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충성충성
진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세계의 운명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왔지만, 결국 그건 인간들이 사는 이쪽 세계의 운명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면 세계에서도 운명이란 힘을 쓸 수 있을까?
물론, 그 정답을 확인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이면 세계로 데려가기도 전에, 녀석의 저항이 시작됐다. 그 저항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미친…… 저주야!]
마치 강제로 역소환되는 것처럼 로메른의 모습이 일순 흐릿해졌다.
이 상황에서 로메른과 정령들이 사라진다?
그럼 끝이었다.
‘야! 괜찮아!?’
진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한데, 그런 불안정한 모습도 잠시. 이내 정령들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쓰읍. 괜찮아.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되네.]
‘진짜 괜찮은 거야?’
[어. 괜찮다니까. 원래라면 역소환이 돼야 했었는데, 다행히 너한테 그게 있잖아.]
로메른은 그렇게 말하며 심장을 가리켰다.
그곳엔 정령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메른표 특급 ‘써클’이 있었다.
‘깜짝 놀랐잖아.’
[내가 더 놀랐어. 뭐 이딴 저주가 다 있어? 애초에 이걸 저주라고 할 수 있나?]
‘대체 뭔데?’
[마나로 만들어진 모든 체계를 붕괴시키고 있어. 아니, 혼선이라고 해야 하나? 와. 처음으로 역소환당할 뻔했네.]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할 리가 없지! 이건 세상이 우리를 방해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은 괜찮은 거야?’
[어. 써클 쪽 마나로 억지로 유지하고 있어. 우리가 아니었으면 역 소환됐을걸?]
‘좋아.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빠르게 이동하자. 일단 괜찮다는 거지?’
[어. 저항이 더 거세지기 전에 도망치자.]
고작해야 아이를 이면 세계로 이동시키는 일일 뿐이었는데, 세상이 나서서 진을 방해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소름이 끼쳤다.
만약 이 아이가 커서 이 힘의 편린이라도 휘두르게 된다면?
성녀의 대적자라 불리는 ‘마녀’가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도망칠 수는 있는 거지?’
[어. 가능할 거 같아. 이건 마나와 마법에 간섭해서 붕괴시킬 뿐이야.]
진이 공간이동으로 사용하는 힘은 ‘초능력’이다. 마나의 체계를 따르는 힘도 아니었다.
그걸 세상의 운명 또한 느꼈는지 다른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쿠궁. 쿠궁.
마치 심장이 박동하듯,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마나는 시커먼 연기로 화하더니, 끈적한 무언가로 변화했다.
저게 무엇인지는 진도 알 수 있었다.
‘저주’.
진을 멈추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가 발동하고 있었다.
[그럼 간다!]
로메른은 곧장 출발하려고 했지만, 진은 뭔가 찝찝함을 느꼈다.
저 저주가 이곳에서 터지면?
한쪽에 쓰러져 있는 산모는?
싸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 떠올랐다.
‘악당은 비극과 함께 태어난다.’
[갑자기 뭔 소리야?]
‘산모 챙겨!’
[두 명이나 데려가자고? 몸에 무리가 갈 거야.]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필요해! 당장 챙겨!’
그와 동시에 끈적한 저주가 집안에서 폭발하듯 터졌다.
집 전체에 저주가 쏟아졌다.
원래라면 도망치는 게 맞다. 산모를 구하기 위해 무리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다행히 정령 중에 멍청이들이 있었다.
[허허. 그대의 선의, 내가 도와주겠네.]
검성이 나서고.
-소환되고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부탁이야. 나도 도와줄게. 검성.
현자가 움직였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도 움직였다.
[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이유가 있을 거예요. 둘을 제가 지원할게요.]
[아. 난 모르겠다. 공간이동 바로 할 거니까. 구해서 올 거면 알아서 따라붙어!]
검성의 힘이 저주를 가르고, 현자는 마법 대신 마나 그 차제를 움직여 산모를 데려왔다.
저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젠 노골적으로 산모를 노리고, 산모를 중심으로 저주가 쏟아졌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산모 위로 성녀가 사용한 핏빛 보호막이 감싸져 있었다.
