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진 플린트 2
진은 몸뚱이의 주인인 진 플린트를 만나기 위해, 곧장 지하 깊은 곳에 있는 지옥으로 내려왔다.
이곳에 내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 만났던 방법대로 마법진을 이용해, 녀석과 다시 만날 생각이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저번엔 녀석에게 일방적으로 쫓겨났지만, 이번엔 그때와는 달리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어머니시여. 제가 도와드릴 일은 무엇입니까.]
‘시간’을 다루는 엘프를 정령으로 소환한 뒤.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예. 어머니시여.]
써클 안에 집어넣었다.
이 엘프 정령이야말로 녀석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한 수나 마찬가지였다.
진은 써클 안에 있는 엘프가 밖을 보지 못하게, 써클 주위를 마나로 감쌌다.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건 사절이었다.
[저 엘프의 힘이 뭔지는 알고 있지?]
‘알아.’
비장의 한 수라고 말할 정도로, 엘프의 초능력은 특별했다.
‘시간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좋은 능력 같아 보이네.]
‘뭐, 약간의 제한이 있는?’
[그게 약간이야? 대부분이지?]
‘시간 간섭’이라는 거창한 말과는 달리 이 능력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한테는 지금 최고의 능력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한데…… 제한이 없었으면 딱이었을 텐데.]
‘됐어. 애초에 네가 원하는 시간 간섭은 말도 안 되는 힘이잖아.’
[하긴, 그건 우리도 못 했던 건데 욕망으로 발현되는 엘프의 힘이 그런 거면 말이 안 되긴 하지.]
이 엘프가 이 힘을 얻게 된 건, 시간에 간섭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야만족과의 전투.
그곳에서 사망한 동생.
그리고 평생을 후회하며 산 형.
뻔하고 슬픈 이야기.
그 덕에, 엘프는 과거에 개입할 수 있는 초능력을 얻었다.
[그래봐야 반쪽짜리잖아. 진짜 과거를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뭐, 그렇지. 뇌내망상? 그런 느낌이지.’
엘프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사건’에 개입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이 변하거나 정말로 시간에 개입하는 건 아니었다.
뇌내망상이란 말처럼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개입할 수 있다.
[이딴 게 ‘시간’ 관련 능력 중에선 좋은 축이라니…….]
진은 로메른의 투덜거리는 말을 들으며 입을 열었다.
‘됐어. 그나마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는데 어디 제대로 이야기 들어 봐야지.’
[그거 하난 좋네. 그럼 망설일 필요 없지. 꿈 구슬도 사용할 거지?]
‘어. 그게 핵심이지.’
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마법진의 힘이 진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진은 잠에 빠져들듯 눈을 감았다.
* * *
침대에 기대 책을 보던 어린 진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기억에서 나가.”
곧이어, 녀석의 주위로 마법진 수백 개가 떠오르더니.
“여기까지 온 거 보니 잘하고 있나 보네.”
녀석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과거에 진은 여기서 튕겨 나갔지만, 그때와는 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걸 버텼다고? 어떻게?”
녀석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릴 때 허공에서 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보고 나가라 마라야?”
퉁명스러운 진의 말에 녀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너 뭐야!?”
“알면서 뭘 물어.”
진의 시큰둥한 말에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
뭐, 상관없었다.
이쪽도 확인할 게 있으니까.
‘로메른!’
마음속으로 로메른을 불러 봤지만,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다.
써클 내부에 있는 엘프 정령만 느껴질 뿐 다른 정령은 느껴지지 않았다.
‘써클에 집어넣지 않길 잘했네.’
진은 애초에 로메른과 다른 정령들을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숨길 정보들이 있었으니까.
진은 확인을 끝내자마자 책상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오. 이 의자 아직도 있는 거 알아?”
“……너 뭐야.”
여유로운 진의 태도와는 달리, 녀석은 잔뜩 경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 실력이 제법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오. 그게 느껴져?”
지금 이곳은 ‘시간 간섭’이란 힘과 꿈 구슬을 이용해 진이 지배하고 있다.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하든 주도권은 진에게 있었다.
“이 형이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참 많아.”
“…….”
녀석은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 쉽게 가자. 머리통 열어서 직접 확인할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지금 이 상황은 네 상식으로 가능하고?”
녀석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진은 경고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친구 중에 로메른이라고 있는데, 이 친구가 굉장히 효율적인 친구거든.”
