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야만인의 용도
낙타 떼가 사막을 가로질렀다.
“(노란바람이 분다!)”
“(휘-하!)”
“(노란바람이 함께한다!)”
그 위에는 진의 명을 받고 사막으로 온 노바와 아이들이 있었다.
사막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식의 해방의 도움을 받는 강경파와 노바와 아이들이 도와주고 있는 온건파의 전쟁.
전쟁이 벌어진 건, 그들의 원하는 게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강경파는 벽을 넘어 왕국을 약탈하길 원했고, 온건파는 세상에 섞여 평화롭게 살아가길 원했다.
원래라면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타협점을 찾는 게 정상이었지만, 강경파의 대부분은 전투와 피에 미쳐 있는 이들이었다.
도적과 약탈자. 남의 것을 빼앗아 그걸로 연명하는 이들. 애초에 강경파와 온건파는 뺏고 빼앗기는 관계였다.
생각도 다르며, 입장도 다르고, 서로를 싫어하기까지 하니 함께할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강경파는 멍청한 선택을 했다. 온건파를 공격하고 노예로 삼은 것이다.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때, 노바와 아이들이 온건파에 합류했다. 심지어 샌드웜의 어금니를 들고 왔으니 전사가 부족한 온건파 쪽에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들은 온건파 안에서 빠르게 녹아들었다.
아니, 단순히 녹아들었다는 말론 부족했다.
노바는 모두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는 훌륭한 전사였고, 사막의 혼을 잊지 않은 자였으며, 모두를 아우를 줄 아는 지휘자였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미래를 위해!)”
“(노란바람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불고 있다!)”
온건파의 낙타 떼와 강경파의 낙타 떼가 부딪혔다.
수는 강경파 쪽이 많지만, 그 수를 노바와 아이들이 커버했다.
“(죽어라!)”
“(죽는 건 너다!)”
고함이 오가고, 칼이 오간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병장기가 떨어진다.
난전이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지독한 난전.
노바는 싸움을 이어 가며, 주위를 냉정하게 바라봤다.
자신들이 애쓰고 있지만, 전황이 점점 넘어가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이대로는 ‘패배’한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노바는 문득 ‘주인’의 여유롭던 모습을 떠올렸다.
‘주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다.’
주인의 방법은 너무나 기묘해서, 자신이 상상한다고 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때.
쿠구구구구궁-.
땅이 울리고, 세상이 일순 회색빛으로 물든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생각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누가 아군인지 모르니까 전부 제압하세요.”
“예. 어머니시여.”
“(예. 정글러들의 은인이시여.)”
주인이 오연하게 서서 명을 내리고 있었다.
노바는 진을 바라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주인은 감히 자신이 상상치도 못하는 지혜가 있었다.
‘난 주인처럼 생각할 필요 없다.’
그래. 주인을 지키면 될 뿐!
어느새, 그의 눈가에 환희와 전의가 떠올랐다.
“(아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미래와 평화를 위해 싸워라!)”
* * *
늪지대에서 사는 야만족들에겐 오랜 전통이 있었다.
피의 길 끝에 도달하는 자.
그자가 모두를 이끈다.
말릭은 이곳의 전통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저 한 길로 쭉 걸어가기만 하면 강자가 등장하고, 전투가 발생한다.
끊임없는 전투.
그것도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야생적이고, 야만적인 전투는 그에게 색다른 감정을 선사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엔 상처가 누적되어 갔기 때문이다.
정신은 이 길을 계속 걸어가길 원했지만, 몸은 이미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더 가고 싶다.’
아쉬웠다.
이딴 늪지대에서 자신의 인생이 끝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죽음을 죽이고 싶었고, 진과 제대로 싸워 보고 싶었다. 하다못해 노바란 녀석과의 전투도 죽을 때가 되니 그리워졌다.
‘그래도 즐거웠다.’
진의 곁에 붙어,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만끽했다.
아쉽지만, 즐거운 인생…….
그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안 움직이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박쥐?’
박쥐 떼가 하늘을 새카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무리를 이탈한 박쥐 한 마리가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펑-
묘한 소리와 함께, 사람으로 변했다.
“성자의 전언이다.”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흡혈귀였다.
“쯧. 아쉽게도 안 죽었네.”
진의 목소리와 표정을 따라 하는 흡혈귀.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눈앞에서 직접 진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빨리빨리 처리해. 바쁘니까.”
퉁명스러운 말투와 함께, 흡혈귀는 말릭을 향해 가방을 던졌다.
말릭은 곧장 가방을 확인했다.
안에는 자신에게 제일 필요한 포션 수십 병과 ‘나무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하여간 손 많이 간다니까.”
그 말과 함께, 흡혈귀는 다시 박쥐로 변해 하늘 위로 날아갔다.
‘……정말이지.’
진과 함께 하는 건 너무 재밌다.
그는 포션 하나를 거칠게 들이키곤, 곧장 나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불길한 검은 보석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머리가 미친 듯이 울렸다.
줘-! 나한테 줘-!
“……!”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뭔가 요구한 건 처음이었다.
말릭은 눈을 빛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보석을 먹어 치웠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그가 보는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엔 이렇게나 죽음이 많았구나.’
그가 모든 죽음을 본다고 생각했던 건, 오만이었다.
그는 절반도 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재밌겠군.’
말릭은 몸을 일으켰다.
