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스케일이 왜 자꾸 커져?
연구실 이전은 연구 설비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옮겨야 하니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그건 일반적인 상황일 뿐!
“다 버려. 형.”
“연구 설비를!?”
“드워프랑 엘프가 있다니까. 다시 만드는 데 하루도 안 걸려. 내가 서신을 보내 놓을게. 도착하기 전까지 만들어 놓으라고.”
“그, 그런 게 가능해?! 진…… 너 대단하구나?!”
버리고 새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마법사의 실험 도구는 마탑 쪽 물건이 제일 좋다는 소리가 있지만, 그건 그 사람들이 드워프제 물건을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다.
비커 하나를 만들어도, 사람이 만든 것과 드워프가 만든 건 ‘격’이 다르다.
“진. 형이 어려서부터 너 정말 아낀 거 알지? 내 연구가 원래 널 위한 거였다니까?”
“알겠어. 빨리 짐 싸, 형.”
“잠깐만 기다려!”
진짜로 필요한 것들만 챙기면 되니, 이사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빈의 얼굴엔 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 빈의 미소가 일순 깨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빈 플린트 연구원. 연구를 중단한다니, 무슨 말입니까!?”
마탑에서 마법사가 찾아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중단?’
진은 빈 플린트에게 연구를 전환하자고 설득했는데, 그는 마탑 쪽에 연구를 아예 중지한다고 보고한 거 같았다.
“죄송합니다. 베릴 조교수님.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시제품이 나왔다고 이야기를 들은 게 며칠 전인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당연하지. 마법사가 연구비를 어디서 받겠어?]
마탑은 이미 형에게 시간과 골드를 쏟아부은 상태였다. 여기서 형이 연구를 중단한다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대체 왜 중단한다고 보고한 거지?’
진이 고민하고 있을 때, 빈 플린트가 입을 열었다.
“그 시제품이 문제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빈은 허리를 숙이며 눈앞의 마법사에게 사죄했다.
“마법 공학이니 그 말도 안 되는 걸 지원해 준 걸 잊은 겁니까?”
그런 빈에게 조교수는 불같이 잔소리를 쏟아냈다.
“요즘 마법사들은 이게 문제입니다! 문제가 생겼다고 도망치는 그 근성이······.”
그 수위가 점점 올라가더니, 반쯤은 인신공격이 되고 있었다.
“알량한 재능 좀 있다고 그렇게 날뛰더니 그게 이겁니까? 교수님은 당신의 말을 믿었겠지만, 전 믿지 않았어요! 마법사 같지도 않은······.”
조교수 입가에 언뜻언뜻 올라오는 미소를 보니, 녀석은 저걸 즐기고 있었다.
‘선 넘네?’
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만하지?”
적의 가득한 진의 말투에 그가 고개를 틀어 진을 바라봤다.
어린 진이 너무나 당연하게 반말을 하자, 그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기 시작했다.
“누구십니까?”
곧장 존댓말을 사용하는 거 보니, 꼴에 눈치는 있는 놈이었다.
‘아니. 눈치라도 있으니 조교수라도 하고 있는 거겠지.’
딱 사이즈가 나왔다.
빈 플린트의 재능을 시기한 조교수. 뭐 그런 하잘것없는 이야기인 게 분명해 보였다.
‘이런 놈들한텐 이게 특효지.’
진은 감찰부 배지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히, 히익!”
그는 그것을 보자마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름.”
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제, 제 이름은 어째서…….”
그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거 같았다.
“이름.”
“베, 베릴 조교수입니다.”
여기서 뭔가를 더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저 수첩을 꺼내서 그의 이름을 적었다.
“거기에 제 이름을 왜 적으시는지…….”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네가 뭔데 나한테 질문을 하지? 공무를 방해하는 건가? 아니면 감찰부 요원의 이름을 캐내 지식의 해방에 팔아먹을 생각인가?”
“죄, 죄송합니다!”
“그럼, 마탑 쪽의 의지인가? 감찰부의 개입이 불편한가?”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쯧.”
진은 혀를 차며 노트에 적은 그의 이름 위에 별 모양을 달았다.
