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일하기 싫어!
마왕의 조금 전 보여 준 힘은 참 편리한 힘처럼 보인다.
피라미드 안으로 들여보내기만 하면, 자신의 원하는 신을 보고 신도가 되고 마니까.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편한 힘이 있을 리 없다. 애초에 그런 힘이 있다면 ‘진’이 먼저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왕은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한 것일까?
그 해답은…….
‘……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로메른이 가지고 있다.
[이게 바로 제약(制約)의 힘이야. 여러 가지를 제약했지만, 그중에서도…….]
설명이 길게 이어지려고 하는 걸, 진이 끊어 냈다.
‘그러니까 소수 민족한테만 통한다는 거지?’
[그렇지. 그 외에도 다양한 제약이 걸려 있어. 물리력이나 다른 걸 보는 것도 불가능하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신’의 모습만 볼 수 있지.]
적용 대상과 용도가 한정된 힘.
그런 제약을 통해 힘을 증폭시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적을 발휘한 것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조금 기운이 빠지는 힘이지만…… 우리한테는 딱 맞아.’
[맞아. 소수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소수 민족 문제는 이제 끝났다고 봐도 됐다.
심지어 이 ‘제약’의 힘의 장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마왕의 힘은 더 강해질 거야.]
‘……진짜로 가능한 거야?’
[인간의 숭배는 일종의 힘이야.]
‘뭔가 감이 안 오는데?’
[쉽게 생각해. 사제가 신을 숭배해서 신성력을 얻는 것과 비슷하니까.]
‘숭배를 받는 것만으로도 힘이 생긴다는 거야?’
[어. 그렇다고 숭배받아서 힘 키울 생각은 하지 말고. 마왕이 개념 생명체인 악마니까 가능한 일이야.]
‘그럼 시간이 지나면 마왕은 마신이 되는 거야?’
[적어도 피라미드 안에서는 그에 가까운 힘을 가지겠지.]
이렇게 듣고 보니 굉장히 위험한 무언가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상관없나.’
로메른이 저런 엄청난 존재를 그냥 내버려 뒀을 리 없다. 이미 계약서를 통해 마왕의 행동에 제약을 둔 상태였다.
[계약서를 너무 믿지 말고. 1000년 이상이 지나면, 계약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간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그때는 진짜 마신이 될지도 모르기도 하고.]
‘1000년 뒤?’
[어. 빠르면 500년 정도만 지나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미래는 후손들에게 맡기는 거야.’
[하긴, 그것도 그렇네.]
‘미래의 일은 미래에 맡기자고.’
솔직히 당장의 세계 멸망만으로도 충분히 귀찮으니까.
진은 뒷말을 애써 삼켰다.
[허허. 그대는 시니컬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사람이란 존재를 믿는군. 그대의 입에서 ‘인간 찬가’가 흘러나올 줄이야.]
검성은 쓸데없는 오해를 했지만, 딱 좋은 핑계였다.
‘……난 미래의 인간들을 믿어.’
날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고.
물론, 진실을 알고 있는 정령도 있었다. 로메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쟤 표정 봐 봐. 미래에 그 뭐더라? 짬? 그거 한 거라니까.]
[아닐세. 인간의 대한 믿음! 그 자체가 느껴졌네. 그의 순수성을 훼손치 말게!]
정령들의 투덕거림을 들으며 진은 이면 세계를 벗어났다.
* * *
완벽한 사전 작업을 끝내고, 이면 세계에서 나왔을 때.
로메른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씨앗은 뿌려두었으니.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끝이야.]
조금만 더?
아니. 이만큼이나 일했는데!?
일은 끝이 없었다.
참고 참던 진이 결국 터졌다.
“못해!”
[……뭐?]
“배 째!”
[진짜?]
로메른은 마나의 칼날을 뿜어내며 물었다.
“아, 아니! 기다려봐! 쫌!”
진이 황급하게 녀석을 멈춰 세웠다.
“솔직히 너무 빡세잖아. 무슨 일이 끝이 없어? 나머지는 그냥 놔두면 끝 아니야?”
[이번 일은 아니야. 변수가 너무 많아. 이건 네가 직접 가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완벽하게 끝내야 하니까.]
로메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이번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란 건 진도 잘 알고 있었다.
“내 말 들어 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의 귀찮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있을 텐데, 매번 내가 움직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니야?”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로메른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솔직히 내가 왕국에 간다고 뭐가 달라져? 여태까지 쌓은 이미지 때문에 어차피 정치적으론 못 움직이잖아.”
[그건 그렇지.]
로메른이 조금씩 넘어오는 거 같았…….
[대신, 네가 있는 것만으로도 신녀에게 힘이 실릴 거야.]
어림도 없었다. 녀석은 정론으로 진의 말을 격파했다.
하지만, 진은 현재 귀찮음이 초과해 두뇌가 풀가동인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쉽사리 지지 않는다.
“그 행동 자체가 정치적인 움직임 아니야? 게다가 날 보내려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진짜 눈치 하나는 귀신같네. 맞아. 변수에 대처하는 건, 네가 일가견이 있잖아.]
“결국 내 머리가 필요한 거지? 신녀 옆에서 훈수해 주라는 거잖아.”
[……굳이 따지자면 그 말이 맞아.]
여기가 승부처다.
해먹에 누워 있느냐. 아니면, 왕궁에 가서 개고생하느냐가 바로 지금 결정된다.
‘일하기 싫어!’
그 순간, 진의 머릿속에 엘프의 초능력 하나가 떠올랐다. 절박하던 진의 표정이 평온하게 변했다.
“로메른. 너도 왕궁 가기 싫잖아. 미니 드래곤 보강도 해야 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니까.]
