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그건 네가 증명해
기사단장은 바로 드래곤 하트를 내주지 않았지만, 진의 말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분명했다.
그는 승낙과 거절 의사를 밝히는 대신.
“여태까지 어떻게 지내셨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런 질문을 진에게 던졌다.
덕분에, 진과 기사단장의 대화는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허어. 세계수를요?”
“지하 속에 그렇게나 고통받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니…….”
“그런 검결이 있었습니까?”
“검신이라…….”
“정말 대단합니다.”
그는 때때로 놀라기도 하고, 감탄을 터트리기도 하며 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잘 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드래곤 하트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 단장님.”
“아니요. 제게 감사하실 거 없습니다. 저 또한 모두를 지키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뿐이니까요.”
그의 얼굴엔 진을 향한 확신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부디 이 세상을 수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국, 그의 허락을 받아냈다.
“다만, 제가 마법진을 해제하기 전까지 조금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해제 절차가 따로 있습니다.”
“예. 기다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쪽도 할 일이 있었다.
“저 분의 처우는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진은 정보 길드 지부장을 가리켰다.
“예. 괜찮습니다.”
뭔가 이상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넘겨줬다.
“제게 맡겨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진이 다시 한번 물었을 때.
“예. 제 예상대로라면 그는 적이 아닙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드래곤 하트를 탈취하러 온 것 치고는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제가 이상을 감지하고 내려왔을 때, 그는 굉장히 놀란 것으로 보였습니다.”
진은 곧장 로메른을 불렀다.
‘로메른!’
[기사 단장의 말이 맞아. 용골이로 기억을 받아 봤는데 이건 사고에 가까운 일이야.]
‘……사고라고?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편집증적인 성격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그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어. 어째서 이렇게 강자가 남작가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진이 집을 떠나 있는 사이, 그는 남작가의 비밀에 집착하고 파고든 것이다.
[정답이야. 차라리 무능했으면, 벽에 막혔을 텐데 너무 유능해서 여기까지 찾아낸 거야.]
‘유능하다고 이게 찾아져?’
[얼마나 조사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진짜 얘는 편집증적인 게 아니라, 편집증이야.]
로메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적은 아니라는 거지?’
[어. 기억상에는 특별할 게 없어.]
그렇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참고해서 차분히 대화를 나눠 보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그 말과 함께 기사단장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지하엔 지부장과 진만 남았다.
‘흐음.’
[어떻게 할 거야? 꿈으로 들어갈래?]
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편집증인 양반 꿈 조작해봐야 나중에 문제만 생길 거 같아.’
[그럼 어떻게 하게?]
‘깨워. 대화 좀 나눠 볼게.’
저자의 특징, 원하는 욕망.
그 외에 모든 걸 알고 있는데 굳이 꿈을 바꿀 필요 없었다.
어떻게 대화할지 감이 잡혔다.
* * *
얀드레는 눈을 떴다.
머릿속이 안개에 가득한 기분.
자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
“일어났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누가 말했는지 바라봤다. 그곳엔 그리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 도련님?”
“예. 맞아요. 지부장님.”
꿈인가?
이런 생각도 잠시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며, 이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플린트 가문을 조사했고, 비밀을 밝혀냈으며, 끔찍한 물건과 마주했다.
“여, 여긴 위험합니다!”
그는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진에게 다가왔다.
“진정하세요.”
한데, 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얻은 정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막내 도련님. 아니. 성자님. 기사 단장은 지식의 해방과 연관된 사람입니다. 이곳엔 크나큰 비밀이 있습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는데, 진은 뭔가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이건 심각한 일입니다. 어서 이 소식을 알리고…….”
“진정하세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드릴게요.”
“……설명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성자는 이곳에 어떻게 와 있는 거지?
이제야 중요한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확인했다.
“일단, 이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오해 말입니까?”
지부장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만약 성자가 지식의 해방 쪽 사람이라면? 저 끔찍한 물건의 주인이 성자라면?!’
자신은 대응 방법에 따라 죽을 게 분명했다.
‘너희들 뜻대로 되지 않을…….’
그런 그의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수호자, 들어 보셨습니까? 정보 길드 지부장쯤 되시면 들어 보셨을 텐데요.”
진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으니까.
수호자. 신비로운 집단.
세상이 위험할 때 교단에선 성자가 나타난다고 하지만, 수호자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세상의 위험이 닥칠 리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지키는 ‘수호자’들이 있으니까.
“……들어는 봤습니다.”
“수호자를 모르셨으면, 한참 설명해 드렸어야 했을 텐데 다행이네요.”
진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호자는 무언가를 지키는 존재란 걸 아실 겁니다. 저기 있는 저 물건은 수호자가 지키던 물건입니다.”
그 말에 그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그, 그게 무슨…….”
겉으론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빠르게 정보가 조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해답을 내놓았다.
‘그럴 수 있다.’
가능한 이야기다.
