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124화 (124/210)

124. 마왕(魔王)

마왕(魔王).

최종 보스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이름이었지만, 진이 만들려는 마왕은 좀 다른 유형이었다.

세상을 파괴하고 다 때려 부수는 파괴자가 아닌, 일종의 ‘신’을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움직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그렇다. 그나마 몸이 괜찮은 나에게 다른 이들이 힘을 몰아주었다.)”

“살아남은 건 누구누구야?”

“(거짓, 전염, 저항, 죽음, 유리, 불굴…….)”

허무는 살아 있는 이들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꽤 많은 이들이 살아 있었다.

“일단, 아까 말했듯 회복은 안 되는 거 알지?”

“(알고 있다.)”

“게다가, 너희는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돼. 단순히 정령이 아닌 정령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거야.”

문제는 녀석들 개개인을 초월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한데, 초월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거 알지? 살아 남은 모두를 모아서 새로운 하나로 만들 거야.”

“(……중심이 되는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죽는 건가?)”

녀석은 체념하듯 읊조렸다.

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나를 살리기 위해 나머지가 왜 다 죽어?”

“(그럼 아닌가?)”

“당연히 아니지. 그 반대야. 모두가 살아서 통합되는 거니까.”

“(과연…… 모두를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거군.)”

“비슷해.”

뭐,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모두 너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어!’라고 해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다음?)”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끝이 아닌 거 알지? 흐름에서 이탈하면 다시 소멸할 거야.”

녀석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죽지 않을 방법이 찾았지만, 그다음이 있었다.

“네가 세상의 흐름에 들어야 돼.”

“(……세상의 흐름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세상의 흐름에 개입하는 건 녀석의 생각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진이 보기엔 아니었다.

“어렵지만 가능해. 세상의 흐름에 편입시킬 방법이 있어. 다만, 너희가 귀찮아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제긴 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귀찮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정령사이자 성자인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녀석은 진이 대정령사이고, 성자라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세상의 흐름에 끼어드는 게 뭐가 어렵다고.’

[……뭐?]

로메른이 떨떠름하게 되물었지만, 진이 보기엔 정말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그냥 세상에 쓸모가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각 나왔으니까 이건 나한테 맡겨.’

[대체 또 뭔 짓을 하려고…… 근데 한편으론 묘하게 신용이 가는 것도 신기하네.]

진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마왕을 세상에 도움 되게 바꾸면서, 뭔가 한방 역전을 노리는 그런 기가 막히는 계획!

“(나는 정령을 그만두겠다. 정령을 초월해 새로 태어나겠다.)”

“그래. 다시 태어나는 거야. 시작할게.”

그렇게 마왕 제작이 시작됐다.

* * *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봉인을 푸는 일이었다.

이쪽은 루나가 전문이었다.

루나는 봉인되어 있던 녀석들의 봉인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봉인 푼다고 문제 생기는 거 아니지?’

[뭐, 생기긴 하는데 너한테 위험한 문제는 아니야.]

‘어떤 문제가 생기는데?’

[지금 이 봉인은 일종의 보호막 역할도 하고 있거든, 봉인이 풀리면 소멸도 가속화될 거야.]

‘……서두르자.’

봉인은 녀석들을 구속하는 도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속되어 있기에 소멸이 느려진 것이다.

루나가 정령들의 봉인을 푸는 사이, 로메른은 곧장 악마를 소환했다.

<오랜만이에요. 진. 그런데…… 재미난 곳에 와 있으시네요?>

소환된 악마는 미모 후작이었다.

“어. 오랜만. 지금 좀 바빠서 그런데, 곧장 본론으로 들어갈게.”

진은 대충 인사한 뒤, 바로 용건을 말했다.

“리치 좀 빌려줘.”

<우리 자기를요?>

아. 진짜 커플 다 죽었으면.

진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켰다.

대신 품속에 있는 빨간 보석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소문 들어서 알고 있지? 이걸 대가로 치를게.”

<어머나. 이거 그거죠? 지옥에 난리가 나게 한 그 물건!>

그녀의 표정을 보니 거부할 거 같진 않았다.

“나 급해.”

<알겠어요. 잠깐만요!>

그 말과 함께, 허공에서 리치가 소환됐다. 리치의 팔을 껴안고 있던 레이스가 함께 소환되다가.