눈앞의 조교수는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쪽 빈 마법사는 감찰 요원의 가족으로 우리 쪽에서 신변 보호한다.”
“······예?”
진은 또 질문을 하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알겠습니다!”
“알겠다? 기억하겠단 소리군.”
진의 서늘한 말에 그는 곧장 진이 원하는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머릿속에서 잊겠습니다!”
“플린트 남작가와는 대화가 끝났으니 마탑 쪽에서 손해 본 모든 금액은 그쪽으로 청구하도록.”
“예! 알겠…….”
진은 그의 말을 끊고, 경고를 덧붙였다.
“만약! 나중에 이와 관련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난 수첩을 열어 네 이름을 확인할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대화는 끝났지만, 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요즘 같은 때에 감찰 요원을 가족으로 두고 있는 자에게 폭언을 쏟아내다니······.”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빈과 진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뭐 하는 거지?”
“예?”
“용건이 끝났으면 가라.”
“예!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면 기억하지 못합니다! 바로 가 보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갔다.
빈은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때, 해결됐지?”
진의 말에 형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래. 해결됐어. 이러면 마탑 쪽에서도 별말 없을 거야.”
진은 여태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탑에 연구 중지라고 보고한 거야?”
진의 물음이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형이 말했다.
“왜냐니. 당연한 거잖아. 진 네가 제시한 조건은 연구자들의 꿈이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했는데.
[하긴, 꿈이나 마찬가지지. 연구비 제한이나 마감 기한도 없고, 맘껏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인데. 거기에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라도 달려간다.]
로메른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됐다. 진은 빈 플린트에게 천국을 만들어 준 것이다.
혹시나 다른 문제가 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았다.
“형이 마음에 들어 하니깐 좋네. 준비 끝났으면 가자 형.”
“그래!”
* * *
진과 빈, 미아는 세인트 영지에 도착했다. 빈 플린트는 영지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립식 성벽!? 성벽이 움직이고 있어!”
“뭐야. 철괴만 해도 왜 이렇게 질이 좋아!?”
“뭐!? 이게 일반 철괴야?”
“아니. 장비들 상태가 왜 이래? 이건 대체 어떻게 작업한 거야?”
“저게 대장간이라고!?”
“아니. 화덕에 용암이 있잖아!? 세상에 불 조절까지 돼!”
마치 놀이동산에 온 어린아이처럼 형은 잔뜩 흥분해서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미아는 그런 빈이 미아가 되지 않게 영주성까지 챙겼다.
진은 곧장 마그마를 불렀다.
“보스. 부르셨습니까.”
보스라는 호칭에 형은 신기하다는 듯 마그마를 바라봤다.
“이쪽은 내 형이야.”
“보스의 형님께 인사드립니다.”
마그마는 마치 뒷골목 깡패처럼 90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은 부담스럽다는 얼굴로 그 인사를 받았다. 뭐, 사소한 건 천천히 맞춰 가면 될 일이다.
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왔다.
“우리 형이 재미난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데려왔어.”
“어떤 계획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진은 빈을 바라봤다.
빈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전 이동식 도시를 만들려고 합니다. 도시 전체를 떠서 다리를 다는 계획이죠. 그러니까······.”
빈은 각종 도안과 설계도를 보여 주며, 어떻게 진행될지 설명했다. 마그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 설명을 진지하게 들었다.
잠시 후 설명이 끝난 뒤, 진이 마그마에게 물었다.
“어때?”
“전 마법이나 대장간 일에 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조율을 할 뿐입니다. 보스께선 이 계획을 추진하실 생각이십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추진할 생각이야.”
“그럼, 문제가 있습니다.”
진은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도시 발전 계획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쪽이랑 엘프 쪽?”
두 가지로 나눈다면 이게 당연한 일이었는데, 마그마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땅 위와 땅 아래로 나눠 작업하고 있습니다.”
“……땅 아래?”
“예. 이미 지하 도시를 건설 중입니다. 성벽으로 땅을 넓히는 것보다 지하에 도시를 만드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지하 도시란 말이 붙을 정도라고?
“도시 크기는?”