오히려 자신의 추리보다, 진이 해 준 말이 더 가능성 있었다. 애초에 지식의 해방이 저런 끔찍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가 그런 결론을 내렸을 때.
“그러니, 지금부터는 대답을 잘하시길 바랍니다. 여긴 왜 오셨습니까? 당신은 지식의 해방입니까?”
진의 말과 함께 대기가 떨렸다.
‘미친…….’
진은 웃고 있지만, 그 주위에 맴돌고 있는 압도적인 기운은 두려울 정도였다.
“스스로를 증명하셔야 할 겁니다.”
최악의 상황은 성자가 지식의 해방인 게 아니었다.
‘내가 지식의 해방으로 몰릴 수도 있다.’
되려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만약 증명이 되었다고 해도, 당신은 수호자의 수호물을 건드린 겁니다.”
그다음이 더 문제였다.
“당신을 살리려면, 수호물을 옮기고 그곳에 새로운 수호자를 뽑아야 합니다. 내가 그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자기를 죽이는 게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너무 위험한 비밀을 건드렸다.’
그 위험한 비밀은 때때로 세상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법.
세상과 자신의 목숨.
둘 중 뭐가 중요할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날 설득해 보세요.”
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애로우면서도 참으로 무서운 미소였다.
“그러니까…….”
지부장을 설득하는 건 진이 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진을 설득해야 한다.
잠시 후.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정보길드 지부장 얀드레는 식은땀이 흐르고,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진이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음. 잘 들었어요.”
드디어, 진이 입을 열었다.
“합격입니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예?”
그는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지부장님을 살려 두는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본인이 제일 잘 아실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성자란 직책과 지금까지 봐 왔던 진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그는 설득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방법은 좀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대체 어떤 방향일지 그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과를 공으로 덮는다. 전 수호자가 사라진 것을 새로운 수호자로 대체할 생각입니다.”
그제야 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됐다.
“절 수호자로 뽑으신다는 말입니까?”
이건 일종의 영입 제의였다.
“예. 그렇습니다. 지부장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수호자의 물건을 찾아내신 겁니다.”
역발상.
수호자의 물건을 찾아낸 건 죄지만, 그만큼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준 것이다.
“보통 수호자분들은 물건을 지킬 뿐, 움직이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다른 건 저뿐입니다.”
“서, 설마…… 성자님께서도 수호자이신 겁니까?”
그는 떨리는 눈으로 진을 바라봤다. 진은 기사단장에게 들은 말을 곧장 써먹었다.
“성자는 세상을 지킵니다.”
“……허어.”
“게다가 전 단순히 지키기만 할 생각이 아닙니다. 지식의 해방에게 반격을 할 생각입니다.”
성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진 지식의 해방 대부분은 진이 찾고 막아 냈다.
“지식의 해방만큼 깊이 숨어 있는 수호자를 찾아내신 겁니다. 저와 함께 지식의 해방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의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세상을 지킨다거나, 수호자가 될 수 있어서는 아니었다.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아니었다.
“당신은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할 겁니다. 정보 길드의 이익에 반하는 일도 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무도 찾지 못한 것을 찾을 기회가 왔다는 게 즐거웠다.
“우리의 적 지식의 해방을.”
진이 하는 말은 그의 욕망을 저격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가짜 수호자’가 탄생했다.
* * *
기사단장의 일 처리는 확실했다.
마법진이 해제됐을 때, 별다른 혼란은 없었다. 이질적일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마법진의 효과야. 마나를 사용하는 이들은 이상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전혀 못 느낄걸?]
수호자들이 어째서 꿈 마법진 같은 걸 만들었는지 이해가 됐다. 마법진이 발동돼도 아무런 혼란이 없다.
‘자연스럽게 비밀은 계속 지켜지겠네.’
[그렇겠지. 효과적인 방법이야.]
그나마 시간적 격차가 있으니 약간의 어수선함은 일어났지만, 원래대로 지원군이 왔다면?
이상함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뭐,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그렇지. 드래곤 하트는 우리의 손에 들어왔으니까. 최대한 빨리 복귀하자. 이거 빨리 만들어 보고 싶으니까.]
‘알겠어.’
그렇다고 곧장 떠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진! 왔구나!”
“우리 막내! 어찌 이리 살이 빠진 게냐.”
아버지와 큰형은 격하게 환영해 주었다.
“바쁜 건 알지만, 밥 먹고 내일 가거라.”
“그래. 진. 먹고 가.”
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내일 갈게요.”
이런 화목한 분위기를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진만 아들이고 난 아들도 아니야? 나 왔다니까!”
“그래. 왔구나.”
“넌 오늘 가도 돼.”
“이건 차별이야! 차별!”
“저건 나이를 먹어도…….”
“아버지. 제가 확실히 교육시키겠습니다.”
“와 진짜!”
오랜만에 찾아온 집은 조금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대로였다.
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 * *
그날 새벽.
누군가 기사단장을 찾아왔다.
“마법진이 해제된 이유를 보고해라.”
또 다른 ‘수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