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신념
진은 기사단장의 꿈속에 들어오고 나서야, 이 마법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가 아니라 RPG였네.’
진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과거를 지켜봤지만, 진짜 효과는 그게 아니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나는 위에서 지켜보는 느낌이었거든.’
[몸도 없이?]
‘어. 없었어. 그냥 과거를 멍하니 지켜보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당연히 아니지. 과거를 구현하는 마법진인데 그냥 지켜볼 리 없잖아. 애초에 몰입을 하려면…….]
로메른의 길고 긴 설명을 들으며 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경험한 것과 달리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기억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 마법진의 진짜 효과였다.
[그럼, 내 생각이 맞겠네. 회귀하기 전 과거를 본 거야. 동일 인물이지만, 과거가 다르니 육체에 들어가지 못한 거야.]
로메른은 뭔가 납득이 됐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진에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일단, 내 육체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진의 꿈이었다면 로메른의 도움을 받을 필요 없었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여긴 기사단장의 꿈이었다.
[아. 맞네. 잠깐만 기다려.]
‘이거 몸을 만들면 그대로 고정되는 거야? 적어도 나이는 바꿀 수 있으면 좋겠는데.’
[상황에 따라 바꿀 생각이야?]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고 있는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려면 그게 필수였다.
[불가능한 건 아니야. 아예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대체 뭐 때문이야?]
‘우리가 할 일이 뭔지 알지?’
[기억 조작 아니야?]
‘야. 기억 개변처럼 좋은 말 두고 조작이 뭐야, 조작이.’
[아무튼 기억을 바꾸려는 거잖아.]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메른의 말대로 이곳이 기억을 재생해 주는 곳이라면, 이곳의 기억이 바뀌면 어떻게 될까?
‘확실히 변하진 않을지 몰라도 영향을 받겠지.’
[아마 그렇겠지. 그래서 계획은 뭐야. 어떻게 기억을 바꿀 생각이야?]
이 해결법은 지구에서 본 모 영화를 참고하면 된다.
‘트라우마를 건드릴 거야.’
[트라우마? 그게 뭔데?]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 그 사건에 개입해서 변화를 유도할 생각이야.’
[그게 가능하겠어? 수십 년 인생을 전부 확인해야 가능하잖아. 자칫 잘못하면 시간이 부족할 거야.]
‘괜찮아. 이럴 때 써먹을 녀석이 있잖아.’
[너 설마…….]
로메른은 진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감을 잡은 거 같았다.
‘용골이 써먹자. 마법진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마법으로 구현했다면, 정보로 받을 수 있지 않아?’
[당연히 가능하지. 미친…… 한 사람의 인생이 골렘에 저장된다니…….]
용골이에 저장된 정보로 빠르게 트라우마를 확인해 계획을 세우면 될 일이었다.
‘거기에 복선을 조미료처럼 뿌려 주면? 무조건 통할걸?’
[……개변은 무슨. 조작 맞구먼.]
로메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첸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맑구나.”
자신의 처지와는 다르게 밤하늘은 너무 맑았다. 별은 마치 쏟아질 것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고, 달은 시리도록 푸른빛을 뿜어냈다.
“……후우.”
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러고 있는 건 뿌리 깊은 차별 때문이었다.
평민으로 실력을 증명했지만, 그의 출신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다.
‘벽이 느껴지는구나.’
다른 이들은 경지에 벽에 가로막혀 있을 때, 그는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차라리, 재능이라도 부족했다면.’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반쯤은 저주했다. 차라리 재능이라도 없었다면, 그는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다른 이들에겐 절망적인 벽조차도 그는 쉽게 넘었다. 덕분에 실력을 가파르게 상승했고, 왕실 기사단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포기할 수 없었다.
‘……욕심이었나.’
하지만, 그런 결정이 조금 후회됐다.
‘난 무엇을 위해 기사가 된 것인가?’
그는 부귀영화를 위해 기사가 된 게 아니었다.
‘무언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보다 조금 유치하고, 아이들 장난 같은…… 그런 그의 머릿속에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준!”
어렸을 적 만났던 친구 준.
그 아이 때문이었다.
‘아마 사제가 되고 싶다던 친구였었는데…….’
그런 준에게 그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은 들은 준이 그에게 물었다.
왜 기사가 되고 싶냐고.
‘난 대답하지 못했지.’
한데, 그 준이란 아이는 자신과 달랐다. 유치하지만, 어른스러운 대답을 했다.
