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전력. 이랄까?
어두운 숲.
그곳에 진이 조용히 서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고 엄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진은 한쪽 팔을 들며 말했다.
“돌입.”
그 말과 함께, 주위가 떨렸다.
노란 눈빛의 늑대들이 일제히 숲을 향해 뛰어갔고, 박쥐 떼들이 날아오르며 하늘을 메워 갔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녀오겠네.”
망령의 대장인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진 뒤에 있던 이들까지 움직였다.
“주인의 명을 따릅니다.”
노바와 아이들.
“복귀라 해서 걱정했더니. 이런 재미난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말릭까지.
모든 인원이 숲 안으로 돌입했다.
“우리도 움직이자.”
진의 말에 어둠이 일렁이며, 모든 언데드들의 지배자 리치가 등장했다.
“예. 성자님.”
기다렸다는 듯 로메른이 리치를 향해 다가갔다.
[진! 이쪽은 내가 조율할게!]
리치에게는 로메른이 붙었고.
[신성력 쪽은 제가 담당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진에게는 루나가 붙었다.
리치라는 고급 전력을 이 후방에 붙잡아 둔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 아무도 도망치지 못해.”
“물론입니다.”
리치는 곧장 지팡이로 땅을 찍으며 흑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리치란 놈이…… 마법 더럽게 못 쓰네!]
로메른은 리치의 마법을 보완하고, 더 효율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와 동시에 루나도 행동을 개시했다.
[로메른! 신성력만 따로 뽑아서 진에게 넘겨주세요!]
[아까부터 넣고 있어. 그냥 뽑아 쓰면 돼!]
진의 써클을 매개로, 로메른에게 신성력을 받아 성법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반적인 성법이 아니었다.
[피 좀 쓸게요.]
‘팍팍 써.’
성법에 피의 정령의 힘이 결합됐다.
성법의 자기희생과 흑마법의 혈마법을 하나로 묶어 만든 새로운 성법이었다.
[탈력감에 주의하세요!]
루나의 경고와 함께, 진은 몸에서 피가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색의 흑마력과 하얀색의 신성력이 융합되며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로메른이 그 마법진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부서져라. 공간이여.]
그 말에 맞춰, 숲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산산이 부서지듯 사라지고.
[격리되라. 내 뜻대로.]
커다란 막에 휩싸였다.
[차원 격리 마법진 발동.]
이제 이곳에선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근데 그 오그라드는 말은 왜 하는 거야?’
[…….]
로메른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허허. 그것이 바로 낭만인 법이지.]
검성은 흐뭇하게 웃으며 로메른을 두둔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아! 검성은 좀 조용히 하라고!]
‘아니라곤 안 하네.’
진은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돌입 후 2시간 뒤.
숲으로 들어갔던 인원들이 진이 있는 곳으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몸에 상처를 달고 나오긴 했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건 승리자의 얼굴이었다.
‘벌써 끝난 거야?’
상상 이상으로 너무 빨랐다.
이곳은 망령들이 잡아 온 대장의 지식 속에 있는 은신처들 중에 가장 큰 곳이었다.
그런 거대 은신처가 처리되는 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니.
늑대인간과 흡혈귀가 씩 웃으며 다가왔다.
“좋은 사냥이었다. 성자.”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만족스러운 복수였어요.”
“사상자는 없었습니까?”
늑대인간이 손가락으로 하늘 위에 떠 있는 마법진을 가리켰다.
“마법진 덕에.”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성자라고 해도 어둠의 주민을 회복시키다니, 정말 놀랐어요.”
그 말대로였다.
어둠의 주민인 늑대인간과 흡혈귀들은 신성력에 고통받지는 않았지만, 치료되지도 않았다.
“여러분이 절 도와주셨으니, 저도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물론, 개소리였다.
로메른과 루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흡혈귀와 늑대인간용 치료마법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난 네가 제정신인가 싶었다니까.]
[덕분에 혈마법이랑 성법을 엮는 단초를 얻지 않았어요?]
[그건 그렇지…….]
굳이 번거롭게 이런 효과를 마법진에 추가한 건 그저 호감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흐응. 교단의 생각은 잘 알았어요. 앞으로 우린 더 돈독해질 수도 있겠네요.”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대의 뜻을 확인했으니 전하겠다.”
지금까지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비즈니스적 관계였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저희가 할 말이에요. 복수도 하고, 든든한 아군마저 얻었으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젠 보다 더 진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마치 왕국과 교단의 관계처럼.
[치료술 때문에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는 그런 관계?]
로메른이 이죽거리며 말하자, 곧장 루나가 반박했다.
[우리 교단은 치료술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아요.]
[진은 휘두를걸?]
[그건…… 진은 의외로 선량해요.]
선량이면 선량이지 의외로 선량한 건 무슨 말이야.
진은 굳이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
로메른의 말이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왕국의 모든 교단에 치료법을 공유하겠습니다. 앞으로 치료를 원하실 때마다 각 도시의 교구를 방문하시면 됩니다.”
“모든 일족에게 전하겠다. 사냥이 더 즐거워지겠군.”
“이러면 저희도 더 활발하게 복수를 이어 갈 수 있겠네요.”
벌써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더 공격적으로 움직일수록, 왕국의 혼란도 더욱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그리고 이건 동료를 위한 선물입니다.”
진은 품에서 작은 패를 꺼내 늑대인간과 흡혈귀에게 건넸다.
