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이게 마왕이다!
이면 세계의 마왕이 탄생했다.
이건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힘이다.
왕이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이면 세계에 아무도 살지 않으니까.’
이면 세계에 봉인된 정령들 덕분에, 이곳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왕의 탄생을 거부할 사람들도 없고, 이 땅의 주인도 없다는 뜻이었다.
‘일종의 날치기 당선?’
[……하여간 표현력 하나는 기가 막혀. 딱 맞는 표현이야. 원래라면 하나의 세상에 지배자란 개념을 새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좋아. 그럼 그거 가능한 거지?’
[당연하지. 한 세계의 왕이야. 무조건 가능하지.]
‘왕’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왕이 할 수 있는 일 때문이다.
“왕은 세상의 모든 영토를 소유해. 이곳만이 아니라, 이면 세계 전부를.”
세계의 왕은 세계의 모든 것을 소유한다.
신처럼 전지전능한 건 아니지만.
<……과연 그렇군.>
녀석은 뭔가가 느껴진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은 지도를 하나 꺼내서 녀석에게 보여 줬다.
“왕국 내부에 있는 대부분의 이면 세계는 파괴됐어. 하지만, 이쪽 소수 민족들이 사는 곳엔 파괴되지 않았어.”
지도를 빤히 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느껴진다. 해 보고 싶은 게 있다.>
“맘껏 해 봐.”
<올라가지.>
녀석의 말과 함께, 진과 마왕의 몸이 떠올랐다.
<될지 모르겠군.>
마왕은 그렇게 말한 뒤, 눈을 감고 자신의 힘을 사용했다.
곧이어, 변화가 생겼다.
쿠구구궁-
낮은 소리와 함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새로운 공간이 덧붙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호. 다른 곳에 있는 이면 세계를 덧붙이는 거 같은데?]
[허어. 이거 신기하군. 움직이는 힘만 해도 6종류가 넘는군.]
[그 힘들이 하나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생존하기 위해 서로의 힘을 공유하고 나누던 게 도움이 된 거 같은데요?]
정령들에게도 이건 꽤 놀라운 모습인지 복잡한 말을 해 가며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확장은 어느새 작은 대륙을 이루었다.
거대한 산맥, 늪지, 정글, 숲, 용암지대 등등.
모든 야만족들의 영토가 합쳐진 하나의 작은 대륙이.
‘이거지.’
모든 게 계획대로 되고 있음을 확인한 그때.
<그대의 말과 다른 점이 있다.>
마왕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왕국의 모든 이면세계가 폐쇄 됐다고 했지만, 멀쩡한 곳들이 있다.>
“뭐?”
<조금 이질적이며, 이면 세계와 연결이 끊어져 있긴 하지만 그 또한 이면 세계다.>
이면 세계를 변형해서 써먹을 만한 이들이 누가 있을까?
‘지식의 해방.’
녀석들이 아니라면, 이곳을 사용하고 있을 자들은 없었다.
“그 공간도 추가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그 또한 나의 영토이니.>
“부탁할게.”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 이면 세계는 나의 것이니.>
콰과과광-!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소리와 함께,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야생이 가득한 이곳에, 도시 일부분이 추가됐다.
“봉인이 해제됐다! 자리를 이탈한다!”
“하! 수호자 놈들이 살려고, 별 짓을 다하는구나! 봉인을 유지해!”
한데, 그곳엔 지식의 해방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수호자?’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있었다.
‘이건 또 뭔 일이야.’
* * *
수호자 상층부에게 이면 세계는 초대 수호자의 ‘유지’나 마찬가지였다.
초대 수호자가 이면 세계의 사용을 엄금하였으며, 왕국의 모든 이면 세계를 폐쇄했다.
그 이유는 수호자의 상층부에게만 은밀히 전해졌다.
‘이면 세계엔 마땅히 소멸되어야 할 것이 봉인되어 있다.’
그 존재를 봉하기 위해, 이면 세계 자체를 폐쇄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어냈다.
수호자의 정책에 맞지 않게 다소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이런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봉인’된 존재가 위험하단 뜻이었다.
덕분에, 수호자 상층부가 되면 ‘수호’하는 물건이나 지역이 사라지게 된다. 물론, 정말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면 세계’란 거대한 지역의 수호로 변할 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면 세계가 잊혀지고 그들의 업무가 줄어들자, 새로운 업무인 다른 수호자들을 도와주는 일이 추가됐다.
그런 수호자 상층부는 최근 이면 세계의 이상을 발견했다.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폐쇄되었으며, 이면 세계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건 눈속임이었고, 그 안에 암약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식의 해방.
원래라면 수호자들은 지식의 해방에게 개입하지 않았다. 그들의 수호하는 물건이 아니었다면.
하지만, 그들은 선을 넘었다.
초대 때부터 상층부에게 이어지는 수호 지역.
그런 이면 세계를 건드렸으니, 그들이 나섰다.
그때부터, 이면 세계에서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이면 세계를 폐쇄한다.”
이면 세계를 폐쇄하려는 수호자.
“침입자다!”
이면 세계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지식의 해방.
둘만의 전쟁이.
수호자들은 이곳을 금세 폐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이곳을 스스로 걸어 들어오다니…… 멍청한 놈들!”
지식의 해방은 멍청하게 당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 놓은 봉인 마법진으로 수호자들을 봉인했다.
