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검의 신
진이 어렸을 때 떠난 둘째 형.
‘릴 플린트’.
덕분에 둘째 형의 기억은 조금 흐릿했다.
그나마 기억 한편에 있는 둘째 형의 모습은 짓궂고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었다.
‘대충 듣긴 했는데…….’
둘째 형은 좀 특이한 경우였다. 기사가 되기 위해 기사 수업을 받는 게 아닌 ‘검’ 그 자체를 선택했다.
검에 대한 순수한 열망.
그 열망을 뒷받침할 만한 재능까지 갖추고 있기에, 실력을 쌓아 명예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현재는 방랑 기사로 각지를 다니며, 검을 수련한다고 들었다.
그런 형이 검을 수련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 이 검산이었다.
“너 성자가 됐다면서?”
형은 어렸을 때처럼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진을 바라봤다.
“어. 운이 좋았어.”
“그게 운이 좋다고 가능한 거야? 뭐 아무튼 몸은? 너 몸 안 좋다고 형이 난리도 아니었잖아.”
둘째 형이 형이라 부를 사람은 큰형 한 명뿐이다. 큰형과는 계속 연락한 모양이었다.
“운 좋게도 괜찮아졌어.”
“그래? 진 너 진짜 많이 컸네? 이젠 어른이라고 해도 되겠는데?”
형은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성자가 됐는지.
어떻게 몸을 회복했는지.
그저 오랜만에 만난 진과 반갑게 대화할 뿐이었다.
“형. 나 성인식 했어. 어른이야.”
“어쭈.”
그렇게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인사를 하던 것도 잠시.
“그래. 검신이 너라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왔다.
“어.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좋아. 네가 검신이라 이거지?”
형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궁금한 게 없는지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쯤이 되니 진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믿는 거야?”
“동생의 말을 안 믿을 이유가 없잖아. 뭐, 내 귀에 들릴 정도로 소문이 난 거면 거짓일 리도 없고. 게다가, 내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어.”
이제야 형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슬슬 이해되기 시작했다. 형이 진짜로 묻고 싶은 게 따로 있기에, 대화를 빠르게 넘긴 것이다.
“어떤 건데?”
“검결을 본 뒤, 그 검결을 해석해 주는 것도 모자라 시연까지 해 준다며?”
“맞아.”
“그런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검결이 있어. 진,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대충 그 검결이 무엇일지 예상이 됐다.
“어느 지역에 있는 검결이야?”
“최상부.”
최상부는 단숨에 올라갈 순 있지만, 어쨌든 시간이 좀 걸리기 마련이었다.
그런 진의 생각을 형이 읽었다.
“걱정하지 마. 나랑 가면 한 방에 쭉 올라갈 수 있으니까.”
“진짜?”
형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 그 정도 길은 내가 뚫어 놨어.”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검산에서 상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
누군가 데리고 올라간다고 올라갈 수 있다면, 모두가 최상부에 있었을 것이다.
‘진짜 가능한 거야?’
[흐음. 불가능할 텐데…….]
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형을 따라갔다.
* * *
형과 함께 상층부로 가는 길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형이 길을 뚫어 놨다는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진을 데리고 쭉 상층부로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샛길이 아니었다.
“여! 이 친구 좀 데리고 올라갈게. 검신으로 소문난 친구야.”
“오. 그 친구도 합류하는 건가?”
“당연하지.”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올라갔다.
원래라면 올라오는 자의 자격을 시험해야 했는데 그게 생략됐다.
[신성한 검산에서 어찌 이런 일을! 예외를 두다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으면, 검신이 이렇게 화를 낼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이렇게 올라오는 건 안 된다고 알고 있어서.”
“아. 그거야 암묵적인 규칙이잖아. 예외 사항 하나 두는 게 뭐가 어렵다고?”
형은 가볍게 말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일이었다.
검산이란 검을 사용하는 이들의 성지.
이곳에 있는 암묵적인 규칙이 변화하거나 예외가 있었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었다.
‘어떻게 가능하게 한 거지?’
진의 이런 의문은 최상부에 도착하고 나서야 해결됐다.
“자. 네가 봐줘야 할 건 저 검결이야. 다들 비켜 봐!”
형이 보여주는 검결이 있는 곳에는 기사, 용병, 암살자, 검사 등등. 다분야의 사람들이 잔뜩 몰려 검결을 보며 연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진은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친.’
[진짜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로메른의 반응도 별다를 게 없었다. 녀석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형. 이 사람들, 형이 모은 거야?”
“어. 내가 모았지. 설득하고 모은다고 장난 아니었다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형이 모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모은 이유 또한 예상됐다.
“저 검결 때문에?”
“어. 혼자서는 도저히 해석 못하겠더라.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머리를 맞대면 해결되지 않을까 싶더라고.”
“……형. 여기 있는 사람들이 끝이야?”
“그럴 리 없잖아. B조는 쉬고 있어. 아까 입구 지키던 녀석도 B조야.”
세상에…….
형은 ‘집단 지성’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 진 너 같은 놈이 또 있잖아! 야, 이 플린트 이 마귀 같은 가문아!]
로메른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이 저 검결을 발견했다면, 형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을 테니까.
[이러니 그리 급격하게 퍼진 거군. 이래서 누가 발견했는지 찾을 수 없던 게야.]
[이딴 짓을 했으니까 수백 갈래로 급격한 발전이 진행됐을 테고.]
그 난리가 벌어진 건, 형의 작은 아이디어 ‘집단 지성’ 덕분이었다.
‘잠깐만. 놀라는 건 여기까지 하자.’
지금 중요한 건, 이 일이 어떻게 벌어지게 됐는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일이 진에게 도움이 되냐, 마냐 그게 중요했다.