“이 패가 있으면, 최우선으로 저희 도시에서 무구 제작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늑대인간과 흡혈귀의 눈이 반짝였다. 드워프에게 주문 제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고맙다.”
“귀한 걸 받았네요.”
고맙긴요. 제가 고맙죠.
영업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법이다. 뒷골목의 큰손들이 움직이면, 도시로 골드가 쏟아질 것이다.
그렇게 둘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게 도착했다.
“주인님. 명하신 대로 잡아 왔습니다.”
노바와 아이들은 주요 인물들을 생포해 왔다. 물론, 아이들의 손에 들린 건 적뿐만이 아니었다.
“이것도 버리고 올 수 없어서, 들고 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말릭이 살바람의 어깨에 축 늘어져 있었다.
“잘 주워 왔어. 그거 함부로 버리고 오면 큰일 난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허공을 보며 말했다.
“확인 끝난 거지?”
그러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말게. 죽은 이들조차 확인 사살했으니. 창고에 있는 물건은 노바에게 주었으니 가서 확인하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퇴근하죠.”
첫 번째 반격은 성공적이었다.
* * *
첫 반격이 있고 며칠 뒤.
진은 며칠간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각 교단에 어둠의 주민들에게 하는 치료법을 배포하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교황청에 서신까지 써서 보냈다.
그러는 사이, 영지의 지옥에서는 지식의 해방 쪽 정보가 쪽쪽 팔려서 정보 분석팀에게 전달됐다.
정보길드 지부장 얀드레.
진 쪽 정보 담당자 세이라 수녀.
전문가 중에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둘에게 맡겼으니, 결과만 기다리면 됐다.
한데, 그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자님을 뵙습니다.”
둘이 진을 찾아왔다.
이건 안 좋은 소식이었다.
많은 양의 정보를 분석하는 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건 시간이다.
‘그런 이들이 시간을 쪼개서 이곳에 왔다는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란 뜻이겠지.’
[특별한 정보는 없었는데…….]
은신처 쪽에서 잡아 온 녀석들의 정보는 생각 외로 김빠지는 정보들이었다.
왕국 곳곳에 난리가 난 지역.
그쪽에서 하려고 하는 일 등등.
이미 진이 알고 있는 정보였으니까.
그런데, 그 정보를 보고 이 둘이 왔다는 건 진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봤다는 뜻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복잡한 설명 따윈 필요 없습니다. 핵심만 압축해서 말해 주세요.”
진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라 수녀가 입을 열었다.
“현재 지식의 해방을 분석한 결과. 너무 약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식의 해방이 들고 일어나니 어쩌니 했는데, 막상 그 결과를 까고 보니 충분히 대응할 만했다.
뭐랄까, 기대 이하였다.
“저는 지식의 해방 쪽 역량이 기대 이하라고 판단했지만, 얀드레 님은 달랐습니다.”
얀드레는 그녀의 말을 받으며 말했다.
“성자님의 적이 이리 약할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그러니까…….
‘저거 편집증이라니까!’
물론, 진은 얀드레의 생각에 동감이었다.
“얀드레 님의 주장대로 지식의 해방이 강하다는 전제로 정보를 분석해 봤습니다. 그러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얀드레를 그녀 곁에 붙이는 건 정답이었다. 얀드레의 편집증이 발견의 단초가 된 것이다.
세이라는 서류 뭉치들을 꺼내며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여러분의 분석을 믿습니다. 아까 말했든 핵심만 간단히 말하세요.”
진이 다시 한번 짧게 설명해달라고 말하자, 그녀는 서류를 전부 치운 뒤 지도 하나를 책상에 펼쳤다.
“이걸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마치 그녀는 이걸 어떻게 줄여야 하나 고민하는 거 같았다.
그러자, 얀드레가 끼어들었다.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드릴게요.”
얀드레는 지도도 필요 없다는 듯 곧장 진을 보고 말했다.
“지식의 해방이 야만족들 지역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습니다.”
“야만족이요? 어디요?”
그러자, 세이라 수녀가 곧장 대답했다.
“성자님께서 안정시킨 정글러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요.”
지도에는 수많은 빨간색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사막, 산, 늪지, 일부 소규모 정글 등등. 왕국의 영토이되 지배하지 않는 모든 장소에.
그곳들은 전부 야만족들의 구역이었다.
“왕국에 투입된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이 이곳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그제야 앞뒤 상황이 맞춰진다.
왜 찾을 수 없었을까?
이들은 왜 이렇게 약했을까?
계획이 무너져도 어째서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진짜로 노리고 있던 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진은 정보를 받자마자 곧장 노바를 찾아갔다.
“노바.”
“예. 주인님.”
“훈련량 최대로 올려.”
노바는 오늘 정보 담당자들이 방문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의 반응이 이렇다는 건, 그 내용이 좋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걸 활용해서 훈련해. 숙소도 내 방으로 옮겨. 자는 동안에도 훈련할 거야.”
얼마나 좋지 않길래 주인이 이러는 건지, 노바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데, 주인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네가 주인공이야.”
그제야, 주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지 감이 잡혔다.
“사막으로 가는 겁니까?”
“그래.”
진은 노바의 어깨를 두드린 뒤 평소처럼 느긋한 걸음이 아닌, 초조한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남겨진 노바의 눈엔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뜨거운 열기가 일렁였다.
“사막으로…….”
노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
노바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