“이곳은 폐쇄된 이면 세계입니다.”
“탈출 방법은?”
“……찾아보겠습니다.”
봉인된 수호자들은 봉인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써 봤지만, 실패했다.
“방법이 없습니다. 폐쇄된 지역을 매개체로 한 봉인이라 세계 자체를 없애지 않는 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봉인에 갇혀 죽음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데,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봉인된 영역이 부서지고,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봉인이 해제됐다! 자리를 이탈한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를 이탈하는 게 먼저였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하! 수호자 놈들이 살려고, 별 짓을 다하는구나! 봉인을 유지해!”
“유지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면 세계 전체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저들이 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제가 늦지 않은 모양이네요.”
“……허어! 계승자님!”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은 초대 수호자의 유지를 이어받은 ‘계승자 진 세인트’였다.
“구하러 왔습니다. 여러분.”
계승자의 등 뒤로 후광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건 진이 만든 후광이었지만.
원래 이런 건 분위기가 중요한 법이다.
* * *
뭐랄까, 거짓말도 계속하다 보니까 경지가 상승하는 것 같았다.
지식의 해방과 수호자의 말만 딱 들어도, 각이 딱 섰다.
‘이건 날로 먹을 수 있어.’
[……너 그러다 탈 난다.]
탈?
그럴 리가 있나.
“진 세인트…… 네놈이!”
지식의 해방 쪽에서 진을 알아봤는지,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쉿!”
하지만, 진의 한마디에 녀석들은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입만 다물었을까?
몸까지 벌벌 떨었고,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진은 나지막이 말했다.
“수호자분들은 조용히 제 쪽으로 물러서세요. 이면의 주인께서 화나신 거 같네요.”
수호자들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 뭔가를 물을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질적이며 압도적인 기운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수호자들이 움직이는 동안, 지식의 해방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여러분들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곳에 오셨겠지만, 그 자체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진의 말에 저번에 봤던 수호자가 입을 열었다.
“……초대 수호자께서 지키려고 하셨던 게 깨어난 겁니까?”
“이곳에 봉인되어 있던 게 뭔지 알고 계셨습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저희 상층부들만 이면 세계를 지키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들은 무엇이 봉인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럼, 약간의 각색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면 세계의 지배자입니다. 이곳은 그의 영지이자 영토입니다.”
“……한 세계의 지배자라니.”
“원래라면 아직도 잠들어 있어야 할 그분이 저들 때문에 깨어난 겁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존재감과 함께 거대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감히!>
단 한마디에 다리를 후들거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던 녀석들이 막대한 압력에 짓눌린 것처럼 꼬꾸라졌다.
“일단 돌아가세요. 그의 화를 풀어 주고, 해결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수호자의 말에 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야죠. 그래야 세상이 부서지지 않을 테니까요.”
세상이 부서진다는 말은 허황된 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저 존재를 인간이 막을 수 있을까?
고작해야 눈만 들어냈을 뿐인데, 이 정도의 힘인데?
“부탁드립니다. 계승자시여.”
세상의 주인이란 존재를 한 사람에게 맡기는 건 불합리한 일이었지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부디 세상을…….”
수호자는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세요.”
진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미소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굳은 각오로 자신들을 내보내는지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남기고, 수호자들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존경과 경외를 담아 진을 바라보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모든 수호자가 빠져나가고 난 뒤.
“컷! 그림 좋아!”
진이 소리쳤다.
허공에 뜬 눈이 사라지고,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면 되는 건가?>
“어. 너 재능 있는데?”
<……그런가? 대체 이게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군.>
녀석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진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쓸모는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그보다 이놈들, 의식 잃게 해 줄 수 있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말과 함께, 눈을 부릅뜨고 있던 지식의 해방은 눈을 감았다.
‘좋아. 이놈들은 사념 채굴장으로 보내버리면 될 거 같고…….’
그곳으로 보내면 자동으로 정보가 추출될 테니, 보내기만 해도 충분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게 있었다.
“외부에 보이게 이면 세계를 뒤흔들 수 있어?”
<힘이 좀 필요하지만 가능하다.>
“그것 좀 해 줘.”
곧이어 영역이 잘게 떨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좋아. 밖에는 뭔가 난리가 났다고 생각하겠지?’
복선은 완벽하게 던져 두었다. 이제 나가서 회수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이놈들이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야?’
진이 속으로 말하자, 안쪽에서 로메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대박이야 대박!]
호들갑 떠는 로메른의 목소리. 녀석들이 뭘 하고 있던, 그게 진에 도움이 되는 일인 모양이었다.
곧이어, 로메른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대박이야?’
[여기였어!]
‘그러니까 뭐가.’
[녀석들이 악마와의 계약을 진행하던 곳! 그게 여기였다고!]
‘……뭐?’
악마와의 계약이 진행되던 곳. 그런 곳에는 당연히 ‘사념’이 보관되어 있다. 계약을 위해 지식의 해방이 꿍쳐 둔 ‘사념’이.
‘역시 착하게 살면 하늘이 도와주는 법이지.’
[……하긴, 엄밀히 따지면 착하게 살고 있긴 한데.]
진은 마왕을 보며 말했다.
“사념이라고 알아?”
<사념?>
“악마들은 사념을 가지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너도 악마니까 할 수 있을 거야.”
마왕이 진짜 마왕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재료까지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