-모두를 지키고 싶어!
그 말은 자신의 가슴속에 남았다. 힘들고 지칠 때 나침반 삼았다.
‘모두를 지키고 싶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됐을까?
“아아.”
그제야, 그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던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구나.’
극심한 차별에 검조차 잡지 못한 게 벌써 몇 달째다. 자신은 왕국 기사단의 일원이었으나 행정가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떠오른 것이다.
어릴 때 남아 있던 강렬한 기억이.
준의 얼굴도, 목소리도, 어디 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나침반이 되어 주었던 그 아이가.
“좀 이상한 기분이군.”
머릿속에 뭔가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르려고 할 때.
“내가 있는 걸 느낀 겐가? 과연 왕국 기사단 최고의 재능을 지닌 자라고 불릴 만하군.”
기척도 없이 갑자기 들린 그 말에 첸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누구냐!”
“나 말인가? 난 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가장 유명한 호칭은 ‘수호자’일세.”
“수호자?”
“세상을 위해 자네의 힘을 빌려주지 않겠나?”
“대체 무슨 말이지?”
“우리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 평생 동안 무언가를 지킨다네.”
그 말과 함께, 친구 ‘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두를 지키고 싶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말해 봐라.”
오늘은 바로 첸이 수호자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인생의 변곡점이 된 바로 그날. 그의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더욱 거세게 출렁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첸은 수호자가 된 다음 달라졌다. 더는 차별의 벽에 절망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 태도가 1년, 2년, 10년으로 이어지자 결국, 귀족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별의 벽을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때는 되지 않던 것들이.
그 벽을 신경을 쓰지 않자,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렇게 기사 생활이 끝날 즈음.
그는 놀라운 제의를 받을 수 있었다.
“공작가의 검술 선생이 되어 줄 수 있겠습니까?”
공작가의 검술 선생.
말년을 보내기엔 최고의 선택이었지만, 그가 선택한 곳은 두 번째 인생을 위한 곳이었다.
“죄송합니다. 전 아직 기사로 남고 싶습니다.”
“허어. 그럼, 다른 곳으로 갈 생각입니까?”
“플린트 남작가의 기사단장 자리를 제의받았습니다. 그쪽으로 갈까 합니다.”
“공작가를 마다하고 남작가로 간단 말입니까!? 기사단장이라고 해 봐야 기사도 몇 없을 터인데!”
“그저, 늙다 보니 공기 좋은 곳에서 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플린트 남작에게 빚도 있고요.”
그렇게 그는 남작가로 향했다.
수호자의 임무 때문에 오게된 곳이지만, 플린트 남작령은 참 좋은 곳이었다.
“단장님! 오늘 훈련은 어떻습니까!?”
많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믿고 따르는 기사들이 있었으며.
“기사단장님. 와 주셔서 정말 든든합니다.”
주인이 되는 남작은 차별이라곤 없는 남자였다.
게다가.
“싸부! 저 기사가 될 거예요!”
“허허.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예! 모두를 제가 지켜 주고 싶어요!”
“……모두를 말입니까?”
“예!”
“허허. 그럼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둘째 공자님.”
자신의 자랑이며, 후계자인 제자까지 구할 수 있었다.
‘준…… 정말 고맙다.’
준이 한 말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기사가 되게 해 주었고.
포기하지 않게 해 주었으며.
수호자가 될 수 있게 해 주었고.
제자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모든 일은 그 아이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모두를 지키고 싶어!
준이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 * *
[세상에, 진짜 된 거야?]
로메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봐 놓고 뭘 또 물어.’
[……이게 진짜 될 줄이야.]
로메른은 마치 불가능을 본 사람처럼 중얼거렸지만, 진은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고생한 거 생각하면 당연히 돼야지!’
기사 단장의 인생을 쪼개서 그중에 트라우마라 할 만한 사건을 찾았다.
‘인생이 이렇게 깨끗한 사람은 또 처음이네. 무슨 가장 큰 트라우마가 차별받은 거야!?’
차별받았다고 탈선을 하거나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더 최악인 건 계급에 관한 차별이기에 이건 진이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플랜 B로 계획을 바꿔야 했다.
[그래도 난 그 발상이 엄청나다고 생각해. 인생을 관통하는 문장이라니…….]
‘찾는다고 그 고생을 했는데…… 당연히 찾아야지.’
