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엘프들의 영역
체계가 잡혔다. 소수 민족 하나를 구해주면, 그들은 다른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지원했다.
하나를 구하면, 다른 하나를 구할 병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참 오랜만에 뵙는 거 같습니다.”
“너도 진짜 징하다.”
피의 길을 오르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돌아왔다.
심지어 그냥 돌아온 것도 아니고 피의 길 정복을 정복하고 돌아왔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케헥케헥! 죽인다!)”
“(피의 제단에 공물을 바친다!)”
“(피! 전투!)”
“(죽인다! 이곳에 전투가 많다고 했다!)”
말릭이 늘어났다. 뭐, 다른 상황이었다면 격리 후 봉인 조치했겠지만, 지금은 아주 도움되는 이들이었다.
“앞으로 바쁠 거야.”
“벌써 설레는군요.”
“헛소리하지 말고, 이번에야말로 죽을 자리로 보내 줄 테니까.”
“더 좋습니다.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좋습니다.”
“부하들 신경은 안 쓰나 봐?”
“부하같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전투에 들어가면 제 사냥감을 뺏어가는 경쟁자입니다.”
녀석의 대답을 들은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리를 이끌게 돼서 좀 변했나 싶었더니…….’
어쩜 이렇게 그대로일까.
순수하게 전투만을 바라는 건, 전과 똑같았다. 그렇다고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진에겐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전투에 미친 또라이는 한 명으로 족해.’
말릭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뤄, 하나의 집단이 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한데, 녀석의 태도를 보니 그냥 데리고 다닐 뿐, 큰 의미를 두는 거 같진 않았다.
‘어차피 처리할 놈들이었으니까.’
늪지대 쪽 야만족들은 구제 불능이다. 식인과 살인에 미친 ‘전사’ 층을 통째로 날려 버릴 필요가 있었다.
‘뺑뺑이 돌리면 알아서 처리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말릭은 최고의 인재다. 알아서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 테고, 늪지대 쪽 애들도 휩쓸릴 테니까.
“그럼, 시작하자고.”
지시만 내리고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소수 민족은 해방될 것이다.
‘이게 인생이지.’
모든 걸 혼자 할 필요는 없다.
더불어 가는 사회니까.
[……참 좋은 말을 이상하게 쓰는데 재주가 있으시네요.]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오랜만에 집에 가서 쉬자고.’
체계를 만들어 두었으니, 이제 집에 가서 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 * *
즐거운 휴식 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진이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뭔 엘프가 이렇게 많아?!’
엘프의 숲을 넘어서, 진의 영지까지 엘프들이 북적였다.
[뭘 그렇게 놀래. 왕국에 있는 모든 엘프를 영지 하나에 때려 박았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아 맞네.’
그런 생각도 잠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하에 공간 충분하잖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의 영지에 넘어 온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세계수에서 엘프들이 떨어졌다고?’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세계수 주위에서 떨어져 이곳까지 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가 보자.’
혹시라도 뭔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진은 서둘러 엘프들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놀라운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수많은 엘프가 바닥에 심어져 있었다.
그들은 머리만 내민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정수리에는 세계수의 뿌리가 꽂혀 있었다. 땅에 심어진 엘프들이 엘프의 영역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기괴했다.
‘……뭔가 타락한 흑마법사가 엘프들을 붙잡아 실험하는 거 같네.’
[넌 무슨 표현을 해도…… 그렇게 찰떡같이 해? 내가 흑마법사긴 하지만, 딱 그 느낌이긴 하다.]
진은 로메른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하로 이동했다.
‘역시 여기도 이렇네.’
지하라고 다를 건 없었다. 지하에도 엘프들이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이건 너무 많은데…….]
로메른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많으면 엘프들한테 부작용이라도 있는 거야?’
[그건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걱정하는 건 다른 쪽이야.]
‘다른 쪽? 세계수를 말하는 거야?’
[맞아. 진 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진짜로 세계수를 대신하고 있어.]
‘뭐, 그건 그렇지.’
세계수는 자신이 진짜 세계수라 생각했고, 실제로 세계수의 역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진짜 세계수라는 건 아니잖아?’
[그 말대로야. 진짜 세계수라고 하기엔 몇 가지가 부족했어.]
‘……했어란 말은 지금은 충족됐다는 거야? 아니. 집 좀 잠깐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황당해하는 진의 말과는 달리, 로메른의 말투는 진지했다.
[이렇게 동시에 엘프들을 연결할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 엘프들이 이렇게 급하게 진행하는 건 특별한 일이니까.]
‘말 돌리지 말고 핵심만 설명해.’
[그러니까…… 세계수와 다수의 엘프가 연결된 덕분에 신에게 신도가 생긴 거야.]
‘……그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야?’
[무슨 소린지는 직접 확인하자고.]
그 말과 함께, 진은 로메른과 함께 세계수 속으로 들어갔다.
* * *
세계수를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는데, 그 속은 전혀 달랐다.
정령처럼 작은 빛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기하네. 이게 뭐야?’
[엘프.]
‘……뭐? 이 빛이 엘프라고!?’
마치 민들레 씨앗같이 작은 빛. 이게 엘프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을 사용해 봐. 좀 더 다른 게 보일 테니까.]
진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고, 여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 주었다.
빛의 뒤로 보이는 엘프들의 영혼과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마나나 신성력과는 달리, 조금 이질적인 종류의 힘이었다.
‘저건 뭐야?’
[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신도들이 신에게 바치는 신앙 같은 거야.]
‘……신앙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질적인 힘인데?’
[처음 보는 건 아닐 텐데?]
