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똥을 치워요!
녀석은 모든 걸 다 받아들인 듯한 얼굴로 말했다.
“억지로 날 붙잡는다고 남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얼굴은 마치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고결하고 숭고한 사람 같아 보였다.
물론, 그런 현자의 모습은 진에겐 전혀 다르게 보였다. 자기합리화를 끝마친 호구 놈의 모습이었다.
“네. 다음 빤스런. 어딜 도망가려고.”
진의 말에 녀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그리운 기분이네. 괜찮아. 슬퍼하지 않아도 돼. 진짜 방법이 없는 거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어딜 똥 싸지르고 튀려고.”
현자 놈은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진이 보기엔 사용해 볼 만한 방법이 있었다.
“어휴. 회귀 전 내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훤하다. 육체가 없던 게 다행이지, 암 걸려서 죽었을 거다.”
“……그 암이란 게 대체 뭐길래 회귀한 다음에도 말하는 거야?”
그럼 그렇지. 회귀 전에도 진이 어지간히 답답해했던 모양이었다.
“우선 알아 둘 게 있어.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내가 엄청나졌다는 것.”
“……뭐?”
“내가 개쩔어졌다, 이거야.”
오만하고 어처구니없는 자랑 같아 보이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성자, 명예 감찰, 남작, 대정령사, 세계수의 화신, 마왕 제작자 등등 엄청난 이력의 소유자였으니까.
“아무튼 사념이라도 남긴 건 정말 잘했어. 너야 사과하려고 남긴 거겠지만, 그게 네 명줄을 붙잡아 준 거니까.”
“사념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야? 이건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긴 무슨.”
진이 생각하는 사념은 간단했다.
“사념이니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로 말했지만, 너라는 정보를 저장해 둔 게 사념 아니야?”
“……설명이 너무 빈약하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야.”
“일단 그쪽에 가깝다는 거지?”
“맞아.”
“그럼,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어. 나름의 해결 방법이 있으니까.”
진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뒤 녀석에게 말했다.
“로메른이나 다른 애들이 들어오지 못한 건 네가 한 거야?”
“어. 로메른이 이곳에 들어왔다면 곧장 눈치챘을 테니까.”
뭐 지금은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건’이 중요했다.
“정령만 소환 못 하는 거야?”
“정령이라고 전부 소환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나름의 조건이 있어.”
녀석은 다시 설명을 이어 가려고 했는데, 전혀 필요 없었다.
“설명은 됐고, 정령이 아닌 다른 건 소환할 수 있다는 거야?”
“여전히 설명은 안 듣는구나? 맞아. 정령이 아니면 대부분 소환될 거야.”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진은 한 존재를 불러냈다.
용암으로 만들어진 작은 골렘을.
“이건 뭐야?”
“가짜 신.”
“……설마, 그 녀석을 잡은 거야?”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벌써? 어떻게 찾은 건데?”
“셋째 형 덕에……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어떻게 된 건지는 나중에 말해 줄게.”
“아. 음. 어.”
여기서 이야기를 끊으니 녀석은 답답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 녀석은 일종의 정보 저장 장치야.”
“가짜 신이 정보 저장 장치라고? 그게 가능해?”
놀랍게도 가능했다.
“처음엔 가짜 신답게 자아도 있고 멀쩡했는데, 정보를 억지로 쑤셔 넣다 보니까 정신이 나가 버렸어.”
정보 과부하로 작게나마 있던 자아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애초에 녀석의 자아는 사제들의 염원에 있는 ‘정보’로 인해 구성됐다는 걸 간과한 덕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 진 입장에선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정신이 나가 버린 덕분에 말 잘 듣는 AI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드는데…….”
괜히 현자라 불린 게 아닌지.
녀석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불안하긴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지. 사념이라고 해도 너라는 존재를 그대로 투영한 건 맞잖아?”
“그렇긴 한데 네 말대로 내 존재를 투영했을 뿐 진짜 나라곤 할 수 없어.”
녀석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컴퓨터로 내 뇌의 정보를 모두 옮긴다고 그게 진짜 ‘나’일까?
스스로의 존재를 묻는 철학적이고 어려운 문제지만.
