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115화 (115/210)

115. 나비 효과

돈도 아니고, 누가 납치된 것도 아니며, 젊음 같은 영생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을 원했을까?

“우선 약조를 받고 싶네.”

“약조?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내가 성자니까 영감님들이랑 대화하는 거야. 힘이 모자라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서슬이 퍼런 진의 말에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가 성자이기에 약조를 받고 싶은 걸세.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우리가 그리 멍청하지 않은 것도 알고 있을 거 아닌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진이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노인을 상대한다고 생각하지 말게. 몸은 늙었다고 해도 머리마저 굳어 있진 않을 터이니.]

‘은퇴한 감찰부 요원에 대한 평가치고는 평가가 높네?’

[엄밀히 따지면 감찰부가 아닐 세. 감찰부의 전신이 되는 조직이지. 뭐, 저들이 은퇴할 때쯤엔 감찰부로 변했긴 했지만.]

저들의 정체를 밝힌 건 다름 아닌 검성이었다.

저들이 휘두르는 검과 사용하는 마나를 보고 그 정체를 곧장 알아차렸다.

‘데스 블레이드는 무슨.’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술명과는 달리, 저 힘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반쯤은 금지된 지식이 가미된 저들의 기술은 일반적인 마나 블레이드와는 그 궤가 달랐다.

‘저들이 마지막이란 거지?’

[그렇다네. 저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고스트’들일세.]

감찰부의 전신 ‘고스트’ 소속이었던 망령들이 바로 노인들의 정체였다.

‘죽이진 않았네?’

이렇게 위험한 인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죽이는 게 더 위험하니 내버려 둔 걸세. 세월의 힘 앞에 바스라질 이들인데 굳이 들쑤실 필요 없지 않겠나.]

그건 맞는 말이었다.

“어떤 약속을 해 주면 되는데?”

“우리의 후손들을 절대 죽이지 말게.”

그건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저 약속은 뭔가 이상했다.

“후손이 지식의 해방에 속해 있지 않다면, 죽이지 않을게.”

“그 정도 조건이라면 나도 동의 일세.”

이 조건을 수락한다고?

‘대체 뭐지?’

노인은 진이 반드시 자손들을 죽일 거라 생각했으니, 이런 약조를 덧붙인 것이다.

진은 고민을 이어 가다가, 이내 때려치웠다.

“말해 봐.”

노인에게 들으면 될 일이었다.

진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인의 말에 집중했다.

“악마의 계약과 관련된 일일세.”

한데 생각지도 못한 주제가 나왔다.

‘악마가 여기서 왜 나와?’

그가 약조해 달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악마와 관련된 문제니 교단에 속한 진은 곧장 죽일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선입견일 뿐이었다.

로메른 덕에 악마들과는 좋은 관계를 이어 오고 있었다.

“좋아. 이야기해 봐.”

“자네가 악마에 관한 전문가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네.”

“이미 알고 있다고?”

“뒤퐁 자작가에서 구마 의식을 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저 수확 기간을 2년 뒤로 미뤘을 뿐이었다.

“왜? 구마 의식이 필요하기라도 해?”

진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망령들의 가족 중 악마의 계약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 이는 뒤퐁 자작가가 유일하네.”

“……뭐?”

“어처구니없겠지만 사실일세. 망령들의 가족 중 한 명씩 악마와 계약한 자가 있다네.”

누가 이런 개수작을 벌였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식의 해방.”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해 보니 악마와 계약하는 지식을 준 이들은 모두 지식의 해방이 맞더군.”

진은 어이없거나 당혹스럽기 보다는 소름이 끼쳤다.

‘지식의 해방이 하는 일은 대부분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놈들이 싸질러 놓은 똥이 여전히 왕국 곳곳에 있는 거 같은데? 차라리 다행이야.]

‘지금 이 상황이 다행이라고?’

[이놈들도 급한 거야.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사용하는 중이니까. 나중에 이 힘을 필요한 순간에 꺼내 쓴다고 생각해봐.]

