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108화 (108/210)

108. 유지를 따르는 자들

기사 단장과 대화를 마친 수호자는 진의 방을 찾아갔다.

‘확인해야 한다.’

그는 기사단장에게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자님께선 본인이 수호자라고 하셨습니다.”

교황청에는 수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누가 수호자로 임명했단 말인가?

문득 수호자의 역사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그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는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니 확인해야 했다. 그는 어둠에 녹아 진의 방 안으로 진입했다.

“오셨습니까?”

한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진은 자신이 올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성자의 실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그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진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권했다. 그곳엔 따듯한 차가 한 잔 준비되어 있었다.

“제가 올 줄 아셨습니까?”

그는 자리에 앉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법진이 발동된 이상 남작가에 방문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담담한 진의 대답.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마법진이 발동되면 수호자의 지원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 서 계실 겁니까? 급하게 오셨을 텐데,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심지어, 자신이 급하게 온 것마저 꿰뚫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대화를 하며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수호자께서 저희를 도와주러 오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방안에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그 정적을 깬 건 진이었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실 겁니다.”

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수호자의 직책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 말이 거짓인 걸 알고 있었다. 진에게 수호자의 직책을 내린 이는 없다.

“누가 수호자의 직책을 내리신 겁니까?”

그는 진이 당황할 거라 생각했다. 한데, 진의 반응은 좀 달랐다.

“그게 중요합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예. 중요합니다. 성자님의 질문은 제 질문의 답이 되지 못합니다.”

“제 대답을 이해하시지 못할 겁니다.”

“그건 성자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단호한 그 말에도 진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저 조금 곤란해 보이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신께서 주셨습니다.”

그 대답이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예?”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비유적 표현도 아니며, 은유적 표현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신께서 주셨습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고 자애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진은 180도 달라졌다.

진지한 표정과 분위기.

“믿기지 않으십니까?”

진의 물음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진을 바라봤다.

* * *

진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와는 달리,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이놈아, 어떠냐!’

[크! 좋다 좋아! 지가 어쩔 거야?]

진이 신에게서 수호자 직을 받았다고 말한 건, 일종의 정치적 메시지다.

‘아니라고 하면 신성 모독이라고!’

[엄밀히 따지면 신성 모독이긴 한데…… 신성 모독은 이렇게 쓰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진이 신성 모독을 하고 있어요.]

성녀인 루나의 말은 가뿐히 무시했다.

‘내 말을 거부하려면 성자급은 돼야지. 아이고, 근데 대륙에 성자는 나뿐이네?’

[허허. 이건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구먼.]

검성은 이런 반응을 보였지만, 로메른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 이러려고 성자가 한 거지. 잘했어. 진.]

‘그치? 외통수잖아.’

진은 로메른 말에 적극 동감이었다.

성자 앞에서 신을 부정한다. 그럼, 그때부턴 수호자와 교단의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진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묵직하고 진지한 분위기만 풀풀 풍겨 주면 될 일이었다.

진은 슬그머니 성서 위로 손을 올렸다.

‘특수 효과 좀 빵빵하게 넣어줘.’

[알겠어!]

그렇게 눈싸움이 시작됐다.

수호자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진을 바라봤고, 진은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대치 상황.

이 대치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그 성서. 잠시만 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진의 성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하자는 거야? 성서 이용해서 분위기 잡는 걸 눈치챈 건가?’

[그럴 리 없어. 내가 그렇게 어리숙하게 힘을 썼을 리 없잖아.]

그렇다면 왜 관심을 보일까?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그런 머릿속과는 달리 진은 곧장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성서를 그가 있는 쪽으로 밀어주었다.

보여준다고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결정을 내리는 데 성서가 도움이 된다면 땡큐였다.

한데, 성서를 살펴본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는 표지만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수호자의 역사에 관해 아십니까?”

그 물음에 진은 곧장 정령들에게 물었다.

‘수호자의 역사 아는 사람 있어?’

[난 모르네.]

[저도 잘 몰라요.]

[난 싸워는 봤는데, 역사는 몰라.]

정령들 모두가 모르는 수호자의 역사.

괜히 아는 척했다가는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모릅니다.”

“특별한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수호자가 탄생하게 된 배경만 있을 뿐입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성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호자는 한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오직 세상을 지키기 위해 만든 그런 조직입니다.”

그게 누굴까?

고민할 필요 없다.

눈앞에 큰 단서가 있었다.

‘성서의 커버.’

이건 성자의 유산이었다.

성서에 피를 흘리며 죽어 간 성자의 유산.

[과거 성자께선 대륙의 평화를 위해 죄를 지으셨기 때문이에요. 실질적으론 교단에서 제명되셨어요.]

루나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루나. 성서 커버 주인도 성자라고 했지?’

[맞아요. 비록 제명되셨지만, 그 업적은 교단에 남아 있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셨어요.]

‘그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제명된 거야? 최대한 간략하게 말해 줘.’

지금은 길고 긴 설명을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성자님께서 죄를 지으신 게 아니에요. 인간의 죄를 자신이 끌어안고 돌아가신 거예요.]

