참으로 따사로웠다.
* * *
왕국의 어딘가.
한 남자가 동굴 속에서 양피지를 보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옆에 쌓인 수많은 양피지 중, 원하는 걸 찾아 확인했다.
‘성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성자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전설 속의 ‘드래곤 피어’를 느꼈음에도 그의 기억에 남은 건 성자의 표정이었다.
자신을 한심하고 딱하게 보는 그 시선.
‘대체 그는 무엇을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필사적으로 찾았다. 자신의 권한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정보들을 이를 잡듯이 뒤졌다.
정보가 쌓일수록 새로운 가정들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가정 중에 가장 확률이 높은 하나가 선정했다.
‘이건 너무 말이 되지 않는데…….’
가장 마지막까지 선정됐음에도, 여전히 그의 손에 들린 ‘가정’. 그 내용은 그의 말대로 말이 되지 않았다.
-지식의 해방의 발호로 가장 이득을 보는 건 누구인가?
이 간단한 물음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교단과 성자.
지식의 해방 때문에 가장 이득을 많이 본 것이 바로, 성자와 교단이었다.
‘교단은 여태까지 추진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호 이후에 빠르게 해결하고 있다.’
지식의 해방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고, 야만족을 왕국민으로 등록했다.
성자의 후원자로 알려진 추기경은 귀족들로부터 전염병 치료에 사용하라고 막대한 후원금을 받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건 교단이 꾸민 자작극이 확실하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사제들이 부패했다면, 타락하고 세속적인 이들이라면 조그만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사제들을 생각하면 그럴 리 없다.’
그런데도, 이 가정이 마지막까지 남은 이유는 정말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성자는 사제 출신이 아니다.’
남작가의 막내로 시작해, 부제를 거쳐 성자가 된 인물. 어렸을 때부터 교단에서 커 온 이들과는 다르다.
성자라면 가능성이 있다.
그런 그의 가정이 맞아떨어진다면,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그렇다면, 성자는 지식의 해방에 속해 있다는 것인가? 우리 쪽에서 심어 넣은 인물이란 말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성자가 대화 도중에 흘렸던 ‘차선책’이 떠올랐다.
교단을 감독관으로 두는 부분적 지식의 해방.
만약 이게 이뤄진다면?
지식의 해방의 목적은 완벽하진 않지만, 달성된다.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진다.
‘……이게 진실인가.’
그 진실을 깨닫자, 그는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지식의 해방은 필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악을 자처하며, 세상에 지식의 해방의 필요성을 울부짖는 광대일 뿐이었다.
‘살아남는 건 성자뿐인가.’
지식의 해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 ‘성자’밖에 없다.
대체 그가 누구길래 그런 권한을 가진 것일까?
그의 머릿속에 지식의 해방에 처음 입문할 때 들었던, 교육이 떠올랐다.
금지된 모든 지식의 소유자.
‘선지자.’
그들이 가진 지식의 원천이며, 지식의 해방 수뇌.
‘……설마 선지자님?’
아니.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해답은 금세 나오게 된다.
‘후계자시구나. 모든 금지된 지식을 물려받으신 선지자님의 후계자였어!’
그제야, 앞뒤가 맞기 시작한다.
신이 지식을 준 게 아니었다.
그저 물려받았을 뿐이다.
그러니 금지된 지식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던 것이다.
‘……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진실은 멋지지 않았다.
지독하게 현실적이며 차가웠다.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죽음을 향해 달려갈 뿐이니까.
‘아니지. 오히려 좋다.’
어차피 도망친 인생이다.
모든 걸 포기하고, 지식의 해방으로 도망친 겁쟁이일 뿐이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걸 불태울 것이다.
광대가 되어 세상에 지식의 해방의 필요성을 외칠 것이다!
‘지식의 해방을 위해!’
선지자의 후계자께서 모든 것을 양도받으실 그 날까지!
그때, 그의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진실을 마주했군요.>
후계자께서 자신에게 말을 거셨다.