“땅 위 도시의 2/3 정도 크기입니다. 보스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무구를 만들다, 지하 작업에까지 동참해서 최근 영역이 많이 확장됐습니다.”
힐링광살포 덕에 빠르게 진행됐다는 소리였다.
‘대체 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잠깐 밖에 다녀오니 지하에 영지만 한 도시가 하나 더 생겼다.
‘이걸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의 힘을 발동시켰다.
‘로메른. 땅속을 볼 수 있게 조금만 조절해 줘.’
[알겠어!]
고개를 내려 아래를 바라보니, 그 말대로 땅속에 뭔가 커다란 공간이 곳곳에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공간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돌로 만들어진 집과 대장간들이 보였다.
‘……세상에.’
진이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리고 있을 때.
“오. 좋은데요?”
형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진. 이게 다리가 달린다고 도시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야. 지반이 붕괴하지 않도록 지지할 수 있는 일종의 몸통이 필요해.”
“그게 지하 구역으로 가능할 거 같다는 소리지?”
“맞아.”
형은 그렇게 말한 뒤, 종이 위에 무언가 수식을 적어 가기 시작했다.
“계산대로라면 적어도 한 4층까지는 있어야 땅이 무너지지 않을 거야.”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지하로 4층까지 있는 땅을 걸어 다니게 만들겠다는 소리야? 우리 땅은 여기서 끝이 아니야. 엘프들의 영역까지 포함할 거야.”
“그럼 더 좋지. 나쁘지 않아.”
이게 플린트식 스케일인가?
대체 얼마나 커다란 것이 걸어 다닐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걸 구동하기 위해선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건데…….”
막대한 에너지?
오히려 그쪽은 문제가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만들기만 해. 구동할 에너지는 걱정할 필요 없어.”
“진짜!?”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핵물질과 드래곤하트가 있는데, 에너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될까?’
[……난 가능할 거 같아서 겁나는데?]
그렇다면 이 흐름에 몸을 맡겨야 했다.
“마그마. 회의 소집해. 주요 인물들은 물론이고, 엘프들까지 포함해서 전부 불러.”
“알겠습니다. 보스.”
진은 판을 키웠다.
* * *
회의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드워프들과 빈 플린트.
엘프들과 진 세인트.
빈 플린트와 드워프들은 어떻게 작업할지 대화를 나눴지만, 엘프들과 진은 전혀 다른 대화를 나눴다.
“우리 쪽 영지와 엘프들의 영역을 포함해서 거대한 이동형 도시를 만들 예정입니다.”
“어머니시여.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동형 도시라니…….”
그건 진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 하트가 최종 병기인줄 알았는데, 진짜 최종 병기는 따로 있었다.
“뭐, 계획일 뿐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진짜 실현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진이 엘프들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도 엘프들을 부른 이유는 간단해요. 지하 도시를 만들 생각이에요. 지하까지 어머니의 나무를 키워서, 다른 엘프들을 받을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에요.”
“아!”
그녀는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렸다.
“먼저 지하로 그들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뒤에, 그들을 받을 방법을 고민해 볼 생각이에요.”
엘프들은 영역 너머를 지키며, 전쟁을 이어 가고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면 엘프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여러 정치적 문제가 있지만, 그건 천천히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시여. 많은 엘프가 어머니 곁에 있고 싶어 함을 알고 계셨군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대신, 드워프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어머니시여.”
지하 4층이면 최소한 4개 부족은 더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새로 받은 엘프들은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진을 위해 일해줄 것이다.
‘이동형 도시는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실패해도 엘프는 남겠지.’
실패해도 나쁘지 않고, 성공하면 더 좋고!
그렇게 진이 음흉한 계획을 진행하고 있을 때.
[진. 비상 신호가 발신됐어!]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뭐!?’
이 비상 신호를 달고 있는 건 노바 일행과 말릭뿐이었다. 정말 심각한 상황에서만 울리게 되어 있었다.
‘말릭이야?’
[……아니. 노바와 아이들 쪽이야. 상정 이상의 실력자가 튀어나온 거 같아. 아마…… 지식의 해방 쪽 고위직을 만난 거 같아.]
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위직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