요약하다 보니 루나의 설명은 굉장히 불친절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도움이 되었다.

‘희생.’

[맞아요. 세상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거예요.]

자신을 희생해 모두를 지킨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내용이다.

‘수호자랑 비슷하네.’

[예?]

수호자 또한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며 세상을 위해 ‘물건’을 지키며 살아간다.

마치, 예전 그 성자와 같이.

‘성자의 유지를 이어가는 조직.’

[설마…… 수호자는 성자께서 만드신 조직이란 거예요?]

지금 분위기만 보면 진의 추리는 확실해 보였다. 그때, 수호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분의 성서를 성자님께서 가지고 계신 겁니까?”

진의 추리가 맞았다.

그럼, 여기서 진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본디 성서를 만들 때 다른 이가 사용했던 성서를 이용해 만드는 건,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전 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을 뿐입니다.”

아니다. 성자의 피를 듬뿍 먹고 있어서, 신성력 증폭 기능이 있기에 이 북 커버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수호자는 알지 못한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진은 그렇게 말한 뒤, 곧장 말을 이어갔다.

“신께선 때때로 사람이 인지할 수 없는 계획을 내리십니다. 제게 수호자의 자격을 주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수호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단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진은 성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지 않으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계획이 너무 커다래 제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게 성서가 바로 제가 수호자라는 증거입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은 약간의 조미료를 추가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 성서를 만질 때면 어째서인지 촛불이 떠올랐습니다. 주위를 비추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초. 바로 수호자님들을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다.

‘효과 확실하네.’

비록 수호자를 춤추게 만들지 못했지만,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초대 수호자의 유지를 이은 분을 뵙습니다.”

진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은 그렇게 말하며 그를 의자로 이끌었다. 지금 이딴 허례허식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절 수호자로 인정하셨으니. 부탁하나만 드리겠습니다.”

“부탁이 아닌 명을 내리시면 됩니다. 수호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명을 따르겠습니다.”

“수호자를 하나 임명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진이 만든 가짜 수호자를 진짜 수호자로 세탁할 차례였다.

* * *

다음 날 아침.

“진. 왕국이 혼란스러운데 좀 더 머물다 가는 게 어때?”

큰형은 진이 못내 걱정되는지 이런 말을 했지만.

“어허. 릭 넌 언제까지 막내를 아이라 생각할 게냐. 우리가 보내주는 게 맞다.”

아버지는 그런 큰형을 나무랐다.

큰형은 순간 반발하려고 했지만, 걱정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아버지.”

“그래. 이미 영지까지 있는 아이이니. 쉬어도 영지에 가서 쉬어야 한다.”

아버지는 얼른 가 보라는 듯 말했지만, 얼굴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진은 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지켜준다는 사람들 정말 많아요.”

“안다. 그래도…… 조심하거라.”

“알겠어요. 형, 나도 가 볼게.”

“그래. 조심히 가고, 연락 좀 자주 하고!”

“알겠어. 근데, 둘째 형은?”

둘째 형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새벽에 기사 단장님이랑 검산을 다녀온다고 하던데?”

“그래?”

“어. 며칠 걸릴 거 같아. 그러고 보니, 기사 단장님 휴가 처음 가신 거 같네…….”

이제 수호할 물건이 없어진 덕에, 기사단장님과 함께 검산을 간 거 같았다.

‘진짜 배워 오는 거 아니야?’

[아마 벽을 넘는 단초는 되어 줄 걸세.]

아군의 스펙 업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럼, 가 볼게요.”

“조심히 가거라.”

“진 몸조심해!”

“알겠어요!”

진은 그 말을 한 뒤, 남작성을 빠르게 벗어났다.

그렇게 진이 밖으로 나오자 곧장 사람이 따라붙었다.

“성자님.”

“왔어요?”

그건 다름 아닌 정보 길드 지부장 얀드레였다.

“우리 쪽 정보는 메이 백작령에 있어요.”

“……따로 정보 조직을 만드신 겁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땐 조직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모습이었지만.

“예. 나름의 정보 조직이 있어요.”

지금쯤이면 조직이 되었을 테니,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세이라 수녀를 찾아가세요.”

괴도와 수녀에 지부장이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팀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죠?”

“그 세이라 수녀가 부족하다면, 독자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그거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순수 스펙만 놓고 보면, 세이라 수녀 쪽이 높을 테니까.

“예. 상관없어요.”

“그럼, 전 곧장 이동하겠습니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지부장이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이러면 정보 쪽은 된 거 같고…….’

[난리 난 것도 노바랑 말릭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럼, 바로 영지로 가면 되지?’

[당연하지! 빨리 외부 심장 만들자!]

드래곤 하트를 이용한 외부 심장. 그걸 만들 차례였다.

‘근데 제작할 때 실패 확률 높다면서?’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비밀 병기를 꺼내면 되니까!]

‘오오. 비밀 병기?’

외부 심장 제작이 벌써 기대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