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돌입
애초에 야만족이란 명칭은 어떻게 붙게 되었을까?
야만족이라 불리는 정글러들은 실제로 야만적이지 않다.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고, 정치 시스템이 있다.
신녀가 왕국 정치판을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건, 정글러들과 왕국이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생활 양식과 문화가 다르다고, 야만족으로 멸시했을까?
전혀 아니다.
왕국 곳곳에 사는 소수민족들이 야만족이란 이름으로 묶여서 불리게 된 건, 과거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탐험가 이멜의 ‘이멜 탐험기’를 보면 그에 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식인과 인신 공양’을 한다. 그야말로, 야만족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충격적인 내용이 세상에 발표되고, 야만족은 교류의 대상이 아닌 경계의 대상이 됐다.
소수 민족들을 야만족으로 부르며, 멀리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건 진에게도 중요한 정보였다.
‘섞일 수 있는 이들’과 ‘섞일 수 없는 이들’로 야만족들을 분류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분류를 거쳐 진은 최적이 인물들을 선발해서 보냈다.
답이 없는 이들에겐 죽음을.
회유가 가능한 이들에겐 희망을.
* * *
말릭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늪지대를 거닐고 있었다.
철퍽. 철퍽.
그의 발소리가 늪지대 곳곳에 울려 퍼졌다.
‘즐겁다.’
정말이지 진의 곁에선 끝도 없이 즐거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진 님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이런 재미난 걸 만끽할 수 있었을까?
말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피의 길이라니.’
처음 그에 관해 들었을 땐,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둔 무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늪지대를 걷고 있을 때.
“(죽어라, 침입자!)”
해골을 뒤집어쓰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녀석이 돌연 기습했다.
물론, 그건 말릭의 감상평일 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저 모습을 봤다면, 끔찍하다고 했을 것이다.
말릭은 그 기습을 피하며 소리쳤다.
“(피의 길!)”
진에게 배워 온 단어를 소리치자, 기습했던 녀석이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하지만 말릭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는 말을 소리칠 수밖에.
“(피의 길!)”
“(감히 신성한 피의 길을 탐내다니! 용서치 않겠다!)”
갑자기 상대의 적개심이 더욱 불타올랐다. 말릭은 그 모습을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진 님의 말대로다.’
싸우고 싶으면 이 말을 소리치라고 했는데.
“(피와 죽음을 두려워하는 너희 겁쟁이들은 결코 피의 길에 올라서지 못할 것이다!)”
그 말대로 싸움이 벌어졌다.
말릭은 진한 미소를 지은 채 다시 한번 소리쳤다.
“(피의 길!)”
“(널 죽이고 심장을 꺼내 먹어 주마!)”
해골을 뒤집어쓴 남자가 창을 집어 던졌다. 그 창에는 불쾌해 보이는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창.
원래라면 반응조차 못할 속도였지만, 영약을 먹은 말릭은 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보인다.’
말릭의 눈에는 그 창의 궤적이 보였다. 창이 그리는 죽음이 보였다.
철퍽.
한 걸음을 옮기고.
‘일해라. 쓸모없는 놈아.’
살해의 업의 힘을 억지로 끌어 온다. 그 힘으로 상대가 자신에게 보낸 죽음을 지배한다.
창이 만든 죽음의 길이 온전히 말릭의 손에 들어온다.
‘돌려주마.’
말릭은 팔을 뻗어 날아오는 창을 손으로 붙잡았다.
“(무슨!)”
창을 던진 녀석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날아오던 창의 힘에 말릭의 몸이 휘청거렸다. 말릭은 창을 힘으로 멈춰 세우지 않았다.
그저, 그 힘을 이용해 몸을 반 바퀴 돌려 자신에게 창을 던진 놈에게 돌려보낼 뿐.
말릭은 창을 던져본 적도 없지만, 빗나갈 거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
‘길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녀석이 만든 죽음을 빼앗아, 그대로 되돌려 보냈으니까.
퍼억!
창은 녀석의 가슴을 꿰뚫고.
쿵.
떨어져 있는 나무에 박혔다.
타인이 만든 죽음을 빼앗는 놀라운 일을 했음에도, 말릭의 표정은 찌푸려져 있었다.
‘어긋났군.’
그가 생각한 만큼 완벽하지 않았다.
‘아직 한참 부족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그 부족을 채우기 최적의 공간이었으니까.
“(피의 길-!)”
말릭은 마나를 담아 진이 알려준 마법의 단어를 소리쳤다.
철퍽. 철퍽.
곳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시작이다.’
말릭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곳은 그에게 천국이었다.
* * *
중형 범선.
그 위에 노바와 아이들이 타 있었다. 물론, 아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허허. 모래 위를 항해하는 배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구먼.”
망령들도 함께였다.
말릭이 ‘전투’를 위해 파견됐다면, 노바와 아이들은 ‘전쟁’을 위해 파견됐으니 당연한 인원 분배였다.
“원래는 하늘을 나는 게 목표셨다고 주인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늘을?”
“예. 산악 부족을 상대하러 갈때는 하늘을 날아 그들에게 바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허허.”
노인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상식으론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는 빠른 속도로 사막을 가르며 나아갔다. 중간중간 모래 먼지가 피어오르며 배 위를 뒤덮었지만, 노바와 아이들은 그 먼지를 피하지 않았다.
“좋다.”
오히려 모래와 뜨거운 햇빛을 즐기듯 그것들은 만끽했다.
이곳이 바로 아이들의 고향이었기에.
그때, 배 안쪽에서 경보가 울렸다.
-상황 발생! 상황 발생!
-전방 지하에 이상 생명체 발견.
-샌드웜으로 추정.
그런 경보음과 함께 무언가 모래를 뚫고 튀어나왔다.
캬아아아-!
