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예? 영감님?
추기경은 곧장 교황을 찾아갔다.
그는 교황을 만나자마자 환희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교단의 오랜 염원이었던, 노예 제도의 폐지를 추진할 기회입니다.”
“추기경, 이런 혼란한 시국에 가능하겠습니까?”
교황의 물음은 합당했다.
왕국이 혼란한 틈을 타 노예제를 폐지한다면, 간신히 수습되고 있는 왕국에 다시금 혼란이 퍼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흔들리지 않았다.
“성자께서 교황청에 방문하신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예. 오자마자 곧장 추기경을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성자께서 제게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진이 추기경의 입에서 등장하자, 교황의 태도가 조금 변했다.
부정적이던 모습에서 관심을 두는 모습으로.
“어떤 길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태 성자의 말이다.
그가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모든 일에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교황도 잘 알고 있었다.
“성자님의 다음 목표는 왕국에서 핍박하는 다민족들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말입니까?”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기에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추기경은 천천히 진에게 들은 정보를 교황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들은 교황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식의 해방이 다민족들을 이용하기 위해 암약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교황이시여.”
지식의 해방이 야만족을 움직이는데, 어째서 노예제 폐지로 결론이 나온 걸까?
교황은 그 물음의 답을 찾았다.
“이 또한 신께서 그리신 커다란 계획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신념 가득한 추기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성자께서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리실 때마다 교단의 힘으론 결코 불가능한 것들이 계속해서 해결됐습니다.”
“추기경께서는 이번에도 해결이 되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교단은 언제나 한 발 늦었습니다. 그저 성자께서 문제를 해결하면 뒷수습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교황은 추기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보였다.
“이번에도 성자님의 뒤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추기경이 말할 때마다 몸에서 신성력이 꽃처럼 피어났다.
하나 그는 그걸 느끼지 못하는 듯 설명을 이어 갈 뿐이었다.
“성자님께 모든 일을 맡길 것이었다면, 우리 사제들은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진을 만나 부서진 신념을 고쳤고, 진을 도와 신의 거대한 뜻을 발견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단지 여기서 멈췄겠지만, 추기경은 달랐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번에야말로 교단은 성자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신의 뜻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한 발을 내디디며, 추기경은 여태껏 넘지 못한 벽을 넘어섰다.
거대한 성화(聖化)가 추기경의 등 뒤로 피어났다.
신성력으로 만든 꽃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 * *
진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교황과 추기경의 대화를 훔쳐 듣고 온 로메른의 보고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뭐라고?’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추기경이 벽 넘었어. 나도 추기경급이 벽 넘는 건 처음 봤는데…… 신성력의 꽃이 폈다니까?]
하나 진이 놀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노예제 폐지가 왜 나오냐고!’
영감님이 움직일 건 예상했지만, 노예제 폐지란 카드를 꺼내 들 줄은 몰랐다.
[하긴, 그것도 추기경이 벽 넘은 것 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지. 추기경은 네가 노예제 폐지를 위해 신의 뜻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
아니. 그런 뜻 없다.
전혀! 낫띵!
뜻을 받기는 무슨…… 직접 정보를 분석하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내린 결정이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곰곰이 고민해 보면 상황도 아니었고.
‘결과는?’
[교황이 허락했어. 벽을 넘으면서 해 달라는데, 이건 해 줘야지.]
맞는 말이었다.
사제는 ‘신앙’의 힘으로 성장한다.
벽을 넘을 정도로 강한 ‘신앙’을 보여 주며 한 주장이었다. 사제라면 이건 절대 거절할 수 없었다.
‘노예제를 폐지하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게?’
[……그건 나도 모르지. 우리 땐 전부 다 죽였으니까.]
교단이 여태까지 노예제를 폐지하지 못한 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다.
그저 노예를 해방하고, 야만족을 받아들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에게 있는 노예랑 각 지역의 야만족이 다 따로니까 이건 어떻게 해 보려고 해도…….’
그렇게 말을 이어갈 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최근 이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었다.
제각각 나뉜 걸 억지로 하나로 묶은…….
‘통합 계약서!’
계약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로 만든 새로운 계약. 진은 이걸 보고 ‘주식회사’를 떠올렸다.
‘야만족 부족 하나가 회사라면?’
팔려온 노예를 다시 되돌려주고, 주식을 받는다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머리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지만, 진은 이럴 때 쓸 수 있는 치트키가 있었다.
진은 곧장 밖으로 나와 성기사에게 요청했다.
“왕궁에 정글러들의 신녀가 지내고 있습니다. 그녀를 최대한 빠르게 교황청으로 데려오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데려오세요.”
그 이후, 곧장 추기경을 만나러 이동했다.
‘바쁘게 움직이고 계실 줄 알았더니.’
왕국과 교섭을 위해 치열하게 회의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 방에 계셨다.
진은 영감님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영감님이 젊은 영감님이 되어 있었다. 노년에서 중년과 노년 사이로 되돌아온 젊은 영감님.
“성자님을 진심으로 돕고자 움직였더니, 신께서 제게 시간을 더 주신 거 같습니다.”
