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상부상조?
왕궁 알현실.
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애초에 정치적인 문제였다면, 교단에 속해 있는 전 조용히 물러섰을 겁니다.”
왕은 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은 차치하더라도, 진이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일종의 공격입니다.”
진이 여기서 할 일은 간단하다.
“자세히 말해보게.”
왕에게 지금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는 확신만 심어 주면 될 일이었다.
“잠시 자료를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꺼내만 놓고 우선 설명부터 하게. 검토는 나중에 할 터이니.”
진은 자료를 꺼내 옆에 둔 뒤, 곧장 설명을 이어갔다.
“전 조금 새로운 관점으로 지식의 해방 쪽 움직임을 추론했습니다.”
그렇게 진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야만족을 움직이기 위해 수작을 부리고 있는 지식의 해방과, 진을 묶어 두기 위해 움직이는 내부의 첩자들.
설명이 이어질수록 왕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아니라고 하기엔, 공교로운 점이 너무 많군.”
그는 이 이야기의 핵심을 캐치했다.
진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고 하기엔, 상황이 너무나 공교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진의 주장을 무시하기엔 그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야만인들이 각 지역에서 밀고 내려오면, 왕국은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는 혼란에 빠질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야만족들이 준동하려면 엘프란 벽을 넘어야 한다는 점이겠군.”
왕의 말처럼 엘프들이란 1차 방벽이 있긴 했지만, 그들이 막아 줄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최악을 가정하셔야 합니다. 야만인들을 회유했는데, 엘프라고 회유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최악의 상황엔 엘프들과 야만족이 연합해 왕국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오랜 세월 가장 많은 전투를 경험한 엘프와 야만인.
만약 그들이 연합한다면 그건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왕국 내부에도 문제가 있고, 외부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전 발이 묶여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진은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왕국을 위해! 세상을 위해!”
성스러우면서도 간절한 진의 목소리.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목소리에 감정이 움직였겠지만, 진과 대화하고 있는 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 나라를 이끄는 ‘왕’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 계산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었다.
‘기회군.’
왕이 보기엔 이건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첩자 색출이란 명목으로 얼마든지 정적을 처리할 기회.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왕은 자기 생각을 숨긴 채 진에게 물었다.
“내부적 문제를 왕께서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의 대답에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한데, 그런 표정과는 달리 왕의 입에선 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내게 큰 짐을 맡기는군. 나의 신하들을 의심하고 색출하라니.”
마치 거부하는 듯한 말투.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진이 곧장 사과하자, 그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되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대의 요청이니 어쩔 수 없지. 내부의 일은 내게 맡기게.”
“정말 감사합니다.”
왕은 그렇게 말한 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외부의 일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
“우선, 엘프들을 지식의 해방이 찾을 수 없는 곳에 격리할 생각입니다.”
“그들을?”
“예. 차라리 변수를 줄이고, 그곳에 정령의 힘을 이용해 거대한 토벽을 쌓을 생각입니다.”
왕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격리하기엔 그들의 힘이 아깝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을 격리한 뒤, 천천히 설득할 생각입니다.”
“어떻게?”
“그들을 격리하는 순간, 기존 왕국과 한 약속은 깨지게 됩니다. 그러니, 새로운 약속을 할 생각입니다.”
엘프와 왕국의 약속을 한 사람에게 맡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여태까지 무욕하디무욕한 모습을 보여 준 성자라면?
‘엘프를 내주는 대신, 왕권을 그 어느 때보다 강화할 수 있다.’
어차피 통제도 되지 않던 엘프들 아닌가. 내줘도 문제가 없었다.
다만, 방벽을 지키던 이들이 사라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엘프들을 해결한 뒤에 소수 민족 문제를 해결할 생각인가?”
방벽 자체가 필요 없는 상황이 온다면, 문제될 게 전혀 없었다.
“아닙니다.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현재 사막과 늪지대에는 저희 쪽 인원이 투입된 상태입니다.”
“그렇군.”
“혹시라도 시간이 부족할 수 있으니 엘프들을 빼낸 뒤, 각 지역에도 거대한 토벽을 쌓을 생각입니다.”
진의 계획은 완벽하지 않았다. 곳곳에 구멍이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부족분은 왕이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영역이었다.
“왕국의 방위군과 귀족들의 사병을 방벽으로 보내 주겠네.”
“그 말씀은…….”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네의 계획을 허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원래라면 이리 간단하게 허락할 일이 아니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해 이런 결정을 내린 걸세. 다음엔 이리 쉽사리 허락받지 못할 걸세.”
진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작은 조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의 베릴 조교수라는 자가 있습니다. 전 그자에게서 ‘악’을 보았습니다. 그자를 위주로 조사하시면, 마탑 쪽 일은 빠르게 해결되실 겁니다.”
“흐음. 참고하지.”
진은 복수도 잊지 않았다.
마탑의 모든 조사는 베릴 조교수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3류 엑스트라에게 해주는 대접치고, 꽤 융숭한 대접이었다.
* * *
진이 다녀간 뒤.
왕궁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폐하! 이건 아니 될 일입니다!”
“어찌하여 저희를 이리 대하신단 말입니까!”
“평생을 왕국을 위해 일하였나이다!”
대신들은 갑작스러운 일에 거세게 항의를 표했지만.
