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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가의 정령 천재-123화 (123/210)

123. 과거의 잔재

그나마 다행인 건, 급한 불은 껐다는 점이었다.

엘프들이 모두 진의 영지로 이동했고, 그들이 살던 곳에는 거대한 토벽이 세워졌다.

진이 결과를 보여 주자 왕국 또한 신속하게 움직였다.

왕이 귀족들의 멱살을 잡고, 병력을 움직인 덕분에 토벽에는 곧장 병사들이 투입됐다.

여기서 끝이었을까?

아니. 아직 한 발 남았다.

성자가 추진한 계획에 교단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토벽 쪽으로 사제들과 함께 각종 지원 물품을 쏟아부었다.

일단, 시간을 벌었다.

이제 빠르게 소수 민족들을 회유 및 정리하고, 지식의 해방 쪽 계획을 분쇄하면 될 일이었는데…….

인생이 참 쉽지 않았다.

‘대체 여기 뭐야?’

진은 봉인된 정령에게 이끌려, 묘한 곳에 와 있었다.

[이면 세계라고 들어봤어?]

‘……이놈의 왕국은 뭐가 이렇게 끝도 없이 나오냐.’

[왕국 쪽에 있는 게 아니야. 그쪽에 있는 이면 세계는 모두 파괴됐어. 그나마 남아 있는 건, 이쪽 소수민족들이 사는 곳이야.]

‘……정글러들한테도 이런 곳이 있다고?’

[아니. 거긴 없어. 그런 신물이 묻혀 있는데, 이면 세계가 존재할 리 없지.]

바위틈이나 지하 속에 숨겨진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세상의 뒷면이란 말이 딱 맞았다. 야만족들의 영역이지만, 이곳에 야만족들은 없었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튼 여기가 저 녀석들이 사는 곳이란 거지?’

[살고 있다기보다는 이쪽에 봉인됐다고 보는 게 맞아.]

자신을 찾아왔는데 봉인이라니.

로메른은 그런 진의 생각을 읽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뭐, 봉인이 많이 느슨해진 거 같긴 하지만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걸 보니 봉인이 유지되고 있는 건 확실해.]

그렇게 로메른에게 설명을 듣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녀석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다.)”

로메른이 녀석의 말을 통역해 주지 않아도 여기가 목적지인 건 진도 알 수 있었다.

진의 눈앞에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었으니까.

‘여기 올 때까지는 못 봤는데…….’

이 정도 크기라면 당연히 오면서 봤어야 했다.

[멀리서 이곳이 보이지 않았던 건 아직 봉인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야.]

‘봉인과 관련된 건물이야?’

[어. 예전엔 삼각형을 마법진으로 사용했어. 그러니까 봉인을 하기 위해 저런 구조물을 세웠다고 생각하면 돼.]

여기까지 들으니, 새로운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봉인된 게 확실한데, 왜 그렇게 쫄았던 거야?’

[……봉인됐어도 여전히 위험하니까. 일반적인 정령들과는 달라. 적으로 돌리면 절대 안 돼.]

그렇게 로메른과의 대화를 끝내기도 전에, 녀석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너를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소멸해 가는 우리를 살려라.)”

살려라? 어떻게?

그에 관한 해답은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가 대정령사라면 가능할 것이다.)”

아. 대정령사면 뚝딱 가능한 거구나? 내가 괜히 어렵게 생각했어.

[하긴, 대정령사라면 가능하긴 하지…….]

심지어 로메른까지 이 말에 동의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로메른은 그런 쓸데없는 말만 하지 않았다.

[물론, 극에 도달한 흑마법사에게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젠장. 믿고 있었다구!

진은 대정령사가 아니지만, 로메른을 데리고 있다. 방법이 어떻든 원하는 걸 들어주면 될 일이다.

‘확실하지?’

[당연하지. 뭐, 대정령사의 방식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그런 사소한 건 괜찮아.’