저주에 핏빛 보호막이 녹아내리고, 검성이 열었던 길은 어느새 저주로 가득 찼다.
이내로는 저주의 파도에 모두가 휩쓸릴만한 상황.
그때, 로메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진과 산모, 알 속의 아이가 집 안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집안을 가득 채웠던 저주는 마치 연기처럼 전부 사라졌다.
진은 세상의 운명에게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 * *
진이 눈을 떴을 땐.
[육체 회복 중이니까. 움직이지 마.]
로메른의 불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성공한 거야?’
[당연하지. 산모랑 아이 둘 다 무사해.]
진이 성공을 만끽하기도 전에, 로메른은 질문을 던졌다.
[굳이 무리한 이유가 뭐야?]
‘악당은 비극과 함께 태어난다고 아까 말했잖아.’
[산모가 죽으면 무조건 마녀가 된다고 판단한 거야?]
‘어. 아까 저주가 산모한테 쏟아지는 거 봤지?’
[……좋아. 이번엔 합리적 판단으로 생각할게. 대신 다음부터 웬만하면 무리하지 마. 우린 네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니까.]
녀석의 말이 맞았다.
진의 생각이 맞긴 했지만, 굳이 이런 리스크를 짊어질 만한 일이 아니었다.
죽으면 지금까지 한 일이 아무런 소용없게 된다.
‘인정하게. 이번엔 나도 경솔했어.’
[됐어. 네 생각이 맞긴 했잖아. 게다가…….]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을 바라봤다. 녀석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성녀’였다.
[저 녀석도 만족스러워하는 거 같으니. 더 열심히 일해 주겠지. 손익을 따지면 네 결정이 맞았어.]
‘앞으론 괜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게.’
[좋아.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
‘어. 안 그래도 괜한 분위기에 오그라들고 있었어. 그만하자.’
이런 대화는 이걸로 끝났어야 했는데.
[허허. 이제야 좀 동료다운 대화를 하는구먼.]
-맞아. 옛날 생각나고 좋네.
[그렇게 함께 성장해 나가는 거 아니겠나?]
-맞아. 우리의 여행도 그랬…….
아. 다 꺼져 줬으면 좋겠다.
진과 로메른은 둘을 무시하고, 진짜 본론으로 돌아왔다.
‘일단, 집주인의 허락부터 받아야겠지?’
[당연하지. 이쪽에 관해선 마왕이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어.]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보고 있지? 나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과 함께 허공에서 거대한 눈이 나타났다.
<말해라.>
세계의 지배자, 마왕.
그가 등장했다.
“이거 알아?”
진은 아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그가 알고 있을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양막이 통째로 출산된 아이군.>
놀랍게도 그는 알고 있었다.
“알아!?”
<안다. 우리와 연관이 깊은 인간이니 당연하다. 정령사가 일반적인 정령을 다뤘다면, 마녀가 우리를 다뤘으니까.>
진은 곧장 로메른을 바라봤다.
[우리도 처음 듣는 이야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 정령들은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으니까.
“간략하게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 마녀라는 존재들이 우리는 좀 낯설어서.”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 우리가 없으면, 마녀는 그저 불길한 인간일 뿐이니.>
마왕은 천천히 마녀에 관해 설명했다.
<마녀는 부정의 존재로 태어난다. 각기 그 방법은 다르지만, 양막째로 태어난 모습이 그 방법의 하나다.>
“……하긴, 좀 불길해 보이긴 하네. 징그럽기도 하고.”
<그 말대로다. 인간들은 저런 모습으로 태어난 이를 불길하다 부르고, 부정하다고 생각한다.>
“건강엔 문제가 없는 거야?”
<없다. 그저 양막째 출산이 됐을 뿐, 일반적인 아이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하긴, 그랬으니 로메른이 산모 몸에 들어가 확인했을 때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저 모습으로 태어난 게 중요하다는 뜻이네?”
<그렇다. 부정한 모습으로 태어나, 모든 악의를 받아들이는 존재. 그게 바로 마녀다.>
“개 같네. 태어날 때 이미 운명이 정해졌다는 거지?”
