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사업 설명회
악마들과의 만남은 꿈과 현실의 걸쳐 있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뤄졌다.
물론, 공간만 특별할 뿐 내부 모습은 평범한 회의실이었다.
진은 설명을 위해 앞에 나가 있었고, 나머지 이들은 커다란 책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곳에 참석한 이들은 망령들의 가족과 계약한 악마들이었다.
“지금부터 사업 설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동물, 마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등등. ‘이게 악마다!’라며 소리치는 것만 같은 외형이었다.
물론, 그런 외형과 달리 이곳에 모인 이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인간의 제의를 받아 계약을 하나로 묶으셨을 겁니다.”
악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을 모아 새로운 계약을 만들었다.
“여러분들께서 굳이 이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하며 계약을 새로 만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익을 위해서였다.
지식의 해방 쪽에선 새로운 계약은 집행을 뒤로 밀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한다.
악마들은 그 대가를 받기 위해 새로운 계약을 만든 것이다.
“계약은 뒤로 미룬다고 해도, 어차피 집행될 것이며 이런 이득이 있으니 악마 여러분들께선 손해 볼게 없으니까요.”
실제로 손해가 아니었다.
인간과 악마 둘이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달랐으니까.
악마에게 인간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손해가 없다면 진이 끼어들 수 없다. 이걸 손해로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있으실 걸로 보입니다.”
손해라는 말에 악마들이 반응했다.
<우리가 손해를 보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서열인 고위 악마 아길레스.
그의 목소리를 듣기만 했는데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고위 악마는 격이 달랐다.
“예. 여러분에겐 부수입일 뿐이지만, 인간들은 이것을 이용해 수많은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악마들은 없었다.
“제값을 받고 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아길레스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재밌군.>
그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자 주위에 있는 다른 악마들 또한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소란스러웠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이번에 여러분께서 하신 새로운 계약은 원래의 계약과는 좀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계약 집행을 미루고, 여러 계약을 추가하기 위해 빡빡한 악마의 계약을 느슨하게 바꿨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 계약은 제가 제값을 주고 사겠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계약을 제게 파시는 건 어떻습니까?”
악마의 계약을 양도받는 다는 건 원래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강제로 할 수는 있지만, 수많은 대가를 바쳐야 한다.
악마의 계약은 그만큼 빡빡하다.
하지만, 지식의 해방 덕에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이 정도로 느슨한 계약이라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로메른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건 불가능하지 않다. 진의 말을 들은 아길레스가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군. 제값을 치른다고 했는데, 그대가 우리에게 줄 것은 무엇이지?>
진이 원하던 질문이 나왔다.
“적어도 그 녀석들이 주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물건일 겁니다.”
진은 그 말을 하며, 품에서 작은 보석들을 꺼냈다.
“이건 저희 쪽에서 개발한 사념석입니다.”
진의 손바닥 위에 있던 보석들이 악마들에게 날아갔다.
“사념을 특수 처리해서 결정화한 물건입니다. 이건 지금까지 경험하신 사념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악마들은 진의 설명을 들으며, 사념석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물론, 지옥의 화폐로 사용하기엔 조금 부적절한 물건입니다. 사념은 사념이되 진짜 사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사념이 가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쪽으론 이건 굉장히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악마들은 사념을 크게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한다.
지옥의 화폐로 사용하거나.
그 사념을 먹거나.
진이 채 설명을 이어 가기도 전에.
콰드득.
아길레스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사탕을 먹듯 사념석을 깨물어 먹었다.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안에 맴도는 사념을 즐겼다.
꿀꺽.
그 모습을 보던 악마 하나가 침을 삼켰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이건 가짜 사념이군. 하지만, 용도를 먹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진짜보다 더 좋다. 녹아든 세월과 깔끔함이 대단하군.>
아길레스의 감상이 나오자, 다른 악마들도 일제히 사념석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콰드득.
와작. 와작.
사탕을 깨물어 먹는 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이내 묘한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 맛있어!>
<이렇게 농후한 맛이라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야. 가짜인데 진짜 사념보다 더 맛있다니!>
<어쩜 이렇게 깔끔한 맛이 날 수가 있는 거지!?>
진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념 가짜였다. 하지만, 가짜기에 가능한 일도 있다.
원래의 사념으론 만들 수 없는 것들을 만들 수 있었다.
시간 배속을 이용한 긴 시간.
특수 처리로 만든 깔끔한 맛.
진은 지옥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떠십니까? 만약 제게 계약을 넘겨주신다면, 계약에 따라 이 사념석을 꾸준히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진의 말을 들은 아길레스가 입을 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거부할 악마는 없어 보이는군.>
그렇게 지식의 해방이 만든 새로운 계약은 진에게 적대적 인수 합병되었다.
‘이 회사는 이제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겁니다.
* * *
왕국의 어딘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이들이 원탁에 모여 있었다.
“지식의 해방을 위해.”
가장 상석에 있는 이가 입을 열자.
“지식의 해방을 위해.”
나머지 이들이 똑같이 대답했다.
“긴급회의를 신청한 이유를 보고하라.”
상석에 있는 이가 입을 열자, 한 남자가 곧장 입을 열었다.