“네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그럼, 그냥 이대로 똥 싸지르고 튈 거야? 해결하고 가.”
“……그것도 맞는 말이네.”
지금 존재의 고찰까지 할 만큼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다.
녀석의 도움이 있으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없었다.
“내가 뭘 할지는 대충 감 왔지? 정보나 다름없는 널 이 용암 골렘에 흡수시킨 뒤에 부려 먹을 거야.”
“알겠어.”
진이 곧장 용골이를 움직였다.
“집어삼켜.”
어린 모습을 하고 있는 ‘사념’ 진 플린트가 용골이에게 흡수되더니.
-현자 ■ ■■■를 획득합니다.
-대량의 정보 확인.
-처리 시간 필요.
당연한 일이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에 흡수한 현자를 최상위 정보로 두고, 자아로 선택해.”
AI 용골이의 OS(운영체제)를 현자로 업데이트했다.
-확인했습니다.
-처리 중.
-남은 시간 25분.
현자의 모든 정보를 기록하는 데 고작 25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떡밥 파쇄도 했으니.’
이제 나갈 차례였다.
* * *
진은 밖으로 나와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안에 있던 거 현자던데?’
[뭐? 현자가 거기 왜 있어?]
당연히 약간의 각색은 필수였다.
‘사념을 남겨 둔 거래.’
[사념을? 왜? 어차피 정령으로 소환될 텐데…… 설마?!]
후.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이다를 쏟아붓는 기분이었다.
이게 대화지! 이게 티키타카지!
로메른은 진이 말하기도 전에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챘다.
[멍청한 놈. 착한 건지 미련한 건지도 모르는 놈.]
그제야 다른 이들도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았다.
[……회귀하기에 부족했던 건가요? 현자가 자신을 바칠 만큼?]
‘어. 별수가 없었대.’
[허어. 현자답구먼. 현자다워.]
정령들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했다. 함께한 동료를 추모하는 그리워하는…….
‘아직 말 안 끝났어.’
아주 지들끼리 애도를 하고 있었다.
‘붙잡았어. 어딜 똥을 싸지르고 튀려고…….’
[……뭐?]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오자 녀석들은 깜짝 놀라 진을 바라봤다.
‘뭐 그리 어려운 건 아니야.’
진은 애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었다.
[허허. 자네는 정말이지…….]
검성은 헛웃음을 흘렸고.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진짜 현자인가요? 조금 어렵네요…….]
성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진을 바라봤고.
[역시! 믿고 있었다고 진! 그렇지! 어딜 똥을 싸고 튈라 그래!? 당연히 멱살 잡아다 써먹어야지!]
로메른은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셋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적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 얼굴에 가득하던 슬픔이 옅어지고, 다른 감정이 채웠으니까.
[진. 넌 진짜 천재적이야! 불로불사 연구 왜 하지? 여기 답이 있는데? 이건 정말이지…….]
‘어. 고마워. 근데 로메른 너 감 많이 떨어진 거 아니야?’
[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현자가 자신의 존재를 버릴 정도로 부족했다면, 그 외에 다른 것도 버렸을 거란 생각은 안 들어?’
순간, 녀석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지금부터가 본론이야.’
그 순간 기다리고 있단 목소리가 들려왔다.
-흡수가 끝났습니다.
진은 용암 골렘을 소환했다.
‘나머지는 직접 들어.’
허공에 용암이 만들어지고, 이내 골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저건.’
용암 골렘이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극도의 예를 표하기 위한, 사이버 전통 ‘그랜절’.
머리부터 일직선인 완벽한 자세였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그래도 미안한 줄은 아나 보네.]
[그러게요.]
[허허. 현자가 저 모습을 보이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구먼.]
정령들은 저 자세를 알고 있었다.
‘저 자세가 뭔데?’
[현자만의 괴상한 방식이야. 그러니까 잘못했다는 표현인데…… 아무튼 그래. 뭐라더라? 그랜 뭐였는데.]
세상에…….
저걸 가르쳐 준 건, 본인이었다.
판타지 세상에 그랜절을 전파하다니…….
‘이게 진짜 판타지지.’
심지어 그 그랜절로 화해가 되고 있었다.