해결할 수 있냐 없냐만 중요할 뿐이었다. 이쪽에 방법이 있다면, 주눅이 들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말투.”

“(그게 무슨 말이냐.)”

“도와 달라면서 말투가 그게 뭐냐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설마 대정령사가 미친놈일 줄이야.)”

녀석은 시니컬하게 말했지만, 진이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왜? 아니꼬우면 나 죽이고 니들도 소멸당하던가.”

배 째!

어딜 부탁하는 놈이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녀석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진을 바라봤다.

“(감히! 나에게 그딴……!)”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어딜 감히 성자한테 반말질이야!”

입으로 싸우자고?

그건 이쪽이 전문인데?

* * *

한참의 치열한 말싸움 끝에 나름의 합의점을 찾았다.

[이런 유치한 대화를 통역할 줄이야…….]

뭐, 로메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름의 결론이 났다는 게 중요했다.

그 결과.

“(빌어먹을 성자 같으니.)”

“응. 난 빌어먹고, 넌 소멸하고.”

웃으면서 서로에게 욕하는 절친과도 같은 관계가 되었다.

[그건 대체 어디의 절친인가요.]

진은 루나의 말을 사뿐히 무시했다.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게 녀석과 함께 진입한 피라미드 내부는 을씨년스러웠다.

[널브러진 붕대 보이지? 저건 이미 소멸한 녀석들일 거야. 안 풀려 있는 건, 소멸을 기다리는 녀석들일 테고.]

로메른의 말대로 곳곳에 풀려 있는 붕대가 굴러다녔고, 자신을 데려왔던 미라와 같은 녀석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우리는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녀석의 목소리는 조금 전 대화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후회, 분노, 절박함 등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들은 봉인된 뒤,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거야.]

그저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인생. 그게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우릴 종말에서 구원해 줬으면 한다. 부탁…… 한다.)”

“상황은 이해했어.”

이들이 원하는 건, 그저 살아남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긴 했다.

[이건 회복 못 시켜. 진짜 대정령사라면 어떻게 회복시킬 순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야. 봉인된 녀석들이 왕국으로 쏟아져 나갈 테니까.]

회복시킬 수 없는 건 물론이고, 회복되어도 문제였다. 그러니, 이걸 납득하게 만들어야 했다.

“우선, 솔직하게 말할게. 손상이 너무 커서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

녀석의 분위기가 일순 변했다.

곧이어, 녀석을 감싸고 있는 붕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더니 뭔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독한 허무.

모든 게 부질없고,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허무가 진의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허무 앞에 몸과 마음이 서서히 무너진…….

[쯧. 일단 풀어 줄게.]

그 전에 로메른이 끼어들었다.

머리 쪽으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이내 다양한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온몸에 감정이 들끓다 허무에 잡아먹혀 사라지고, 허무함이 물밀듯이 다시 차오르길 반복했다.

덕분에 감정이 잡아먹히는 동안 허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정해.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진이 입을 열자 그 허무한 감정이 곧장 사라졌다. 로메른은 타이밍 맞춰 날뛰는 감정을 수습했다.

“(……과연 대정령사군. 내 힘을 이리 쉽게 극복하다니.)”

엄밀히 따지면 극복한 게 아니었다. 감정을 자극해 녀석의 힘인 ‘허무’를 잠시 멈췄을 뿐.

하지만, 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거지.”

“(좋다. 방법이 있다고 했으니 들어 보겠다.)”

“그전에, 뭐 안 된다고 할 때마다 이럴 거야? 너희한테 써야 할 힘 너 때문에 쓰고 있는 거 알지?”

“(……알겠다. 앞으론 함부로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

다짐까지 받았으니, 이제 다음 차례로 넘어갈 차례였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로메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부터 알아야 돼.]

‘원인?’

[저 녀석들이 왜 소멸하는지 알아?]

‘봉인당해서 그런 거 아니야?’

