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엘프 정령
자, 정리해 보자.
지금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
엘프들이 모은 힘은 세계수를 위한 힘. 진은 세계수의 화신이라 그 힘을 흡수할 수 있다.
물론, 진은 세계수의 화신일 뿐 진짜 세계수는 아니다.
엘프들이 보낸, ‘존재’나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까진 계획대로였다.
이면 세계의 정령들에게 얻은 자투리 개념과 엘프들의 힘을 하나로 합쳐서 써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엘프들이 보낸 힘이 손대기도 전에 엘프 그 자체로 변화했다.
여기까지도 문제없었다.
그저 작은 돌발 상황일 뿐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부터 벌어졌다.
‘정령사인 게 문제가 될 줄이야.’
정령사의 힘.
엘프들이 보낸 힘.
이면 세계 정령들의 개념.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골 때리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이건 대체 뭔데?’
진의 앞에는 녹색을 띠고 있는 작은 빛 뭉치가 떠올라 있었다.
[……정령이야.]
‘정령? 새로운 정령을 소환한 거야?’
[어. 엘프라는 개념 자체가 정령화 된 거야. 저건 그러니까 엘프 정령인가? 와. 내가 말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네.]
‘엘프의 정령이라고? 그런 게 있어?’
[당연히 없지! 놀랍게도 진 네가 정령을 창조한 거야.]
‘……미친.’
정령 창조.
여태까지 만들었던 걸 생각하면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세계수, 마왕, 수호자 등등. 진은 여태껏 수많은 것들을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가짜’일 뿐이다.
이 정령은 가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걸 ‘창조’한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잠깐만, 내가 정령을 새로 소환하면 회귀자가 소환되는 거 아니야?’
[맞아.]
‘그럼, 저게 회귀자야?’
건드려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형태조차 없는 정령이 회귀자라고?
[당연히 아니지.]
‘내가 정령을 소환하면 회귀자가 소환된다며.’
[그게 제일 어처구니없는 점이야. 원래라면 그렇게 돼야 해. 현자랑 내가 작업한 건데 그게 무너질 리 없어.]
‘그런데? 뭐가 문젠데?’
[저게 ‘엘프’라는 게 문제야. 엘프가 아닌 이는 저 정령이 될 수 없어.]
회귀자가 엘프가 아니라서 소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없는 거지?’
[무슨 문제?]
‘엘프 정령 때문에 회귀자가 소환되지 않았으니까 순서가 꼬인다거나 뭐 그런 문제가 있나 싶어서.’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 별문제는 없을 거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니. 진짜 불행인가?
애초에 정령을 지금 소환할 생각이 없었으니 나쁠 게 전혀 없었다.
‘문제없으면 됐어.’
그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보다 이 정령에 집중하자. 대체 이 정령은 뭔데.’
엘프의 정령은 대체 무슨 용도일까? 애초에 엘프는 무슨 힘인가?
심지어 로메른도 엘프의 정령이 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이 정령의 창조주는 ‘진’이니까.
‘엘프의 정령이라.’
바람의 정령은 ‘바람’을 사용한다. 그럼, 엘프의 정령은 ‘엘프’를 사용하나?
진은 엘프 정령이 뭔지 고민해 봤지만, 쉽사리 그 용도가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는 아무리 고민해도 모를 거 같은데.’
그러니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가장 엘프다운 엘프를 떠올려 보는 거야.’
엘프들의 지도자 플로나.
그녀야말로 가장 엘프다웠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진 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녹색 빛 뭉치가 변해 있었다.
마치 캐릭터처럼 그녀가 작고 귀엽게 만들어졌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엘프 마을의 지도자 플로나였다.
“플로나?”
진은 혹시나 해서 되물었는데.
[예! 진 님!]
그녀가 확실했다.
* * *
‘엘프’의 정령.
이 정령의 힘은 간단했다.
[어머니시여!]
“예. 룬타.”