최악보다는 차악이었다.

어쨌든 로메른의 말대로 상황이 정말 안 좋은 건 아니었다.

“좋아. 멍청히 당하고 있을 린 없었을 테고, 망령 쪽에서 준비한 건 뭐야?”

망령들이 지식의 해방에게 약점 잡혀서 끌려다닐까?

‘당연히 아니지.’

약점을 잡히면 그걸로 끝이라는 걸 이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자네일세.”

한데, 또다시 생각지 못한 말이 나왔다.

“나?”

“지식의 해방이 저들을 막기만 해 달란 의뢰를 했을 거 같은가?”

그럴 리 없다.

마음먹고 죽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양반들이었다.

“그래도 팔다리 자른 건 좀 심하지 않아?”

문제는 자신을 부르기 위해서였다면, 굳이 팔다리를 자를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렇다네.”

“뭐?”

“위협적이더군.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가 제압됐을 걸세.”

“…….”

요약하자면 노바와 아이들이 너무 잘 싸워서 어쩔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성자의 기사들인데 회복되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네.”

“틀린 이야긴 아닌데…….”

“흐음. 사과하지. 그대의 표정을 보니, 이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군. 늙은 티가 여기서도 나는 구먼.”

이게 뭔 개소린가 싶었는데.

[거짓말이 아닐세. 망령들이 팔다리만 잘랐다면 엄청난 호의를 베푼 걸세. 게다가 붙일 수 있게 잘랐다? 저들이 없었다면 망령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걸세.]

영감님들 대체 어떤 시대를 살아오신 겁니까.

어쨌든 악의가 없다는 점은 확인했다.

“상황은 이해했어. 하지만, 사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지. 노바!”

“예. 주인님!”

노바가 다가오자, 진은 노인에게 턱짓을 했다.

“들어서 알겠지만, 손속이 과했던 점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다만, 나중에도 한 수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사과의 의미로 원하는 만큼 대련해 주겠네.”

“대련이 아닌, 오늘 같은 실전을 겪고 싶습니다.”

“허허. 감찰부가 물렁물렁해졌다고 생각했더니, 그건 착각이었군.”

나이스, 노바!

진은 목 끝까지 나온 말을 억지로 삼켰다. 대신 노바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러면 영지로 데려와서 써먹을 수도 있겠네.’

그 주인에 그 기사였다.

노바는 ‘어디’에서 한 수 배울지 쏙 빼놓고 말했다. 나중에 영지에서 배우겠다고 하면 영감님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좋아. 상황 정리 끝났으니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 대체 지식의 해방이 어떻게 악마 계약을 약점으로 잡은 거야?”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바로 이 점이었다.

[방법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한 거지? 망령들이 확인도 안 하고 먼저 움직였을 리가 없는데.]

로메른이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진짜 방법이 없는 것이다.

“계약 집행을 1달 뒤로 미뤄 주었네.”

“……뭐?”

“자신들의 말을 들어줄 때마다 집행을 뒤로 미뤄 준다고 하더군.”

“……자세히 말해 봐.”

“그들이 말하길 계약을 하나로 합쳤다고 했다네. 그렇게 하나라 합친 뒤 계약 집행을 뒤로 미룰 수 있도록 악마들과 협상을 했다고 하는군.”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었다.

계약을 전부 모아 커다란 하나의 ‘계약’을 다시 만들고 그 계약을 통해 집행을 뒤로 미룬 것이다.

[이거 우리가 사용한 방법을 고대로 사용한 거 같은데?]

‘그냥 사용하기만 한 게 아니야. 심지어 발전까지 했잖아!’

발상의 전환이 어려운 법이지, 한 번 발상을 전환하면 응용은 어려운 영역이 아니다.

계약을 모아 새로운 계약을 만드는 건 일종의 주식회사 느낌이었다.

악마들은 계약만큼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한테 이 계약을 깨 달라는 거야?”

“어렵겠나?”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어려운 것도 아니야.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망령들이 8명이지?”