“악마 계약 중 일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악마와의 계약은 문제가 발생할 수 없을 텐데?”
“그게…… 좀 이상합니다. 망령들 쪽 계약의 소유권이 저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
상석에 앉은 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의 계약은 주요 인물들의 약점이며, 목줄이었다. 그들의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준비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중요한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빈틈이 있다고 알려지는 순간, 모든 계약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망령들 쪽이면 아길레스일 텐데, 녀석은 뭐라고 하지?”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하필이면…….”
고위 악마인 아길레스는 하급 악마와는 달리 언제나 연락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연락을 하는 대도 대가가 필요했고, 연락을 받지 않아도 감수해야 했다.
고위급이기에 이런 계약을 가능하게 만들어 줬지만, 반대로 고위급이기에 이런 불편이 발생했다.
그는 곧장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망령들의 계약만 문제가 생겼다면 망령들이 개입했을 터, 그쪽을 확인해라.”
그나마 남은 방법이라곤 문제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뿐이었다.
“망령들이 계약이 저희 손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터인데 그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망령들을 조사하는 건, 피해가 동반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쪽도 전력을 보강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중위급 이들을 소집해라.”
이렇게 되면 왕국에 피워낸 혼란이 조금 사그라들겠지만, 지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상석에 앉은 이는 나가보라는 듯 손짓한 뒤, 생각에 빠졌다.
“대체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악마와의 계약은 법칙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 *
지식의 해방 쪽과 비슷한 대화가 진의 영지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계약은 문제없이 해결됐어.”
진의 말에 노인은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네.”
“말 잘했네. 그 은혜 바로 갚아.”
노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얼마든지 갚겠네.”
물론, 농담하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지식의 해방 쪽도 이미 악마들과 연결이 끊긴 걸 눈치챘을 거야.”
“흐음. 우리를 의심하겠군.”
“맞아. 귀족이면 몰라도 망령들은 나름의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진이 원하는 건 간단했다.
“본격적인 녀석들이 영감님들을 노릴 거야. 그중에 한 명만이라도 생포해 줬으면 해.”
망령들을 잡기 위해선 꽤 상부에 있는 이들이 움직일 터, 하나라도 붙잡는다면 지식의 해방에 더욱 가까워진다.
“흐음. 그건 쉽사리 약속하기 힘들다네. 우리를 노리고 올 테니 우리를 압도할 만한 병력을 데리고 올 걸세.”
그건 진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병력이 어디서 올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지식의 해방도 병력이 무한하지 않다. 왕국에 소란을 일으키는 이들이 망령들을 잡으러 올 게 분명했다.
“아마 지금 쓰고 있는 병력을 돌릴 수밖에 없을 테니 왕국의 소란도 잠잠해질 거야. 지원군을 붙여줄게.”
노바와 아이들. 그리고 말릭.
고작해야 다섯밖에 안 되는 지원이지만, 힘의 격차를 좁히기엔 충분한 지원이었다.
“그대는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가?”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식의 해방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나를 주시하고 있을 거야. 여기서 내가 움직이면 아예 공격을 하지 않을 수도 있어.”
“과연 그렇군.”
“애들의 위치를 알려줄게. 나머지는 맡겨도 되지?”
“충분하네. 함정을 파고, 잡아먹는 건 우리들의 두 번째 특기지.”
두 번째?
진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는?”
노인은 씩 웃으며 한 단어를 말했다.
“살인.”
노인은 그 말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저게 은퇴한 거라고?’
고작 한 단어로 소름을 끼치게 할 수 있다는 걸 진은 처음 알았다.
‘후. 그래도 다행히 잘 끝났네.’
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해먹 위로 몸을 던졌다.
출렁.
뛰어든 진 덕에 해먹이 출렁였다. 진은 흔들리는 해먹에 누워 속으로 소리쳤다.
‘아! 진짜 너무 아쉽잖아!’
인공 사념이란 획기적인 물건을 만들어 냈는데, 생산량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진짜 유리 같은 정신력들.’
억지로 쥐어 짜내면 일순 생산량은 올라가지만, 미쳐서 더는 사념이 생산되지 않았다.
결국, 일일 생산할 수 있는 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아. 진짜 아쉽네.’
인공 사념을 이용해 모든 악마를 개처럼 부리는 날먹 라이프를 꿈꿨지만, 그 라이프는 멀어 보였다.
‘계약이 더 있을 수 있으니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시간만 있다면 악마 쪽 계약들은 전부 구매할 수 있잖아. 거대한 계획 하나가 인공 사념으로 무너진 거야.]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래도 휴식 시간은 확보가 됐네.’
진은 기지개를 켜며 햇빛을 만끽했다. 남들이 일할 때 쉬는 게 진짜 쉬는 거다.
‘날씨 좋다.’
* * *
며칠 뒤.
망령 팀이 복귀했다. 당연히 지원군으로 붙여줬던 노바 팀과 말릭도 함께 복귀했다.
그들은 커다란 마차를 하나 끌고 왔는데, 진은 그 마차에 실린 게 뭔지 느껴졌다.
진한 피 냄새.
“수확은?”
진이 마차를 바라보며 묻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을 생포했다네.”
지식의 해방을 찾아낼 단서가 굴러 들어왔다.
“지하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