<잘했습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아이의 칭찬이었는데도, 그는 어쩐지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 * *
한편, 해먹에 누워 있던 진은 조금 황당한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몰라. 아무리 봐도 미친 거 같은데?]
한 명을 풀어주는데, 진과 로메른이 그냥 보냈을 리 없었다. 그의 몸엔 나름의 조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일종의 ‘위치 추적기’였고, 움직이는 ‘도청 장치’이며, ‘카메라’였다.
[처음에 진실을 마주한다고 동굴에 처박혔을 땐, 아찔했는데…….]
‘아니. 어떻게 이딴 결과를 내놓는데?’
[검증 방식과 추론 과정을 확인해보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뭐, 약간의 주관적 해석이 섞이긴 했는데 그건 당연한 거고.]
그 말을 들은 진은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식의 해방의 후계자인 게 말이 안 되진 않는다고?’
[어. 심지어 내가 추론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니까.]
‘……진짜로? 내가?’
[오히려 진 너여야 말이 돼. 지식의 해방을 등쳐 먹는 건 네가 유일하니까.]
아. 이게 열심히 일한 대가인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후계자로 의심받는 건 선 넘었지.
‘……다른 곳에서 이렇게 해석할 확률은?’
[없어.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저런 추론 결과가 나온 거니까. 저 녀석과 대화만 안 했으면, 이런 결과도 안 나왔어.]
‘아 그건 다행이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앞으론 입조심 좀 해.]
‘이렇게 좋은 결과를 만들었는데?’
[……아. 그건 또 그렇네.]
어쨌든 지금 상황이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뭐랄까, 의도치 않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스파이를 구했다.
심지어 저 녀석은 기쁜 마음으로 일해 줄 테니, 진을 배신할 일도 없었다.
‘이러면 쭉 써먹을 수 있는 건가?’
[어. 한번 써먹으면 다행이었는데, 이렇게 됐으니 쭉 써먹을 수 있어.]
아무리 로메른이 마법을 걸었다고 해도, 그게 평생 유지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들키지도 않고, 성능은 확실한데, 평생 유지된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녀석이 감사의 눈물을 뚝뚝 흘릴 때, 얼른 어르고 달래서 녀석의 몸을 초능력으로 뚫어 놨다.
VR 접속 가능하고, 텔레파시 가능하다. 겸사겸사 녀석의 몸에 걸린 특별한 ‘조치’에 에너지도 불어 넣었다.
‘깜짝 놀란 거만 빼면, 나쁠 게 없네.’
[뭐, 그것도 나름 재밌지 않았어? 와. 어떻게 널 후계자라고 생각했지?]
로메른은 다시 생각해도 웃긴 모양인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평소에 최선을 다해서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거야.’
[……진짜 넌 뻔뻔한 녀석이야.]
‘그래서, 데뷔전 하러 안 갈 거야?’
[아니. 그건 못 참지! 무조건 갈 거야!]
스파이가 생긴 보람은 벌써 있었다. 녀석은 물어보지도 않은 지식의 해방 쪽 계획을 나불나불 알려주었으니까.
[그럼, 준비 완벽하게 끝내 놓을게!]
로메른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이 말한 데뷔전은 바로, 본 드래곤이 세상에 선보이는 날이었으니까.
* * *
지식의 해방은 멍청한 녀석들이 아니다.
진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세상 속에 숨은 흑막이었으며, 은밀히 멸망을 진행하던 이들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에게 최고의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들이 도와줄 대상이 세상에 가득했다.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일반 평민이 아닌, 대부분이 귀족이었다.
“그저 조금만 모른 척해주시면 됩니다. 저 가증스러운 야만인들에게 복수가 될 겁니다.”
계획을 만들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건 그들이 제일 잘하는 일이었기에.
“아니면, 가만히 계실 겁니까? 화살 배송이니 뭐니, 천박한 것이 생겨, 모든 것을 빼앗기셨는데요?”
“…….”
“예.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언제 모른척하셔야 하는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흠!”
귀족의 뻔뻔함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모두 ‘후계자’님을 위한 작업이었기에.
지식의 해방을 위해 자신은 목숨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