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하산
진이 몸을 회복하는 사이.
다들 절벽에 새겨진 검결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검결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검결에 매료된 것이겠지.”
“그런 것치곤 다들 릴 플린트 때문에 모인 거 아닌가?”
“……뒤늦게라도 알아봤다고 해 두지.”
“뭐, 어쨌든 검의 극의라 불러도 무방할 검결이니까.”
“맞다. 검사라면 빠질 수밖에 없는 검결이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각각인 사람들을 하나로 모일 수 있었던 건 릴 플린트의 설득도 있었지만, 결국 저 ‘검결’ 때문이었다.
“검결을 보며 목표를 찾아가는 일은 참으로 즐거웠는데, 끝났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하군.”
“……그렇지. 이미 결과가 나왔으니 더는 연구가 필요 없겠군.”
“검결의 원형을 보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의 등장으로 이들의 목표가 사라졌다. 검결 옆에는 더욱 완벽한 검결이 새겨져 있었고, 모든 연구가 부질없게 되었다.
“그래도 목표로 해야 할 검을 찾았으니. 검사로서는 즐거운 일이다.”
“목표라…… 너무 아득해서 보이지 않는 게 좀 슬프군.”
“하하. 그 말대로야. 드높아도 너무 드높아!”
모두 시원섭섭한 웃음을 흘렸다.
검결을 확인했고, 목표를 정했으니 모두 원하던 목적을 이뤘다.
릴 플린트.
그가 이곳에 사람을 모은 덕분에, 모두가 드높은 무리를 목표로 정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변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검결도 좋았지만, 자네를 만난 것도 행운이라 생각한다. 용병들은 모두 썩었다고 생각했는데, 편협한 생각이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요. 기사 나으리들은 다 꽉 막힌 줄 알았는데, 생각이 많이 변했수.”
“성기사님. 검산을 내려가도 자주 뵀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섞이지 못하고, 벽이 있던 이들이 검을 연구하며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인사까지 나누고 나니,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란 것을 모두가 직감했다.
그때 진이 움막에서 걸어 나왔다.
“거, 검신님!?”
“회복하신 겁니까?”
“정말 걱정했습니다!”
“전부 회복된 건 아닙니다. 일단, 움직일 정도는 회복했습니다.”
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을 사용했으니, 반동이 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빠르게 회복한 게 대단한 일이었다.
“저…….”
진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여는 순간.
“보여 주신 그 검. 정말 잘 보았습니다.”
“제 평생의 목표를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완벽한 검을 보았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너무 먼 길이라 엄두가 나지 않지만, 천천히 가 보겠습니다. 검의 신이시여! 길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무수한 환호가 쏟아졌다.
용병, 기사, 귀족, 성기사 등등. 전혀 다른 분야에 있는 이들이지만, 감사해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처음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던 진의 얼굴에 어느새 훈훈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의 감사 인사를 끝까지 들은 진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이야기부터 먼저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곤 진의 분위기가 변했다.
“보아하니 다들 떠날 생각인 모양인데, 이대로 돌아갈 생각인 겐가?”
모두의 머릿속에 ‘……?’가 떠올랐다.
안 가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이 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목표를 보았으니. 그대들에게 길을 내려 주겠네. 원래라면 이곳에 너무 많은 이들이 있어 불가능한 일이지만.”
진의 말에 맞춰, 릴 플린트가 움직였다. 그는 여태껏 연구했던 자료를 앞에 꺼내 놓았다.
“그대들이 연구하고 고민한 자료가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세.”
진은 마치 어린아이를 보듯 흐뭇하게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대들이 한 노력은 쓸모없는 게 아닐세. 이 연구 자료가 개개인의 길이 되어 줄 걸세.”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검결 연구는 진의 등장으로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그들의 연구와 노력, 고뇌는 한 사람에 의해 무용지물이 됐다.
한데, 그들의 노력이 인정받고 있었다.
“모두 수고했네. 그대들이 이 검결을 알아보고, 한자리에 모였기에 내가 올 수 있던 걸세.”
진의 말을 끝으로 성지가 율린이 움직였다.
“모두 연구 자료를 챙겨서 줄을 서시오!”
‘검신 강림’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 * *
검신으로 쇼를 아직도 하는 이유?
그건 정말 간단했다.
이곳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제 검술을…….”
“환(幻)의 묘리가 담긴 검이군.”
“그, 그렇습니다.”
“혹자들은 환의 묘리가 담긴 검을 사특하다고 하지만, 이 또한 길이 다를 뿐 사특한 검이 아닐세. 그러니까 이 검이라면…….”
검산의 최상부에 오를 정도면 최소 한 지역에서 이름난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검술을 가져다 바친다.
덕분에.
-환영검식을 획득했습니다.
-중검 묘리를 획득했습니다.
-바람의 윈드를 획득했습니다.
…….
용암 골렘의 머릿속에 검술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이걸 꿈속에서 가공해서 내 분신에 집어넣으면?’
그 검술들이 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진의 몸에 검술이 쌓일수록 몸은 자연스럽게 단련될 테고, 검성이 검을 휘둘러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니까 차곡차곡 모아 놔야지.’
게다가, 노바와 아이들에게도 나눠 줄 수 있으니 일 거양득이었다. 심지어 검술은 이득 중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인사드립니다. 검신이시여. 전 후작가의 셋째 페루 비오스입니다.”
“검신이시여. 백작가의 휴이 멜란…….”
“안녕하십니까. 은급 부제이자 용병인 콘돌입니다.”
…….
진은 대륙에서 이름난 이들의 ‘스승’이 되었다.