[플로나 님께 들었습니다. 저희가 ‘정령’이 되어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마치 캐릭터를 선택하듯 엘프를 선택해서 정령으로 소환할 수 있었다.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세계수에게 힘을 받은 ‘엘프’여야 소환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시험을 해보는 중인데, 그 축복의 힘을 사용해 보겠어요?”
[예. 어머니시여. 당신께서 내려주신 축복!]
그렇게 소환된 엘프는 정령 상태에서 ‘초능력’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축복을 당신께 되돌려 드립니다!]
수비 대장 룬타의 초능력인 ‘석화’의 힘이 진의 몸을 감쌌다.
‘몇 번을 확인해도 우리 생각이 맞는 거 같은데?’
단순히 초능력을 사용하는 게 끝이라면, 그다지 득이 될 게 없었다. 어쨌든 성서를 통해 이들의 힘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와. 이건 좀 놀라운데.]
하지만, 정령 상태에서 사용하는 초능력은 확실히 달랐다.
‘초능력은 정신력을 활용해서 사용하는 힘인데…….’
[정령 상태라 그런지, 네 마나를 사용하고 있어.]
그 말인즉슨, 진의 마나만 충분하다면 마음껏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충분해요. 룬타. 큰 도움이 됐어요.”
[어머니께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진이 정령 소환을 취소하자, 근육질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정령의 모습이 녹색 빛 뭉치로 변했다.
‘이거 대박이네.’
[동감이야.]
둘은 초능력을 정령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대박이라고 한 게 아니었다.
초능력은 굉장해 보이지만, 마법이나 도구로 구현 가능한 힘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진이 대박이라고 한 건, 소수의 특별한 초능력 때문이다.
마법이나 도구로 구현할 수 없는 초능력!
‘시간, 공간. 이 두 가지를 쓸 수 있다는 거지?’
[맞아.]
시간과 공간에 관련된 마법은 사용하기 굉장히 어렵다. 아니. 어려운 정도를 넘어, ‘불가능’의 영역에 가까웠다.
실제로 ‘시간과 공간’ 쪽 초능력을 가진 엘프들도 정신력이 한참 부족해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한텐 그건 문제가 아니지.’
이쪽은 마나를 이용해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마저 이 손아귀에 들어온…….
[아직 확실한 건 아닌 거 알지?]
물론, 아직 실험 전이었다.
‘알아. 일단, 해 볼까?’
[좋지.]
진이 준비할 건 딱 하나였다.
‘이 갑옷을 입는 건 꽤 오랜만이네.’
지옥의 동력원으로 사용하던 드래곤 하트 갑옷.
[정글러들 신물 받아다가, 지옥 동력원으로 교체했으니까. 이제 쭉 입고 다녀도 돼.]
진은 그 갑옷의 핵인 드래곤하트를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접혀있던 갑옷들이 펼쳐지며 진의 상체를 감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메른. 나머지도 부탁해.’
진이 로메른을 부르자, 녀석은 그 위로 용골이를 소환했다.
전신을 감싸는 ‘진심 모드’.
‘얼마나 회복됐어?’
-손상률 16%입니다.
‘나쁘지 않네.’
절반이 넘게 부서졌던 걸 생각하면, 꽤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공간 이동 초능력 가지고 있는 엘프가 누구였지?’
[그 음침한 친군데. 잠깐만…….]
둘의 실험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추기경. 이 보고서가 사실입니까.”
교황이 놀란 얼굴로 보고하러 온 사제에게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보고서에는 조금의 거짓이나 과장도 없습니다.”
교황에게 보고하는 이는 부제의 ‘임무’를 총괄 감독하는 추기경이었다.
“허어. 대체…….”
교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보고서를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홀연히 교황청에 나타난 ‘성자’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추기경은 그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성자께선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이 나타나셨을 때, 제 방에는 빛의 깃털이 가득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교황의 머릿속엔 한가지가 떠올랐다.
공간을 넘고, 어디든지 갈 수 있게 해 주는 힘.