<그렇다.>
그저 태어난 순간 불길하다 불리며, 사람들의 악의를 먹으며 악당이 되는 존재.
자신의 의지와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태어난 존재.
진은 그 모든 게 ‘개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군. 우리가 봉인되면서 ‘마녀’란 존재는 태어날 수 없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순간, 이들이 봉인된 이유가 이해됐다.
이 정령들의 존재가 불합리한 인간을 탄생시킨다.
그렇다면, 진이 마왕을 부활시켜서 마녀가 태어난 걸까?
‘그럴 리 없지.’
오히려, 진이 한 일은 단순히 봉인한 것보다 훨씬 세련된 방법이다.
그들에게 존재를 주었으니, 이런 피해자가 생길 리도 없다.
“로메른의 말로는 저주의 업이 따라붙었다던데?”
<……저주는 우리 중 하나였다. 소멸한 뒤, 세상에 흡수된 모양인 거 같다.>
녀석은 그렇게 말한 뒤.
뒤늦게 눈을 찢어질 듯 커졌다.
<잠깐! 저주가 세상에 흡수되었다면, 그대는 세상의 운명으로부터 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뜻인가!?>
“어. 와. 소름 끼치던데?”
<……내가 보기엔 그대가 더 소름 끼치는군.>
세상의 운명 자체를 부정하고, 도망치는 일이 가능할까?
마왕이 생각할 땐 불가능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
생각해 보면, 자신 또한 진을 만나고 소멸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건 또 뭐야?”
<때때로 세상의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세상의 운명을 부정하고, 파괴하며 세상을 새롭게 만든다.>
“어. 음. 그게 나라고?”
<그렇다. 그대는 어쩌면 운명을 거스르는 자일 수도 있다.>
진이 보기엔 오해였다.
운명을 거스르기는커녕,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다.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 그대가 바꾸는 운명에 한 축을 담당하고 싶다.>
한데, 마왕이 고개를 숙이며 저자세로 나오니 이건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네 덕에 내 정체성을 찾은 거 같네. 고마워. 우린 좋은 팀이 될 거야.”
<고맙다.>
이걸 어떻게 거부해.
마왕이 고개를 숙이는데!
그렇게 마왕과 의도치 않은 서열정리가 끝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대는 무엇을 하고 싶지?>
“살렸으면 좋겠어.”
<방법은?>
“뭐, 아무거나 상관없어. 대신, 적어도 마녀라 불리며 손가락질 안 받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마왕의 커다란 눈이 잠시 감겼다.
<그대의 부탁은 무척이나 어렵다. 완벽하게 평범한 사람으로 만드는 건, 아기를 감싼 운명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래?”
진이 아쉬워하며 되묻자, 마왕은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존재를 걸고 내 영토인 이곳에서 저 운명과 싸운다면, 어쩌면 아기를 감싼 운명을 부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아기는 살아남을 수 있어?”
<……운명이 부서지는 것이니. 살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 방법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아기는 물론이고, 마왕이 여기서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나중의 계획이 전부 연쇄 도산하게 된다.
“아니. 그건 됐어. 위험 부담이 너무 커.”
<……고맙다.>
한데, 마왕은 진의 말을 조금 오해한 거 같았다.
뭐, 나쁜 쪽으로 이해한 건 아닌 거 같으니 대충 넘긴 뒤.
“그 운명, 꼭 부숴야 하는 거야?”
색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부수지 않으면?>
“저주의 업이라 문제가 되는 거면, 저주만 쏙 빼먹고 업 앞에 뭔가 새로운 걸 붙이면 되지 않아?”
마왕의 눈이 다시 한번 찢어질 듯 커졌다.
<역시…… 운명을 부수는 자. 아니. 그대는 운명의 찬탈자다!>
어. 그거 좋은 말이지?
이걸 묻기도 전에, 녀석은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대의 계획! 내가 구현하겠다!>
“내가 도와줄 건?”
<없다. 그저 작업할 때 근처에만 있어 주면 된다. 그대의 존재가 곧 힘이다!>
약간 쓸데없는 오해를 산 것 같지만, 어쨌든, 마왕에게 짬 때리는 건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