그제야, 로메른이 호들갑을 떤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작해야 벽을 넘어 조금 더 강해진 게 아니었다.
“그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자님.”
진은 영감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기다리셨다고요?”
“예. 저로 인해 교단이 변했으니, 새로운 뜻을 내려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영감님은 당연히 진이 해결책을 가지고 올 거라 생각한 것이다.
진은 너무 믿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잘하셨습니다.”
“역시!”
그럼, 그 믿음에 보답해 줄 차례였다.
“제게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구체화 시키는 건 추기경님께서 해 주셔야 하지만,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은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주식회사니, 주식이니 하는 말은 전부 빼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노예를 반납하면 명예패를 지급하고, 그 등급에 따라 매달 골드를 주잔 말씀이십니까?”
귀족이 환장하는 명예에 골드까지 추가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교단이 책임지고 매달 금액을 전달하는 겁니다.”
신용만 놓고 보면 왕국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게 교단이었다.
사제들은 무욕하며 욕심조차 부리지 않는다. 덕분에 투명하고 공정한 분배가 가능해진다.
우리 주주님들 땡잡으셨네!
“금액과 명예패에 관한 특전 같은 건, 의견을 종합해 적정선을 찾으셔야 합니다.”
영감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귀족들과 적정선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 과정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 정치적으로 살아온 귀족들과의 협상이니까요.”
그래서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혹시 정글러들의 신녀에 관해 들어 보셨습니까?”
“신녀 말씀이십니까? 최근 정치의 귀재로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그 신녀가 저희를 도와줄 겁니다.”
그녀는 협상에 있어선 ‘치트키’라 부를 만한 존재였다.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
진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 * *
교황청에 신녀가 도착하자마자 곧장 상황을 설명해 준 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진은 추기경과 신녀에게 앞으로 있을 모든 상황을 짬 때렸다.
나머지는 추기경과 신녀가 알아서 해 줄 터.
여기부턴 진의 영역 밖이었다.
한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신이시여. 당신의 명을 따라 모든 이들을 해방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나의 아이야.)”
신녀는 진만 알아들을 수 있게 정글러의 언어로 감사를 표했고.
“성자시여. 그대의 옆에서 계획을 돕겠습니다.”
영감님 또한 젊어진 만큼 의욕 넘치는 얼굴로 진에게 작별을 고했다.
진은 곧장 달란 백작가로 향했다. 아직 영약이 완성되기 전이지만, 이쪽 볼일이 끝났으니.
“나머지는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영약 제조에 개입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가장 신난 건 로메른이었다.
[달란 백작가의 비법이랑 짝퉁 세계수의 열매의 조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니.]
[저도 도울게요.]
신난 로메른과 루나가 투입되자 영약 제조는 점점 속도가 올라가더니, 빠르게 완성을 향해 달려갔다.
중간중간 돌발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마리아, 떨어져요! 위험해요! 어? 여기서 안정화되다니…….”
로메른과 루나가 지원하고 있는데다가, 마리아까지 있는 이상 ‘돌발 상황’이나 ‘운’ 때문에 실패할 리는 없었다.
“마리아. 그대는 행운의 여신이에요!”
소나는 그 모든 게 마리아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완성된 영약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이 향기, 느껴지세요? 청량하면서도 시원하고, 과육의 달콤함이 느껴지는 이 향기요.”
병에 담아 놓은 상태였는데, 이곳엔 달콤한 과일의 향기가 가득했다.
“이 향기가 바로 마나에요.”
그녀의 이야기만 들어도 영약의 효과가 기대될 정도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덕분에 즐거웠어요.”
“앞으로 종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진은 영약을 챙기고 마리아와 함께 영지로 복귀했다.
진은 곧장 지하로 내려갔다.
쾅-!
쾅-!
지옥에 도착했을 뿐인데, 안쪽에서 대련하고 있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진은 빠르게 특수 훈련장까지 이동했다.
‘와. 열심히 하라고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깔끔하던 특수 훈련장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색칠이라도 한 거 같네.’
곳곳에는 피가 묻어 있었는데, 중앙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피가 묻어 있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훈련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집합!”
진이 소리치자 실전을 방불케 대련하고 있던 아이들이 멈췄다.
노바와 아이들, 그리고 말릭까지 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의 눈은 번들거렸고, 독기가 가득했다.
진은 곧장 영약을 꺼내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훈련은 끝이야. 영약 먹고 기운 수습하고 바로 출발할 거야.”
조용히 그걸 지켜보고 있던 말릭이 입을 열었다.
“저도 먹어도 되는 겁니까?”
영약까지 줄 거라곤 생각지 못한 기색이었다.
“먹어. 이번에 임무 가면 십중팔구 죽을 테니까. 작별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렇습니까? 그럼, 감사하게 먹겠습니다. 선물을 두 개나 주시다니…….”
녀석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영약과 위험한 임무.
둘 다 녀석에겐 선물일 뿐이었다.
“다들 빨리 먹어.”
진의 말에 아이들은 영약을 마시고, 곧장 그 기운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준비까지 끝났어.’
아이들의 영약 흡수만 도와주면, 이제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