<너 뭐니! 잠깐 자리 비웠다고 이 도둑고양이가!>

다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진짜, 우리 자기는 너무 멋져서 불안해 죽겠다니까.>

“그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그래요?>

소환되자마자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진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둘에게 부탁할 게 있어.”

<저희에게요?>

“어떤 부탁이십니까.”

각기 다른 부탁이었다.

진은 먼저 리치에게 말했다.

“넌 실력을 빌려주면 되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미모 후작은 아직 고위 악마 아니지?”

<……아픈 곳을 아무렇지 않게 찌르시네요. 맞아요. 고위 악마가 되기엔 아직 한참 남았어요.>

“꽤 짭짤한 사업이 있는데, 힘 좀 빌려주지 않을래?”

<어머나. 사업이요? 어떤 사업이죠?>

진은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마왕을 만들고, 그 마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크고 거대한 계획을.

그 모든 계획을 들은 미모 후작이 진에게 물었다.

<……인공 악마를 만드는 일을 제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안 된다는 듯 말했지만, 그게 진심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네 도움이 없어도 만들 수 있어. 다른 악마를 구해도 되고, 악마의 도움 없이 일부 불안정한 부분을 감수해도 돼.”

그런 말과는 달리.

[미모 후작이 거절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아. 있어 봐. 일단 필요 없는 척해야 한다니까.’

미모 후작의 도움은 ‘필수’였다.

다른 악마는 계약으로 묶여도 믿을 수 없으며, 통제되지 않는다. 리치란 약점이 있는 미모 후작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니 허풍을 떨어야 했다.

“그런데도 네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리치 때문이야.”

진은 리치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리치를 사랑하는 그녀의 감정을 뒤흔들긴 딱이었다.

“난 앞으로도 리치랑 같이 일할 거야. 종종 악마의 힘이 필요하면 리치의 연인인 네게 부탁할 생각이고. 문제는 네가 너무 약하다는 거야.”

거기에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까지.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을 보니, 효과는 매우 좋은 듯했다.

<감히, 인간이 제게 약하다고 한 건가요?>

어. 음. 효과가 너무 좋았나?

그녀가 뿜어낸 힘에 피라미드 내부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미모 후작 간신히 중급이라며!?’

[어. 힘의 크기 보니까 중급 맞는데?]

‘무슨 중급이 이 정도야!’

진은 소름이 돋았다.

물론, 그녀가 공격하지 않으리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 인간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나 진 세인트야. 성자이며, 대정령사인 진 세인트.”

진의 당당한 말에, 주위를 가득 메웠던 힘이 사라졌다.

‘내 이름값이 이 정도였…….’

진이 우쭐하고 있을 때, 미모 후작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기 입으로 그런 걸 어떻게 말해요? 나 진 세인트야라니.>

그녀는 폭소를 터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는데.

[솔직히 나도 좀 웃기긴 했어.]

[저도요.]

[허허. 남자는 때때로 과시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라네.]

정령들까지 이러니 묘한 수치심이 밀려왔다.

“아무튼 할 거야, 말 거야?”

그제야 그녀는 웃음을 멈췄다.

<할게요. 원래라면 이런 위험이 높은 계약은 하지 않겠지만…… 당신은 언제나 성공해 왔으니까요.>

그녀의 대답과 함께, 로메른이 작성한 계약서가 그녀 앞으로 날아왔다.

<제가 수락할 줄 아셨던 거예요? 진짜 음흉한 성자님이시라니까. 아, 대정령사가 빠졌네요.>

“아, 쫌!”

그렇게 미모 후작까지 합류했다.

* * *

진은 한쪽에 앉아 성서를 편 뒤,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마왕 제작?

그건 진이 할 일이 아니었다. 그저, 일하는 척해 주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진을 빼고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왕 제작은 제법 흥미롭게 진행됐다.

<죽은 악마가 필요하다고 했지? 여기 있어.>

가장 먼저 죽은 악마를 구해왔는데, 진은 어떻게 구했냐곤 묻지 않았다.

그보다 죽은 악마의 시체는 뭔가 신기했다.

‘비닐 봉투?’

시체는 투명한 비밀 봉투를 뭉쳐 놓은 것만 같은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네. 이 틀에 우리가 내용물을 채워 넣으면 돼.]