* * *
화해는 빠르게 이뤄졌다.
[그걸 같이 고민해야지. 혼자 떠맡고, 말도 없이 이러면 어떻게 해요?]
-미안. 그땐 시간이 없었어.
[그건 틀린 말은 아니네요.]
[현자는 무슨, 내가 보기에 넌 멍청이야.]
-정말 미안하다.
투덕거리고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지만, 이내 마무리가 됐다.
[원래라면 너한테도 답을 알려줬겠지만, 봐줄게.]
[하긴, 물은 답을 알고 있으니까요.]
[허허. 용하긴 하더군.]
-물? 그건 무슨 소리야?
[있어 그런 게.]
이렇게 정령들이 금세 화를 풀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저 녀석이 있으면, 어떻게 될 거 같으니까. 딴 건 몰라도 랜덤으로 정령사 정하기로 하건 정답이었어. 어디서 저런 녀석을 구했겠어.]
[그건 동감이에요. 진이라면 어떻게 해결해 줄 거 같기도 해요.]
[허허. 평생 우리가 귀찮게 한다고 하면 뚝딱 방법을 만들어 올 거 같기도 하군.]
이번에도 진 때문이었다.
진이랑 함께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이딴 해답을 도출한 것이다.
-그래?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현자가 진을 바라봤다. 골렘인 덕분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진은 대충 예상이 됐다.
그때 정령들이 입을 열었다.
[다행? 후후. 고작 다행이라면 이런 말 안 한다고.]
[맞아요. 상상도 못 할 거예요.]
[허허. 자네들 아이들처럼 자랑이라도 하려는 겐가?]
검성은 마치 말리듯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우리의 예상보다 결과가 좋았어?
[아 그거? 전부 폐기했어. 우리가 몰랐던 적의 존재도 확인했고, 진행도 워낙 빨라서.]
-……그 계획을 폐기했다고?
[어. 덕분에 뒤죽박죽이야. 차례대로 진행해야 했는데, 후반부에 해야 할 일을 몇 가지 해결했으니까.]
-대충 듣긴 했어. 가짜 신을 사냥했다면서?
[그뿐인 줄 알아? 얘 성자 됐다.]
-……성자?
[대정령사로 불리기도 하고, 엘프의 지도자이며, 드워프들의 보스기도 하지.]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는데?
현자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정령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 걸음 떨어진 진의 눈에는 진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정령들은 자랑하고, 현자는 놀라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게 클라스?
대체 회귀 전 자신은 무슨 말을 한 것인가. 현자가 멍청해 보이는 건 자신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적당히 대화가 마무리될 쯤,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녀석은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로메른의 그런 행동이 의외였는지 현자는 좀 놀란 눈치였다.
-……지금 다음 행선지를 묻는 거야?
[그럴 가치가 충분해. 얘가 의외로 직관이 있어.]
-세상에…… 로메른이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묻다니…….
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현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 정해 둔 상태였다.
‘뭐, 지금 당장 해야 할 건 딱 하나밖에 없지 않아?’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용암 골렘을 바라봤다.
‘얘가 싼 똥 치워야지.’
현자는 큰 실수를 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걸 건드렸다.
‘회귀하면서 원래 계획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지불했다면, 그 영향이 없을 리 없잖아.’
이 영향으로 어떻게, 얼마나 변했을지가 문제였다.
‘너희들이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 이유가 괜찮은지 확인해 봐야지 않겠어?’
세상을 구하는 ‘이유’.
그 이유가 영향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왜냐고?
세상을 구하는 힘든 일은 진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회귀한 이 녀석들이 할 일이지.
-그러네. 이건 생각하지 못했어.
[효과 확실하지?]
로메른은 현자에게 그렇게 말한 뒤 곧장 소리쳤다.
[다들 급하니까 개수작 부리지 말고, 현자의 게임으로 결정하자.]
[허허. 좋지.]
[저도 동의해요.]
현자의 게임?
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을 때.
[가위, 바위, 보!]
정령들은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다.
-……현자의 게임이라고 불려.
‘세상에.’
저 가위바위보의 승자가 바로 다음 목적지였다.
진의 개꿀 라이프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