‘내가? 저걸?’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이내 저것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물론 진의 기억에 있는 힘은 엘프들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저 빛처럼 아름답거나 신비로운 느낌이 아닌, 더럽고 불쾌하고 찝찝한 느낌이으니까.
‘봉인된 정령들?’
마왕을 만들 때 로메른은 그들의 ‘개념’을 빼내 악마의 육체에 집어넣었다.
그때 보았던 ‘개념’과 비슷했다.
[정답이야. 그건 뭐랄까 한마디로 정리하기 힘든 힘이야. ‘개념’이기도 하지만, ‘존재’이기도 하거든.]
‘존재?’
[어. 허무의 정령이 허무라는 힘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힘.]
쉽게 느낌이 팍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걸 세계수가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세계수라는 ‘존재’를 부여받아.]
‘저건 가짜잖아.’
[더는 중요하지 않아. 존재를 받는 순간, 가짜는 진짜가 될 테니까.]
진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 그게 되면 인위적으로 신을 만드는 게 된다는 소리네?’
[어. 가능해. 진짜가 아닌 아닌 반쪽짜리 신이긴 하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우리도 사용하려고 했던 방법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마왕 프로젝트!’
[그래. 그 프로젝트의 끝은 야만족들의 신으로 만드는 거잖아.]
‘……그거 일종의 비유 아니었어?’
[아닌데?]
‘어?’
[……우리 서로 다른 의미로 대화했던 거야?]
‘…….’
당황했던 것도 잠시.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치?]
둘은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저게 중요하지.]
녀석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엘프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게 어디로 흡수될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야! 바즈라! 주인 왔으면 빨리빨리 튀어 나와야지!”
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고요했다.
하. 이것 봐라?
“옛날 기억나게 해줘? 같이 지하실 한 번 더 갈까?”
그 말을 하자마자.
드드드득-
나무뿌리가 허공에서 나타나, 거대한 문을 만들고 그곳에서 바즈라가 걸어 나왔다.
“성자여. 아이들을 도와주느라 그대가 온 것을 몰랐다.”
고풍스러운 말투와 분위기. 전에 보았던 쭈구리 모습이 아니었다.
“말투.”
“그게 무슨 말인가 성자…….”
“말투.”
“하하. 그대도 참, 농담을…….”
“마지막 기회다. 말투.”
녀석이 망설이며 고민하는 순간, 진이 입을 열었다.
“검성.”
“아! 아닙니다!”
그 말에 녀석을 감싸고 있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졌다. 녀석은 진 앞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박으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아주 세계수 되니까 세상이 달라졌지? 막 주인한테 반말 찍찍 뱉고?”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오. 죄송한 줄 알면서 고의로 한 거라 이거야? 우리 바즈라 많이 컸네. 내가 몰라봤잖아.”
“주인님! 진짜 죄송합니다!”
…….
…….
그렇게 한참을 갈궜다.
녀석은 정신이 나간 듯 망연자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너 무서운 아이였구나?]
[허허. 기사단 처음 들어갔을 때가 떠올랐다네. 그 끔찍한 기억이…….]
정령들조차 혀를 내둘렀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바즈라.”
“예! 주인님!”
녀석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진의 부름에 곧장 응답했다.
“내가 누구지?”
“저의 영원한 주인님이십니다!”
“그렇지? 내가 주인이지?”
“그렇습니다! 전 주인님의 노예!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좋은 자세야. 그럼, 노예의 물건은 주인의 것이겠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다 드리겠습니다!”
진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악독한 사람은 아닌데, 준다는데 내가 어떻게 거부하겠어.”
“……예! 맞습니다!”
녀석은 잠깐 울먹거리며 대답했지만, 그 정도는 용서해 주어도 괜찮았다.
“그럼, 내놔.”
“뭘 드리면 되겠습니까?”
진은 녀석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엘프들이 뱉은 거 먹었지? 그거 줘.”
“이, 이건…….”
녀석은 말을 더듬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뒤에는.
“오. 그 친구가 보고 싶었구나?”
진의 말을 들은 녀석은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검성을 확인했다.
“히, 히익!”
정말 너무나 아프게 때렸던 끔찍한 정령.
시켜서 한다는 표정과는 달리 그 고통은 지금도 생생했다.
진은 녀석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어떤 결정을 하든 주게 되어 있는 거 알지? 쉽게 가자.”
어차피 뺏긴다는 소리였다. 녀석은 진의 말뜻을 이해하곤 고개를 떨궜다.
“드, 드리겠습니다.”
“드리겠습니다?”
“꼭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세계수를 향한 엘프들의 마음은 그렇게 진에게 전달됐다.
“세계수를 위한 힘이다 보니, 사용이 제한되실 겁니다. 차라리 저한테 주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실 텐데.”
녀석은 못내 아쉬운지 힘을 건네주며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바즈라. 내가 세계수의 화신인거 잊었어? 내가 곧 세계수다 이거야.”
진은 그 힘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세계순데.”
바즈라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아이고, 맛있다!
진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 기운을 흡수했다.
* * *
그렇게 흡수된 힘은 진의 몸에 들어와 기묘하게 움직였다.
원래라면 세계수를 향한 엘프들의 마음이 담긴 힘이었을 텐데, 그게 변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진이 세계수이되 세계수가 아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계수라는 ‘존재’를 담고 있는 힘이 풀어지고, 더 원론적인 개념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엘프’였다.
엘프라는 존재와 개념이 진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정령사인 진의 힘은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게 무슨 일인데?]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할 로메른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계획대로 되긴 했는데, 계획을 좀 많이 벗어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