로메른은 그 비닐 봉투를 ‘틀’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악마는 일종의 ‘개념’ 생물이야.]

‘개념 생물?’

[개념이 있기에 존재하는 생물인데…… 일단 봐. 그게 가장 빠를 테니까.]

그렇게 말한 뒤, 정령들에게서 뭔가를 떼어 내 비닐 봉투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태까지 봤던 악마처럼 뭔가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개념’이 존재하기에 형태가 존재하는 생물.

이걸 생물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진이 고민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죽음은 좀 떼어서 챙겨 놔!’

[안 그래도 챙겨 놨어. 어차피 다른 개념들도 전부 집어넣지는 못해. 가공하다 보면 부산물이 떨어지기 마련이야.]

정령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조금씩 챙겼다.

‘무보수로 일할 순 없잖아. 이런 건 알아서 챙기는 거지.’

[그렇지!]

로메른과 진은 죽이 척척 맞았다. 여기서 모은 힘들은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다른 힘은 몰라도 ‘죽음’이나 ‘불굴’ 같은 경우는 딱 맞는 주인도 있었으니까.

그 뒤로도 마왕 제작이 계속됐다. 개념을 집어넣을수록 틀이 터질 듯 부풀었지만, 그건 리치와 로메른이 강화했다.

점점 진행될수록 대충 감이 잡혔다.

‘이거 용골이 만들 때랑 비슷하지 않나?’

인공지능이 자리를 잡기 전 용암 골렘. 그때만 해도 정령들이 그곳에 탑승해 용암 골렘을 조종했다.

그것과 굉장히 비슷했다.

악마의 사체와 정령들의 개념을 이용해 육체를 만들고, 모든 정령들이 탑승해 함께 조종하는 로봇.

모두의 힘을 합쳐 새로운 하나를 만들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정답이야.]

그렇게 반쯤 완성된 마왕은 확실히 달랐다.

<하. 누구는 고위 악마가 되려고 이 일을 하는데, 이 친구는 시작부터 개념만큼은 고위 악마를 뛰어넘었네요.>

진에겐 딱히 느껴지는 게 없었는데, 악마에겐 느껴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마무리할게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진이 그녀에게 부탁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진이 만든 가짜 악마를 ‘인정’하는 것.

개념 생물인 악마에겐, 이 인정이 정말 중요했다. 악마의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진짜 악마가 된다.

마지막 개념인 ‘악마’가 그녀의 인정을 통해 추가됐다.

그제야, 그녀가 느낀 걸 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미친.’

엄청난 압박감.

그저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만으로도 진의 감정이 요동쳤다.

허무했으며, 격렬했고, 죽음을 느꼈고, 몸과 영혼이 유리되었고, 굴하지 않았으며…….

압도적인 개념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잠시 후.

녀석이 눈을 뜨자마자 그런 감정들이 사라졌다.

<성자이자 대정령사인 진 세인트여. 새롭게 태어난 나는 무엇인가.>

이제 마무리 단계였다.

“지옥이 밖에서 체류하는 유일한 악마. 이면 세계의 지배자. 마왕(魔王)이다.”

세상의 흐름에 쉽게 끼어들 수 없다고?

이면 세계의 주인이 끼어들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녀석도 그걸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나의 영토다.>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얽맸던 피라미드가 바스러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칙칙하고 어둡던 이면 세계에 달빛처럼 은은한 빛이 내려왔다.

<난 이면의 지배자다.>

마왕이 선언했다.

자신의 힘을, 영토를.

그렇게 이면의 마왕이 탄생했다.

‘제일 좋은 건, 이면 세계에서 못 나간다는 거지.’

[안전장치 확실하구만.]

이건 계획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면의 마왕, 세상의 흐름에 올라탈 준비는 됐어?”

<됐다.>

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 연기는 좀 하나?”

<……연기?>

녀석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괜찮아. 배우면 돼.”

<대체 이게 무슨…….>

“나만 믿어. 나쁘게는 하지 않는다니까.”

이면의 마왕은 씩 웃는 진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마왕은 자신이었는데, 눈앞의 성자가 더 나빠 보였다.

“마왕. 숨겨진 야만족들의 신! 이걸로 가자.”

<……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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