원래 저 말은 수호자때 듣고 감명을 받는 말이었다.
진은 그 말을 이용한 것이다.
‘후. 덕분에 아예 가상의 인물을 만들 수밖에 없었어.’
[왜 그래 아이 역할도 잘하던데.]
준은 다름 아닌 진이었다.
그의 과거에 그 문장을 각인시켜 둔 덕분에, 그는 가장 힘들 때 그 말을 떠올렸다.
[이러면 해결이야?]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어. 진짜 먹힐지는 확인해 봐야지.’
[후. 괜히 나까지 긴장되네.]
그때 조용히 있던 검성이 입을 열었다.
[난 통할 거라 보네.]
‘갑자기?’
[아니. 갑자기 하는 말이 아닐세. 쭉 지켜보고 하는 말이라네. 기사란 그런 자들이니.]
검성은 그렇게 말한 뒤.
[그대가 한 일은 기억의 조작이 아닐세. 어쩌면 저 자에겐 기연에 가까운 일일 테지.]
‘이런 종류의 일은 별로 안 좋아하면서 웬 칭찬이야?’
[허어. 그대는 그대가 무슨 일을 한 건지도 모르는군. 로메른 그대도 모르는 거 같고.]
[뭔데 빨리 말해.]
[신념(信念). 불완전한 저자의 신념에 ‘준’이란 기둥을 세워 중심을 잡아 준 걸세. 검에 그 신념을 담을 수 있다면, 내가 검산에서 보여 준 검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
진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기사단장이 강해지는 게 문제가 될까?
전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이쪽 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제자인 둘째 형 때문에 적이 되려야 될 수가 없는 사람.
‘뭐, 주고받았다고 치면 되지. 덕분에, 강해지는 또 다른 방법을 알게 됐으니까.’
지금 얻은 정보는 노바와 아이들은 물론이고, 진에게도 적용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일단 깨우자.’
[바로? 저 친구는?]
로메른은 한쪽에 누워 있는 정보길드 지부장을 가리켰다.
‘깨워서 기사단장이랑 대화하는 동안, 일단 정보부터 내려받아.’
[오호. 뭔 말인지 알겠어. 그럼 바로 깨운다? 마법진은 그대로 두고 기사단장만 깨우면 되지?]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빛이 번쩍하더니 누워 있던 기사단장이 눈을 뜨고, 그와 동시에.
탓!
벌떡 몸을 일으키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런 그의 귓가로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 도련님?”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기사단장님께서 수호자이실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진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나름의 해답을 내놓았다.
“성자께서도 수호자이신 겁니까?”
“예. 전 지키는 물건이 없지만요.”
“……성자는 세상을 수호한다. 남작가에 머물며, 성자님께서 하신 많은 일들에 관해 들었습니다.”
누가 그 제자의 스승 아니랄까 봐 같은 해답을 내어 놓았다.
“제가 수호자인 건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단장님이 다른 수호자를 모르시는 것처럼, 저도 저 말고 다른 수호자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제게 수호자 직을 내려 주신 분만 알 뿐이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자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걸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 상황을 눈치채고 남작가를 구하러 오신 겁니까?”
“아뇨. 둘째 형님이랑 오랜만에 집에 들렀을 뿐입니다.”
“둘째 공자님도 함께셨군요. 둘째 공자님께선 어디에…….”
“밖에서 적의 지원군을 찾고 있습니다.”
그는 상황이 이해됐는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됐는진 말씀드리지 않아도 더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악룡의 드래곤 하트가 노출된 겁니다.”
기사 단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물건이 뭔지는 어떻게 아신겁니까?”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모습에 진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전 성자입니다. 때때로 제가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 마법진에 들어와도 괜찮은 방법 같은거요.”
명백한 증거가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우선 가장 급한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악룡의 드래곤 하트가 노출됐으니 다른 곳으로 숨겨야 합니다.”
혼란스럽던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내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전 저 악룡의 드래곤 하트를 세계수 아래에 묻어 봉인할 생각입니다.”
여기서 세계수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그가 깜짝 놀랐다.
세계수에 봉인하는 건 그가 생각해도 완벽한 장소일 테니까. 이젠 진심을 내비춰 허락을 받을 차례였다.
“그러니 드래곤 하트를 내여 주셨으면 합니다.”
진은 다시 한 번 달라고 말한 뒤, 마무리 멘트를 던졌다.
“모두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의 ‘신념’이 되어 버린 그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