그 말을 하며 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문 같은 걸 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하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뇌에서 정보를 쪽쪽 빼내는 방법이 있다는 거야.”
한 걸음 녀석에게 다가갔다.
“뭐, 사소한 단점이 있더라고. 정보를 빨리면 보통 죽더라?”
한 걸음 더.
“형이 마지막으로 기회 줄게. 개 그지 같은 떡밥 뿌리지 말고, 당장 말해. 500자 이내로 요약해서.”
진은 녀석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작은 어깨가 움찔 하고 떨렸다.
진은 녀석의 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통에서 정보 빼내기 전에.”
잠시 대답이 없던 녀석은, 이내 소리쳤다.
“긴급 탈출!”
긴급 탈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빡-!
진이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커억! 대체 어떻게!”
“그때 내 기억을 지웠어야지. 뭔가 있는 것처럼 떡밥을 뿌리면, 내가 그 떡밥을 개박살 내러 와요? 안 와요?”
당연히 오지, 이 멍청한 놈아.
* * *
진은 언제나 ‘대충’ 넘어가는 편이지만, 굳이 지적하고 파고들지 않을 뿐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애초에 왜 날까?’
첫 위화감은 이것이었다.
어째서 진 플린트가 회귀자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을까?
‘내가 지구인인데, 회귀자 정령까지 소환한다고? 이건 뭔가 이상하지.’
하나만 해도 엄청난 일이 두 가지나 벌어졌다.
상식적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로메른은 소환자가 결정되는 건 랜덤이라고 했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됐다.
‘어떤 소환자에게 소환될 줄 알고? 만약 걔가 다 싫다고 하면?’
그러니 절박하며, 상부상조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은 너무 딱 맞는 대상이었다.
살기 위해선 협조할 수밖에 없는 몸.
기사, 마법사, 사제. 전 범위에 형제가 있는 조건.
심지어 집에는 ‘수호자’마저 거주한다.
회귀자 정령이 써먹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이 있었을까?
‘너무 딱딱 들어맞아.’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 진이 과거의 기억을 살펴보다가 ‘잘하고 있네.’란 말을 들었으니.
‘의심이 확신이 된 거지.’
다른 회귀자 정령들은 모르고 있지만, 이건 진 플린트에게 소환되도록 계획적으로 진행된 일이다.
‘여기까지 떠올렸으면, 저놈이 누군진 대충 감이 잡히지.’
정령들이 ‘플린트’ 가문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동료 중에 ‘플린트’ 가문인 녀석이 있었던 것이다.
회귀라는 전무후무한 일을 총괄한 ‘현자’.
그게 바로 녀석의 정체였다.
“현자 진 플린트.”
진이 녀석을 바라보며 말하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과연, 추론한 거야?”
“어. 누가 떡밥을 질질 흘리고 다닌 덕분에.”
“떡밥이라…… 네가 말했던 나의 멍청한 부분이 이거였던 거 같은데.”
녀석은 마치 진을 안다는 듯 말했다.
“너 나 아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알아.”
어떻게?
물음을 떠올린 순간.
머릿속에 번개처럼 뭔가 떠올랐다.
‘회귀 전에 이 녀석이 몸을 움직였다면, 난 어디에 있었을까?’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진도 저 몸에 있었을 것이다.
“내 심장에 쌓인 기운이 터질 때, 무언가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왔어.”
그때 진이 흘러 들어온 것이다.
“넌 마치 악마가 깃든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계속 떠들어 댔어.”
“좋은 얘기해 줬겠지.”
“……뭐, 때때론.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몸을 고칠 수 있었던 건 네 조언 덕이야.”
“좋은 말 해 줬구만.”
뭐 대충 상황이 이해됐다.
자신은 몸을 차지하지 못하고, 그저 관중으로 녀석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회귀자 정령들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처럼.
물론, 납득이 되지 않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이 녀석이 좋은 뜻에서 이런 짓을 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숨겼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게 훨씬 좋았을 것이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지 않다면, 굳이 자신의 존재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의심스러워.’
시작은 작은 ‘선입견’이었다.
착한 녀석도 괜찮다.
공부 잘하는 녀석도 괜찮다.
하지만, 착하면서 공부 잘하는 녀석은 제정신이 아니다.
‘현자. 이놈이 딱 그런 놈인데.’