[뭐, 그것도 영향이 없지는 않지만, 녀석들이 담당하는 힘이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서 그래.]

눈앞의 녀석처럼, 이곳에 있는 정령들은 끔찍한 것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허무, 공포, 죽음, 분노 등등 부정적인 감정이나 어두운 부분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 힘을 사용하는 다른 존재가 떠오른다.

‘……악마들?’

[정답이야. 정령들이 봉인된 사이, 악마들이 그 개념을 흡수했어.]

‘그래도 되는 거야?’

[세대교체라고 생각하면 돼. 악마들은 계약으로만 움직이니 이 녀석들보다 위험하지도 않고, 문제될 것도 없어.]

‘이 녀석들의 멸종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맞아. 세상에 필요하지도 않으며, 위험하기만 한 과거의 잔재야.]

그야말로 세상으로부터 죽음을 부여받은 이들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치료한다고 소용이 있는 거야?’

[단순히 치료만 하는 거면, 그다지 의미가 없어. 뭐, 회귀 전을 생각하면 무조건 치료해야 하지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 녀석들은 그냥 소멸당하지 않았어. 자신들을 봉인했던 세상에 복수했어.]

‘어떻게?’

[악마가 녀석들의 개념을 흡수했듯, 녀석들은 악마가 되었어. 그것도 굉장히 이질적인 악마가.]

눈앞의 이 녀석들은 멸망의 또 다른 조각이었다.

[악마처럼 계약에 종속되지 않고, 정령과는 달리 인계에 개입할 수 있는, ‘마왕’이 되었거든.]

로메른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 그렇게 말한 뒤.

[한참 뒤에 벌어질 일이어서 일단은 내버려 둔 건데, 성장도 안 된 상태로 녀석들을 만나게 될 줄 몰랐어.]

‘좋아. 상황은 이해했어. 어차피 해결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그럼 해결에 집중하면 된다.

‘해결 방법은?’

진의 물음에 로메른은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마왕을 만들자.]

이건 못 참지!

* * *

진은 로메른과 한 대화를 녀석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이미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것인가…….)”

녀석의 말에는 지독한 허무가 묻어 있었다.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죽을 거야? 세상이 버린다고 버려질 거야?”

“(……세상의 의지를 성자이자 대정령사인 네가 거부하라고 말하는 건가.)”

세상의 의지는 신의 의지였으며, 정령사는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는다.

진은 이런 말을 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그 흐름이 정상이라면, 나도 이런 말 안 해.”

“(……그건 무슨 말이지?)”

“지식의 해방 때문에 세상이 난리인 거 알지?”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람의 정령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녀석들이 세상의 흐름에 개입하고 있어. 어디서부터 변했을지 모를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게 맞을까?”

솔직히 말하면 모른다.

개소리일 수도, 진짜 지식의 해방이 세상의 흐름에 개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개소리가 의미 없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린 공동의 적을 두고 있을지도 몰라. 세상이 정말 너희를 버렸을까?”

공동의 적을 설정하면 서로의 관계가 더욱 두터워지기 마련이다.

“(……모르겠다. 우리가 봉인된 건 굉장히 오래된 일이다. 그들이 개입했다고 확답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그 변화가 가속됐을 수도 있지.”

“(그건 부정할 수 없군.)”

녀석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들을 봉인했던 인간들은 이미 죽었고, 복수의 대상도 없다.

하지만 진 덕에 복수의 대상이 생겼다.

자신들의 울분과 분노를 풀 존재가 눈앞에 생긴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아니면 말고.’

어쨌든, 녀석들은 복수의 대상이 생겼고 진은 지원군이 생겼으니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이었다.

[너는 진짜 나쁜데 좋은 놈이야.]

진은 곧장 녀석을 보며 말했다.

“세상이 너희를 버렸다고?”

버리라면 버리라지.

이쪽은 다른 방법이 있다.

“그럼 새로 태어나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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