“알아. 나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야. 솔직히 내가 할 일 안 하고 놀진 않잖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애초에 네가 원하는 인생과는 거리가 머니까.]
“그러니까 서로 조금씩 양보하자. 일은 할게. 대신 누워서 할게.”
잠시 훈훈하던 분위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로메른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아. 일은 해 주실 건데, 누워서 일하시는구나? 그런 해결책이 있는데 내가 몰랐네. 우리 진 님께서 누워서 일하고 싶으신데, 내가 그걸 몰랐어!]
로메른의 눈이 반쯤 돌아간 거 같았다.
“아니. 일단 들어 봐. 현실성 없으면 바로 출발할 테니까.”
[후우.]
로메른은 숨을 몰아쉬며 애써 분노를 삼켰다.
“엘프의 초능력 중에 텔레파시랑 시야 공유. 두 가지를 이용하면 원거리에서 훈수할 수 있지 않아?”
[…….]
녀석은 아무런 말도 없이 조금 고민하더니.
[……되겠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치? 결국 변수에 대응할 훈수가 필요한 거면, 원거리로 샤삭! 해 주면 끝이지.”
[…….]
로메른은 대답하지 않고, 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좋아. 일단, 실험해 보고 성공하면 그대로 진행하고, 실패하면 바로 출발한다.]
“좋지!”
진이 연결을 준비하는 동안,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짜 이걸 똑똑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게으름만 없었으면 세계도 정복했을 놈이…… 아니지, 게을러서 이런 발상이 가능한 건가?]
로메른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었다.
* * *
진이 보낸 서신들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신녀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나의 아이야.>
머릿속에서 들리는 ‘신’의 목소리.
깜짝 놀랐던 것도 잠시.
‘나도 참.’
그녀는 그게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답답할 때면, 언제나 신님을 떠올렸다. 지치고 힘드니, 환청이라도 들린 거라 생각했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그때.
<제대로 들은 거 맞단다. 아이야.>
다시 한번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신이시여?”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으로 생각해도 들리니. 겉으로 이야기할 필요 없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했던 생각을 신께서 읽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까지는 읽지 못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대답했다. 어쨌든 조금은 읽혔단 소리였으니까.
진의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아이야. 어깨가 많이 무겁겠구나.>
‘……아닙니다.’
<정말인 게냐?>
진의 물음에 그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무거웠다.
<안다. 네 결정에 모든 소수 민족의 운명이 달렸는데, 어찌 무겁지 않을 수 있겠느냐.>
신께서도 그걸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널 도와주기 위해 내가 온 것이란다. 내 아이가 힘들어하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신이시여…….’
신의 배려에, 자비에 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힘을 받아들이거라.>
곧이어 몸에 차오르는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힘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기묘한 감각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신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제 네가 보는 걸 내가 볼 수 있고, 네가 느끼는 걸 내가 느낄 수 있단다.>
자비로운 신께서.
<어깨를 짓누르는 그 책임감을 내가 거들어 주마. 함께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강림하셨다.
<울지 말거라. 고생 많았다.>
정말 기쁘고 행복한데,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나의 아이를 괴롭힌 게 누구냐. 내가 혼내 주마.>
자비롭고 따듯한 그날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울다 웃으면. 흠! 다행이구나.>
‘예?’
<아니란다.>
물론, 그녀가 알아듣지 못한 말도 있었지만.
* * *
진은 볼을 긁적였다.
‘하긴 업무량이 너무 많긴 했지.’
‘알아서 해 주겠지’란 생각만 했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면 일해야 하니 애써 모른 척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로메른의 잔소리 덕에 시작한 일이지만.
‘적어도 늦진 않은 거 같네.’
진이 처음 신녀에게 말을 걸었을 땐, 그녀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내가 와 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진이 온 걸 깨닫자마자 그녀는 언제 위태로웠냐는 듯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은 신녀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의외로 재밌단 말이야.’
마치 VR 기계를 쓰고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신을 연기하는 게 좀 오그라들어서 그렇지.’
그것만 제외하면 나쁠 게 전혀 없었다.
-신이시여.
그때, 신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아이야. 난 여기 있단다.>
-지혜를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맘껏 물어보아라. 난 그러려고 네게 온 것이니.>
그러자, 신녀는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면 연합을 세우는 건, 국왕파와 귀족파 모두가 동의하는 일입니다. 다만, 그 연합이 추진하는 일이 문제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일지는 쉽게 예상이 됐다.
<이권이 문제로구나.>
-그렇습니다. 귀족파와 국왕파를 조율해 타협안을 찾으려고 해 보았지만, 저의 힘으로도 쉽지 않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존 물류의 이권을 쥐고 있는 귀족파와 그런 귀족파의 세력이 커지지 않길 바라는 국왕파.
둘은 평행선을 달리는 이들이다.
서로를 견제하며 이권을 뺏고 빼앗기는 관계.
그런 두 세력을 완벽하게 조율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네가 사죄할 일이 아니란다. 네 힘으로 되지 않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그걸 몰랐을까?
아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시도한 이유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이면 연합에 필연적으로 적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선택에 너무 큰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그녀는 불가능한 일을 계속해서 고민한 것이다.
<네 고민을 해결해 주마.>
그러니 진이 여기서 할 일은 간단했다.
<국왕파로 하자꾸나.>
대신 선택해 주면 될 일이다.
<귀족파를 제어할 방법을 내가 가지고 있단다.>
로메른이 꼭 가야 한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 이건, 그녀 혼자서 처리하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신이시여!
<나만 믿어라.>
-믿습니다!
<특별한 방법을 전수해 줄 테니.>
지금 가르쳐야 나중에 알아서 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아이들은 못된 걸 빠르게 배우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