녀석의 커다란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곧장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배에 타고 있는 이들 중에 그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은 전투 준비를 끝낸 채 눈을 빛내고 있었다.
“허허. 재미난 녀석이 나왔군. 이 늙은이들은 물러서 있을 테니 직접 해 보게.”
망령들은 마치 아이들에게 양보하듯 말했다.
원래라면 노바와 아이들이 상대하기엔 버거운 적이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시간이 없다고 하셨으니, 빠르게 끝내고 넘어간다.”
노바의 뜻을 확인한 아이들은 곧장 용수바람 주위로 모였다. 한 방에 끝내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모두의 힘을!”
용수바람이 소리치자, 주위 아이들의 힘이 한데 모여 노란바람의 몸에 주입됐다.
용수바람의 감각.
살바람의 예리함.
날파람의 집중력.
그 모든 힘과 재능이 노바의 몸에 담기고,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난 주인을 지킨다!”
그런 힘 위로 노바는 ‘신념’을 담았다.
검성이 검산에 남긴 그 검이, 노바의 손에서 구현되기 시작했다.
“나의 검은 주인을 위해!”
노바의 뒤에 있던 성령이 노바의 손을 잡고, 힘을 보태 줬다. 이 검은 노바의 신념이며, 아이들의 모든 힘이었다.
서걱.
작은 소리와 함께, 거대한 샌드웜의 머리가 양단됐다.
한데, 망령은 샌드웜이 아닌 하늘을 보고 있었다.
“허허. 강제로 이런 기술을 구현한다니…….”
노인은 작은 구름이 베어진 걸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흐읍!”
“큭!”
“……!”
“후우. 후우.”
당연히 이런 기술을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노바는 물론이고, 노바에게 힘을 빌려줬던 다른 아이들까지 침음성을 흘리며, 몸을 휘청였다.
엄청난 페널티 같지만, 의외로 가벼운 페널티였다.
넷이 부담을 나눠 받기에, 누구 하나 전투 불능이 되지 않았으니까.
“이건 좋은 선물이 되겠네.”
노바는 샌드웜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빨을 챙길까?”
“어. 샌드웜의 이빨이면,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거야.”
사막의 공포인 샌드웜.
그 샌드웜을 죽였다는 증표인 샌드웜의 이빨은 다른 부족을 방문하는 입장권이 되어 줄 것이다.
“사막이 우리를 환영하는 거 같아.”
노바가 씩 웃으며 말하자, 다른 아이들 또한 환하게 웃었다.
“허허. 좋을 때구먼.”
모래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
고향이나 다름없는 그곳이 마치 아이들을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배는 모래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노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 * *
‘제정신인가?’
진은 오랜만에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딴 일 때문에 사막에 못 갔다고?’
아니. 솔직히 사막에 못 가게 된 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굉장히 어처구니없다 못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잖아!’
이쪽은 세상을 구한다고 별 생 쇼를 다하고 있는데, 발목이 잡힐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나름 인정할 만한 녀석이 발목을 잡았다면 돌발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삼류 엑스트라가 진의 발목을 잡았다.
진의 눈앞에는 정식 ‘항의서’가 도착해 있었다.
보낸 사람은 베릴 조교수였다.
‘너무 엑스트라여서 누군지 한참 고민했네.’
진의 발목을 붙잡은 엑스트라는 다름 아닌 마탑의 조교수였다. 빈 플린트를 갈구던 그 조교수 말이다.
“정말 미안해. 진.”
덕분에, 빈 플린트가 진에게 와서 이런 사과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니야. 형이 왜 미안해.”
“……그래도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아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기억도 나지 않는 삼류 엑스트라가, 감히 성자이자 감찰부인 자신을 건드렸으니까.
게다가 타이밍이 아주 묘했다.
‘원래라면 그냥 권력으로 짓이겼겠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타이밍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왕국의 소란이 점점 수습되면서,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감찰부 권한 축소 이야기를 슬금슬금 꺼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탑의 조교수가 항의를 표했으니, 상황이 재미나게 돌아갔다.
‘쉽사리 건들기 힘들어 졌단 말이지.’
게다가, 녀석의 항의를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진짜 짜증이 나네. 마치 내가 곤란해할 만한……. 잠깐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뭔가 이상했다.
타이밍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자로 잰 듯한 완벽한 타이밍.
이건 노렸다고 보는 게 맞았다.
‘왜? 이게 나한테 무슨 큰 영향이 있다고?’
고작해야 항의다.
진에게는 실질적 타격이 없다.
고작해야 발이 묶이는 정도다.
‘아니지. 내 발을 묶는 게 목적이라면?’
지식의 해방이 어떻게든 진의 발목을 붙잡고 싶었다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고,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형. 조교수한테 연구 뺏긴 적 없어?”
“……어?”
형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내 연구를 참조하시거나, 내가 조금 도와드린 게 있긴 하지만…….”
형은 뒤늦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건 100% 확실했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어.’
조교수가 형의 재능을 시기해서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연구를 폐기하고, 마탑에서 나가는데 어째서 다가왔을까?
‘말도 안 되지. 마탑을 나온 마법사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건데.’
싫어했다면 오히려 쾌재를 부를 상황 아닌가.
그렇게 진의 생각이 거의 다 정리됐을 쯤.
“……정말로 나쁜 분은 아니야. 내 연구를 소형화로 전환하는 아이디어도 그분이 주신 거니까.”
빈 플린트가 마지막 조각을 던져 주었다.
‘이놈 봐라?’
적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진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또 나쁜 생각 한다. 이번엔 또 무슨 개판을 치려고?]
‘솔직히 이건 각이 너무 좋잖아.’
왕국에 숨어 있는 놈들을 걷어 낼 찬스였다.
‘군침이 싹 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