‘상황만 보면 나쁠 게 없지 않아?’
[……놀랍게도 그렇네.]
로메른은 진의 말을 한 방에 이해했다.
실제로 지금 나쁠 게 없었다.
‘어차피 우린 해결책을 가져왔잖아.’
검결 옆에 발전한 검결을 새겨 발전 방향을 제한한다. 이미 완벽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도 모여 있으니.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지. 누가 익히고 배우는지 알 수 있으니까.]
‘게다가, 여기서 저 검결을 연구할 정도면 유명한 애들 아니야?’
그 유명한 이들 전부가 진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원래라면 이곳저곳 다니며 스카웃해야 할 이들이 한 방에 넘어오게 된다.
[플린트+플린트가 되니까. 진짜 지옥 같아지네.]
[동의일세.]
형이 벌려 놓은 상을 진은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검결 좀 살펴볼게. 형.”
“그래. 부탁 좀 할게.”
한편, 진의 뒤에 묵묵히 서 있던 율린은 둘의 대화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역사에 길이 남을 이야기가 시작될 것을 직감했다.
* * *
릴은 검결을 확인하는 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언제 저렇게 컸지.’
어릴 적 진은 작고 연약한 아이였다. 언제나 아파서 방에 있던 아이. 그런 동생이 가여워 때때로 가서 놀아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녀석은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고마운 내 동생.’
릴은 진에게 빚이 있었다.
진은 알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검을 처음 잡은 건 ‘진’ 때문이었다. 종일 방 안에 있는 진을 위해 들었던 목검.
형. 멋있어. 기사님 같아.
처음엔 진을 위해서였지만, 이내 검에 빠져들었고 매료되었다.
그가 그렇게 검에 빠졌을 때쯤, 진도 ‘책’에 빠져들었다. 녀석은 매일같이 책을 보며, 지식을 쌓았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릴은 진에게 세상 밖을 이야기해 주었고, 진은 자신이 본 ‘지식’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진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녀석은 영리했고 특별했다.
‘네가 병을 떨쳐 내서 정말 다행이다.’
어린아이지만, 진이 해 주는 이야기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벌인 일도, 여럿을 적 진이 해 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떠올리지 못할 만한 방법이었다.
‘넌 어떤 해답을 낼지 기대되는구나.’
영리하고 영특하던 저 아이가 어떤 해답을 낼지, 어떤 놀라움을 보여줄지 기대가 됐다.
한데, 진의 해결책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검결을 빤히 바라보던 진은 잠시 후 토검을 꺼내 들었다.
‘벌써!?’
그런 그의 생각처럼, 주위에 있는 이들이 웅성거렸다.
“벌써 뭔지 확인이 됐다는 거야? 보기만 하고 벌써 시작한다고?”
“검신인지 나발인지 모르겠지만, 뭔 개수작이야?”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것 같은 저 녀석이 저 검결을 구현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릴은 주위의 반응이 이해됐다.
벌써 몇 달째 검술을 연구했던 이들이었기에, 저 검결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검신에게 기대한 건, 해결을 위한 실마리지 애초에 완벽한 해결을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릴의 생각은 달랐다.
“다들 물러나고, B팀 깨워!”
“뭐?”
“자리 만들어 주고, B팀 당장 깨워! 내가 언제 쓸데없는 말 하는 거 봤어!?”
릴이 다그치자 그제야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릴이 고개를 돌려 다시 진을 바라봤을 땐, 진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건?’
이상하게도 진의 눈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어린아이 보듯 바라보는 노인의 눈 같았다.
“허허. 고맙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이런 마나 운용이라니!?’
정령사인 자신의 동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기 서 있는 건 누굴까?
그제야, 이곳에 떠도는 소문이 떠올랐다.
<검신이 강림했다.>
어째서 검‘신’이라 불리며, 왜 ‘강림’이란 말이 붙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제야 ‘성자’라는 진의 직책이 무겁게 다가왔다.
‘정말로 검의 신이라는……?!’
그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B팀이 다 모이자마자, 진의 신형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들이니,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겠네. 이 검결이 보여 주는 건 간단하다네.”
진은 들고 있던 검을 움직이며 말했다.
“극에 달한 검술은 마법과 다를 게 없다. 법칙마저 베어 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진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과 함께, 몸의 핏줄들은 터질 듯 부풀었고, 근육이 솟아올랐다.
“이 육체로는 딱 한 번만 보여 줄 수 있으니. 잘 보아라.”
토검이 움직였다.
고작 한 번의 휘두름이지만, 진의 몸은 벌써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움직일 뿐이었다.
느리지만, 빨랐다.
검의 궤적이 고스란히 보이지만, 그 누구도 그 궤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검이면서 법칙이었다.
절벽에 새겨진 검결 옆을 토검이 베었다.
토검과 절벽이 부딪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변화만 눈으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파스스스스-.
하늘에서 미세한 돌가루가 흩날렸다.
모두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그리고 검이 남긴 흔적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높디높은 거대한 절벽이 토검에의해 베여 있었다.
마치 신이 거대한 검을 휘둘러 절벽을 베어 낸 것처럼, 단 한 번의 칼질로 절벽 끝까지 베어 낸 것이다.
그 압도적이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내가 남긴 검결을 찾아주어 고맙네. 나의 후학들이여.”
진의 입에서 묘한 말이 흘러나온 뒤,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진이 쓰러졌다.
그리고.
“아아! 성자시여!”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던 율린의 몸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뿜어지더니 진의 몸을 감쌌다.
이쯤 되니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의 신…….”
“저게 신의 검술…….”
“신이 남긴 검결…….”
검의 신을 만났단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