“설마…… 천사의 날개를 얻으셨단 말인가.”
“아마, 그러신 것 같습니다.”
역대 성자 중 천사만큼 강대한 힘을 사용하는 이는 있었지만, 천사의 힘 그 자체를 사용한 이는 없었다.
“……그분께서 오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성자께서 말씀하시길 교단의 도움을 기다리는 이들이 이리도 많은데, 무시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대를 찾아가셨단 말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부제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교단이 전부 처리할 수 없으니, 생기게 된다.
특히나, 소수 민족들의 방어를 위해 사제들이 파견 나간 상태이기에 평소보다 임무가 훨씬 많았다.
“성자께선 작성된 임무를 받고는, 나타날 때처럼 사라지셨습니다.”
그 모든 임무를 가지고, 성자가 사라진 것이다.
“……가실 때도 사라지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실 때와 마찬가지로 제 방에는 빛의 깃털이 가득 휘날렸습니다.”
성자가 천사의 날개를 얻었다는 증거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성자께선 왕국 곳곳에서 나타나셨습니다.”
“흐음.”
“왕국 곳곳을 돌아다니시며, 많은 이들을 구하셨습니다.”
추기경의 말대로 보고서에는 성자의 행적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워프 게이트가 없는 지역이었다.
천사의 날개를 이용해, 사람들을 구했다고 보는 게 더 설득력 있었다.
“성자께선 부제의 임무 중 40% 이상을 해결하셨습니다.”
성자는 그 힘을 세상을 위해 사용했다.
“그 정도나 해결이 된 겁니까?”
“예. 그것도 상등급 임무를 위주로 해결해 주셔서, 나머지는 충분히 해결될 거 같습니다.”
많은 이들을 구하고 구원했다.
일이 넘치는 교단 입장에선 그야말로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보고서에 작성하지 않은 제 사견을 덧붙여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추기경은 가슴팍에 넣어둔 종이 하나를 꺼냈다.
“성자께서 이동하신 이동 경로입니다. 이곳들을 선으로 이으면, 이런 형태가 됩니다.”
그곳엔 교단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교황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추기경 또한 나지막이 신을 불렀다.
기적과도 같은 성자를 내려준 신을.
* * *
‘그걸 알아볼까?’
진의 물음에 루나가 대답했다.
[알아보실 거예요. 그런걸.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거든요.]
‘아. 그 추기경님 성격에 맞춘 거였어?’
[예. 그게 제일 확실한 거 같아서요.]
‘그냥 실험만 하기엔 아까워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공간 이동을 시험하면서, 겸사겸사 부제 임무도 해결했다. 해결이라고 해 봐야 진은 귀찮을 게 없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척만 하면, 루나와 로메른이 뚝딱 해결했으니까.
‘공간 이동 쪽은 완벽하네.’
[어. 용골이의 손상률도 그렇게 높지 않고,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장거리를 이동하거나, 전투 중 활용을 생각하면 이득도 이런 이득이 없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자.’
[시간 쪽?]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뭐 딱히 대단할 게 없잖아.]
로메른의 말대로 시간 관련 초능력은 엄청나다고 할만한 게 없었다.
슬로우와 헤이스트로 충분히 구현이 가능한 능력들이 대부분이었다.
‘시간을 멈추거나,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을 얻고 싶었는데.’
[야. 그건 말도 안 되지. 세계급 마법은 되어야 할걸? 아니. 세계급으로도 안 될 수도 있겠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써먹을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거 있지? 과거 기억이랑 관련된 능력.’
[어. 있지. 그런데, 이건 시간 쪽 능력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 않아? 정신계 쪽에 더 가까울 텐데…….]
그렇기에 더더욱 좋았다.
‘일단, 저번에 못 들었던 이야기 좀 듣게.’
[못 들었던 이야기?]
떡밥만 뿌리고 사라졌던 그놈.
그놈을 잡아서 제대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어딜 떡밥만 뿌리고 사라지려고.’
이 몸뚱이의 주인과 만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