물론 공식적인 건 아니지만, 이들이 나중에 진을 외면할 수 있을까?
‘없지. 목표는 물론이고 길까지 잡아 줬는데.’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박아 넣은 건 물론이고.
[……나만 아는 약점을 넣어 길을 알려 주는 건 정말 죄짓는 기분이군.]
검술에 검성만 아는 약점까지 박아 넣었다. 그렇다고 검술의 안정성을 훼손한 건 아니었다.
‘완벽한 검술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게다가 약점이 생긴 만큼 장점도 생기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대는 참으로 합리화를 잘하는군. 검의 길을 걷는 자로서 난 죄를 짓는 기분일세.]
약간의 약점으로 조금 더 많은 장점을 담은 검으로 바꿔 준 것일 뿐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발전은 맞았다.
게다가, 검성의 눈에나 차지 않을 뿐이지 다른 이들이 저 약점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두실?’
[끄응. 이 검결이 발견되고 얼마나 큰 혼란이 오는지 알고 있으니. 거절할 수도 없군.]
진이 제시한 해결책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검성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성자님으로 기억해도, 저희는 검신으로 기억하겠습니다.”
“검의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누가 제 스승을 묻거든 고개를 돌려 검신님을 보게 만들겠습니다.”
모두 이런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그냥 말로만 고마워하지 않았다. 모두가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미친…… 저건 또 뭐야…….’
진이 멍하니 절벽 한쪽을 바라보니, 둘째 형이 다가왔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내가 사람들 모아서 뭐라도 남겨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설득했어. 멋지지?”
형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진에게 물었다.
“……형이야? 저걸 만들자고 한 사람이!?”
산 절벽 위에 진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도 작은 크기가 아니라 압도적인 크기였다!
“우리 동생 평생 역사에 남겠는데?”
지금 역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검산에서 이래도 돼!?”
“모두가 동의했는데 안 될 거 있어? 진 걱정할 필요 없어. 이 형이 완벽하게 처리해 놨어.”
그런 천연덕스러운 대답과는 달리.
[이, 이! 천인공노할! 어찌 검산을 훼손한단 말인가! 그대의 형은 검산을 무어라 생각하는 것인가!]
진은 오랜만에 검성과 같은 생각이었다.
[푸하하하. 진짜 걸작인데? 나, 릴 플린트 마음에 들어.]
[게다가, 동생이라고 더 멋지게 조각해 준 거 같은데요? 조각을 봐도 진인 줄 모를 거예요.]
진이 멍하니 조각을 바라보니, 형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동생아. 감동적이라고 울면 안 된다. 형은 닭살 돋아서 그런 거 싫어해요.”
뺀질거리는 형의 모습을 보며, 진은 아쉬움을 느꼈다.
‘와. 형이라 때릴 수도 없네.’
처음으로 막내라서 별로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길고 긴 검산행이 끝났다.
* * *
둘째 형과는 검산을 끝으로 쿨하게 헤어질 줄 알았는데.
“진. 나 집에 갈 건데, 같이 갈래?”
형의 집이면…….
“아버지 뵈러 가게?”
“어. 지식의 해방인지 뭔가 하는 놈들 때문에 왕국이 난리잖아. 잠잠해질 때까진 집에 있으려고.”
형의 표정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지만, 그 밑에는 가족을 향한 걱정이 숨어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설마, 내가 걱정돼서 가는 걸로 아는 건 아니지?”
형은 마치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진득하니 검술을 연구할 장소가 필요하긴 해서 가는 거야. 그래도 아버지가 내쫓진 않으실 테니까.”
“오호. 그래?”
진이 미소 지은 채 말하자, 형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플린트 남작가에 갈 거냐고?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나도 갈게.”
플린트 가문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이미 확인했다.
넷째 형은 ‘위신’을 만들었고.
둘째 형은 ‘파워 인플레이션’을 만들었다.
그럼, 플린트 가문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남작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걸까?
‘계속 맴돌던 의문을 해결할 차례야.’
남작가를 떠나기 전까지 진은 한 가지 의문을 계속해서 느꼈다.
플린트 남작가.
그 산골짜기에 있는 남작가에 어째서 필요 이상의 강자가 모여 있을까?
‘정보 길드, 연금술 길드, 기사단장.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셋이야.’
그 외에 더 없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가 보면 알겠지.’
예전과는 전혀 달라진 지금이라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게 보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형과의 동행이 시작됐다.
“형제끼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천천히 이야기하면서 가자고.”
형은 이런 말을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감찰부 업무다. 워프 게이트를 개방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옆에 계신 분은?”
“중요 참고인이다.”
“알겠습니다!”
감찰부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걸어갈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둘째 형한테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생아. 너 감찰부야?”
“어. 명예직이긴 한데, 뭐 실제 감찰부랑 다를 건 없지.”
“……우리 동생 굉장했구나?”
“고작해야 감찰분데?”
“이야. 우리 동생 진짜 대단한 모양이네. 고작해야 감찰부? 진짜 동생아 내가 예전부터 너 아꼈던 거 알지?”
신이시여. 둘째 형을 사람 좀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작은 해프닝과 함께 남작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데, 남작가는 어딘가 이상했다.
[진! 조심해! 마법진이야!]
[허어. 남작 성을 통째로 감싸고 있는 거 같으니 섣불리 다가가지 말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이쪽에서는 뭔가 일어날 리 없는데.]
남작령은 너무나 평화로웠는데, 남작성은 마법진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주민들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젠장. 이게 왜 발동됐지? 이러면 안 되는데…….”
둘째 형은 이 마법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