“……자네 눈이 정말 좋군. 맞네.”

“명색이 악마가 연루되어 있는데, 그 녀석들과 전부 싸워서 계약을 물러 달라는 건 나보고 죽으란 소리지.”

게다가 망령들에겐 말하지 못 했지만, 과연 계약이 8개로 끝일까?

왕국의 귀족이나 망령 외에 다른 이들의 계약이 추가되면?

지옥의 거의 모든 악마가 참여하는 거대한 주식회사가 되는 것이다.

그 계약을 깰 수 있을까?

‘지옥과 싸워서 이기란 소리잖아.’

아무리 성자라고 해도 지옥과 싸워서 이길 순 없다.

애초에 지옥은 적이 아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뜻인가?”

“기다려 봐.”

방법이 없으면 안 된다.

왕국의 귀족들과 망령들을 적으로 둔다? 그건 미친 짓이다.

기껏 유리해진 상황이 한 방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영감님들, 시간 얼마나 있어?”

“이제 한 달 반 정도 남았다네.”

한 달 반.

“나랑 약조 하나 하자.”

“약조?”

진은 바닥에 선을 하나 그었다.

“지금 들은 이야기는 절대로 발설하지 마.”

“……성자가 이런 말을 하니 무섭군.”

“내가 할 이야기는 더 무서울 거야.”

“알겠네. 절대 말하지 않지. 망령의 존재를 걸겠네.”

존재를 거는 약속이라면 충분했다. 진은 바닥에 선을 하나 그었다.

“선을 넘어야 해결할 수 있어.”

“……허어. 내가 생각하는 그 선인가?”

진이 말한 선을, 노인은 단박에 이해했다.

인간으로선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

진은 그 선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 얼마나 넘을 수 있어?”

노인은 씩 웃으며 바닥에 그은 선을 지웠다.

“시대가 달라지긴 한 모양이군. 우리 망령들에게 선은 없다네.”

와. 이건 좀 소름 끼쳤다.

진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내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대신 약속할게. 날 도와주겠어?”

노인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뭘 걸 텐가.”

조금 전 자신이 존재를 건 것처럼 무언가를 걸고 약속하라는 뜻이었다.

‘어디 보자. 값싸게 걸 수 있는 게…….’

진은 곧장 무엇을 걸지 떠올린 뒤 입을 열었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것.”

그 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신께 맹세코 약속을 지킬게.”

진에겐 값싸고, 남들이 보기엔 가장 값진 것.

진은 신을 걸고 약속했다.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목을 베었겠지만, 성자의 약속이니…….”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약속을 못 지키면 망령이 자네 뒤를 따라다닐 걸세.”

노인과 진은 손을 마주 잡았다.

“좋아. 그럼 바로 움직이자고.”

진은 그렇게 말한 뒤, 노바를 보며 말했다.

“노바. 앞으로 지식의 해방을 잡으면 영지로 보내. 흡혈귀나 늑대 인간 쪽으로 보내지 마.”

“예. 주인님.”

“영감님들도 도와줘.”

“……산 제물이라도 바칠 생각인가?”

“지식의 해방을 전부 붙잡아서 바쳐도 이 계약은 못 깨. 그보다 더 나쁜 짓을 할 생각이야. 말했지? 이건 선을 넘는 거야.”

“……알겠네. 그대의 말을 따르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망령들은 기본적으로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비꼬는 게 아니라 필요해서 그래.”

“그런 거라면 내가 제일 많이 가지고 있다네.”

“그럼 영감님은 나랑 같이 영지로 가. 그 기억이 필요해.”

“알겠네.”

이렇게 진이 망령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로메른 또한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 리치 쪽에 이야기 전해 놨어. 그쪽에서도 지식의 해방 놈들 잡으면 보내올 거야.]

‘알겠어.’

[근데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뭘 하려고 하냐고?

정말 간단했다.

‘지옥을 만들 거야.’

진이 만든 지옥이, 계약을 깨는 열쇠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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