“이 자료는 성자 세인트 남작이 가져온 자료다.”
자료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성자가 가져왔으니 날조된 자료일 리도 없거니와, 자료의 내용은 무엇 하나 틀린 게 없었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정보를 검증했고, 증명했다. 허점이 없으며, 추론은 완벽했다.
뭐, 실제로 강박증이 걸린 사람이 만든 자료니 당연한 일이었다.
“감찰부의 권한을 줄이자고 했던 이들과 세인트 남작의 월권을 주장했던 이들은, 철저한 조사가 이뤄질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허어.”
귀족들은 직감했다.
지식의 해방과 연관된 이는 확실히 죽을 것이고, 만약 연관되지 않다고 해도 왕에게 약점이 잡힐 것이란 것을.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탑의 베릴 조교수를 포박해 와라. 베릴과 관련된 모든 이들 또한 조사 대상이다!”
조교수 베릴을 중심으로 마탑의 교수와 장로들 또한 줄줄이 왕궁으로 끌려왔다.
그들도 귀족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지식의 해방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왕국은 철저하게 그들과 싸울 것이다!”
주요 귀족들은 왕에게 약점을 잡히거나 조사를 위해 어딘가로 끌려갔고, 마탑 마저 왕의 영향 아래 들어왔다.
지금부터는 왕의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왕국에서 난리가 난 동안, 진 또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러분을 어머니의 품 안으로 보내기 위해 왔습니다.”
왕에겐 엘프들을 격리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자신의 영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시여!”
“왕국과의 약속은 끝입니다! 여러분은 어머니의 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머니시여! 감사합니다!”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러 오셨다!”
“자유다!”
엘프들이야 진을 ‘어머니 나무의 화신’으로 알고 있으니, 설득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세계수 곁으로 오라는 말을 거부할 엘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러분 모두가 살 곳이 있습니다. 모두가 어머니의 곁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어머니시여!”
“어머니의 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어머니시여! 그대 곁에 있겠습니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 진의 영지와 엘프들의 영지는 지하 도시를 만드는 중이었다.
지하긴 해도 세계수 곁에서 생활하는 건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들을 데려가면 당장 급한 일도 해결할 수 있다.
‘일꾼으로도 쓸 수 있을 테니 아직 개발 중인 지하 도시도 진행이 빨라지겠지.’
정령과 초능력을 각성한 엘프들이 도와준다면 상상 이상으로 빨라질 것이다.
게다가, 진이 어머니의 화신이다 보니 엘프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받을 수 있었다.
“대지의 정령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제 곁으로 모여 주세요. 저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거대한 토벽을 쌓겠습니다.”
“예. 어머니시여! 도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덕분에, 토벽을 쌓는 건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끝났다.
이렇게 빠르게 끝내다 보니,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벌써 끝나신 겁니까?”
“예. 토벽이라고 해도 정령의 힘으로 하는 일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토벽을 올라가는 길과 병사들의 자리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빠르게 파견을 부탁드립니다.”
“기, 길까지요? 아, 알겠습니다!”
진의 실력은 너무나 드높아 거대한 성벽을 만드는 데 불과 몇 분이 걸리지 않으며.
“자. 줄 서서 통과하세요!”
“예! 어머니시여!”
“……엘프들을 굴복시키신 겁니까?”
“굴복이 아니라 그저 작은 인정을 받았을 뿐입니다.”
“저 엘프들의 인정이라니…….”
그 드높은 실력을 보고 엘프들이 굴복하여 진을 ‘어머니’로 모신다는 허무맹랑한 소문.
그런 소문들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묘한 결과는 내놓았다.
<진 세인트 남작은 전설의 ‘대정령사’다!>
전설의 대정령사.
진이 보기엔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어처구니없는 소문이었는데.
“(그대가 대정령사라고 바람이 해 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린 대정령사를 기다려 왔다.)”
엘프들 흡수가 끝났을 때,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이거 무슨 언어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언어와 옷 대신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독특한 복색까지.
처음 보는 종류의 야만인이었다.
[……정령어야.]
‘정령어?’
정령어를 사용하는 야만족?
그런 진의 생각과는 다른 대답이 로메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거, 정령이야.]
‘……뭐?’
아무리 봐도 정령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 붕대는 옷이 아니야. 봉인 술식이 빼곡히 적힌 특수한 붕대야.]
‘봉인?’
[진. 세상 모든 개념이 정령이 될 수 있는데, 이 세상에 왜 끔찍한 정령들이 없는 줄 알아?]
그 말을 듣자마자 진은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 끔찍한 놈들이 저놈들이란 거야?’
[……그래.]
‘위험하진 않은 거지?’
[당장은.]
‘당장은?’
[네가 대정령사라는 소문 듣고 찾아왔다니까. 용건이 있을 거야.]
‘야 잠깐만!’
문제가 있었다.
진은 대정령사가 아니란 점이었다.
‘아닌 거 걸리면?’
[……안 걸릴 거야. 안 걸려야 돼.]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걸리면 끝이었다.
저딴 대답을 하는 거 보니, 로메른이나 검성, 루나도 답이 없는 거 같았다.
“(함께 가자.)”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난 대정령사다!’
메소드 연기.
지금부터 대정령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