포션을 먹어도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지만, 움직일 수만 있으면 충분하다.
“(피의 길-!)”
진에게 배운 마법의 단어를 소리치며, 그는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피어나는 죽음 덕에, 그의 얼굴엔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이면 세계를 손에 넣는 게 어떤 도움이 될까?
어째서 ‘마왕’이라는 존재까지 만들어 가면서 시간을 투자한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소수 민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바로 이곳 ‘이면 세계’였다.
이면 세계의 최대 장점을 꼽자면 크게 2가지가 있었다.
‘마왕’이 존재해 내부의 방비가 완벽하다는 것.
그리고, 이면 세계를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쉽게 말하면, 사막으로 들어와 정글로 나가는 게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왕국 곳곳에 박혀 있는 소수 민족의 영토로 ‘점프’를 할 수 있으니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다.
일종의 개인용 ‘워프 게이트’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이걸 워프 게이트 대용으로 사용하는 건 멍청한 짓거리다.
이런 건 대국적으로 사용해 줘야지.
“이면 세계를 물류 중심지로 만들 생각입니다.”
진의 말이 실시간으로 번역되어, 사막 전사들과 정글러들에게 전해진다.
“갑작스럽게 무슨 소린가 싶으실 겁니다.”
진은 칠판을 꺼내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기 위해 길고 긴 설명이 됐지만, 핵심만 요약하면 간단하다.
물류 중심지에서 고객이 원하는 곳으로 배달한다.
이면 세계에서 공간을 건너뛸 수 있으니,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게 완벽해지려면 모든 소수 민족들이 추가되고, 협력해야 하지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현재 왕국에서 물자를 배달하는 건 보름에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왕국에 물류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면 세계를 물류 중심지로 사용하면 길어야 3일. 빠르면 하루 만에도 배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 진이 생각하고 있는 건!
“하루 만에 도착하는 화살 배송! 여러분들이 왕국의 모든 물류를 지배하는 겁니다.”
한 달이 걸리던 게 하루가 된다.
그걸 맛본 왕국민들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지구만 해도 고작해야 배송 기간이 하루만 줄어도 그 편리함을 잊지 못하는데, 이곳에선 더 큰 파장이 생길 것이다.
물론, 이런 물류 시스템의 변화는 큰 파장을 낳게 된다.
기존 직업을 가지고 있던 이들과 사업체를 유지하던 곳들이 파산하겠지만.
‘그건 내가 처리할 문제가 아니지.’
이건 모든 소수 민족들을 왕국에 녹아들게 할 방법이었다.
이만큼 답을 찾아 줬으면, 나머진 다른 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는 물건을 배달하게 되는 건가.)”
곧이어 질문이 날아왔다.
“그렇습니다. 하기 싫다면 그저 이면 세계 이용을 허락하고, 세금만 걷으셔도 좋습니다.”
“(선택권을 준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왕국민과 얽혀 사는 게 장기적으로 보면 좋을 겁니다.”
“(이해했다.)”
온건파의 수장을 맞고 있는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다음 정글러 쪽도 움직였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 속을 꿰뚫어 보는 우리 신녀님께서 교섭을 진행한다면 우린 찬성이다.)”
정글러는 마치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듯 말했지만.
‘그럴 리 없잖아.’
당연히 사전에 말이 오간 상태였다. 애초에 지원 병력까지 보내 줬는데, 앞뒤 설명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당연히 잘 짜인 각본이었다.
“당연히 소수 민족의 일이니, 신녀님께서 교섭을 진행하실 겁니다. 그분보다 교섭에 뛰어난 분은 없으니까요.”
사막 쪽은 진과 정글러 쪽 대화를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과연, 그렇군. 그렇다면 우리는 찬성이다. 말라 죽느니 화합을 택하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를 구원해 준 그대는 믿을 수 있다.)”
정글러 쪽에서 시원하게 찬성하자, 사막 쪽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의견을 종합해 진에게 말했다.
“(이제야 막 사막은 하나가 되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부탁합니다.”
“(알겠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거부할 것 같진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이 다음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진에게 되물었다.
“예.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관해 대화를 나누실 차례입니다. 제가 어째서 지원군에 정글러 분들을 편성했는지 아십니까?”
사막 쪽 대표는 정글러를 바라보다 이내 진을 바라봤다.
“(……무엇이지?)”
“핵심만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 이 계획은 온전히 소수 민족분들의 힘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은 곧장 설명을 덧붙였다.
“왕국의 도움을 받는 순간 왕국의 영향력이 닿게 됩니다. 남은 손을 빌려 얻은 자유는 필연적으로 속박을 가져옵니다.”
“(……이해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민족이 다른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준 그대들의 도움에 감사를 표한다.)”
정글러 대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건 소수 민족의 일은 소수 민족이 해결한다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완벽하다 진짜.’
그 모습을 보며, 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부 맞는 말이고 합리적인 일이지만, 이게 다 그대가 귀찮아서 벌인 일이라니…….]
[내가 말했지? 쟤 똑똑하다니까. 뭐, 귀찮을 때만 똑똑한 게 문제지.]
솔직히 그 많은 소수 민족 문제를 내가 다 어떻게 해결해?
‘서로 돕고, 안면도 트고, 사업도 같이하고 얼마나 좋아?’
[허허. 틀린 말은 없다는 게 이리 화가 나는 일이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