검성이 그의 인성을 인정했고, 로메른이 녀석의 실력을 인정했다.
현자는 진의 선입견에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 의심스러운 녀석이 뭔가를 숨기고 진행했다면 그게 좋은 일일 리 없었다.
“목적이 뭐야?”
“다른 애들과 같아. 세상을 구하는 거야.”
“아니. 그딴 쓸데없는 목적 말고, 네 진짜 목적이 뭐냐고.”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
“네 말대로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근데 네 행동을 보면 너무 수상한 것들이 많잖아.”
“수상하다고?”
“그래. 너랑 나랑 적이야? 아니지? 다른 회귀자들이랑은? 아니지? 근데 정체를 숨긴다면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진의 말에 녀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끔 생각해. 넌 때때로 정말 똑똑하다고.”
이 상황에서 디스를 한다고?
그것도 로메른과 비슷한 디스를?
녀석의 얼굴엔 적의 따위는 없었다. 그저, 쓸쓸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숨기는 게 있어.”
“말해.”
녀석은 마치 말을 고르듯 고민하다가 이렇게 입을 뗐다.
“네 방식대로 말할게. 일단, 널 속인 건 아니야.”
진짜 오랫동안 함께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가장 중요한 걸 먼저 말했다.
“+3점 줄게. 애들한테 뭘 속인 거야?”
자신이 아니면, 속일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같이 회귀한 정령들을 속인 것이다.
“회귀라는 엄청난 힘을 사용해서 돌아온 거 어떻게 생각해?”
“완전 똑똑하다고 생각해.”
“이 아이디어는 네가 준 거야.”
“……나?”
이 세상을 구하는 단초가 자신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것이다.
“어. 원래 세상 수호는 2회차가 국룰이라면서?”
“……에라이.”
뭐,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닌 거 같았지만.
“아무튼 계획은 준비됐는데, 대가가 문제였어.”
‘대가’에 관한 건 로메른에게 들어본 적 있었다.
“너희가 정령으로 영락하면서 지불했다고 들었는데?”
“뭐,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걸론 턱없이 부족했어.”
슬슬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존재의 모든 것과 기억 일부를 바쳤어. 인간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을 바쳤고.”
어. 그러니까.
“로메른이 방법이 있다는데?”
“없어. 존재와 가능성을 바쳤으니까. 만약 실행한다고 해도 무조건 실패할 거야.”
“그럼, 쟤들은 어떻게 되는데?”
“세계를 구하면 사라져. 존재 이유마저 끝이 나니까.”
“야, 이 사기꾼아!”
세상을 구하는 것 자체가 정령들을 소멸시킨다는 뜻이었다.
“일을 이따위로 하면 어떻게 해!?”
“모든 걸 해결한 유일한 방법이었어.”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숨겼는지 알 것 같았다.
“넌 여기 처박혀 있다가 모든 일이 해결되면 쓱 나타날 생각이고?”
“……내가 제일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네. 난 이미 내 전부를 바쳤어.”
“……뭐?”
“그래도 부족하더라고, 선택지가 없었어.”
그런 것치곤 녀석은 눈앞에 존재했다. 그런 진의 생각을 읽었는지 녀석이 말했다.
“이건 일종의 ‘기억’을 남겨 둔 거야. 네 덕에 ‘진 플린트’란 존재가 유지됐으니까.”
녀석은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라면 세상을 구했을 때 내가 짜잔 등장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했을 거야.”
“사과하기 위해 준비해 둔 사념이란 뜻이야?”
“맞아.”
녀석을 보며, 진은 고구마를 100개는 먹은 기분이 들었다.
“야, 이 빡대가리야. 진작 말을 해야지. 이따위로 일하면 어떻게 하냐!”
“하하. 그 말 되게 오랜만에 듣네. 난 현자지만, 너한텐 항상 모자란단 소리를 들었으니까.”
“아오. 뭘 좋다고 웃어! 이 모지리야!”
“그러니까 네가 한 말 중에…….”
녀석은 천천히 기억을 떠올리듯 그렇게 말한 뒤.
“난 이만 빤스런 해 볼게. 잘 부탁한다. 진.”
녀석은 이따위 소리나 해댔다.
“뭔 개소리야? 가긴 어딜 가?”
진은 시간 간섭의 힘을 ‘사용’했다. 천천히 사라지는 녀석의 존재를 강제로 붙들었다.
“똥 싼 거 해결하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