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검산
진은 곧장 검산으로 향하지 못했다.
‘이 미친놈들이 진짜.’
진이 화산과 수도원으로 정신이 팔린 사이, 지식의 해방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수준 낮게 나올 줄이야.’
녀석들은 혼란과 파괴가 목적 그 자체라는 듯 테러를 자행했다.
감찰부와 각 영지의 기사단, 교단까지 움직여 그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너무 광범위한 곳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야. 이런 짓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진은 녀석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국이 혼란스럽긴 해도 이건 시간이 지나면 진압될 게 확실했다.
‘뭐, 그렇다고 아예 소용없는 건 아니지.’
막아 내지 못하면 위험한 곳이 몇 있긴 했지만, 그곳에 보낼 인재는 충분했다.
안 그래도 그 인재 때문에 손님이 방문했다.
“성자님.”
“15번째 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성자님을 찾아뵌 이유는…… 말릭의 위험성을 알고 계시는지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15번째 검은 말릭의 위험성을 확인한 거 같았다. 뭐, 이제는 그 위험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위험하기에 제 곁에 둔 겁니다.”
“과연, 그러셨군요. 알고 계시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대련을 하면서 전 섬뜩한 위협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말릭의 검은 경지에 관한 상승도, 무학(武學)에 관한 열정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죽음만을 쫓았습니다.”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예상이 됐다. 작정하고 덤벼도 안전한 상대와의 대련이었으니.
살살하기는커녕, 정말 죽일 기세로 덤볐을 것이다.
“하지만, 성자님께서 그런 이를 옆에 두시고 깨우쳐 인도해 주시는 중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성자의 이름값이 좋긴 좋았다.
말릭 정도의 위험도 성자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 열심히 그 아이를 빛으로 인도하겠습니다.”
진의 대답에 15번째 검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말릭과는 달리 희망의 4기사라 불리는 아이들은 훌륭했습니다. 열정, 재능, 인성 무엇 하나 나무랄 곳이 없었습니다.”
말릭과는 달리 노바와 아이들은 극찬을 받았다.
“특히 노바란 아이는 마음 같아선 제자로 들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권유도 해 보았습니다만.”
권유까지 할 정도였으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 아이는 성자님의 방패로 살아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아이입니다.”
노바다운 대답이었다.
“그랬습니까?”
“가끔 시간이 나실 때 수녀원에 들러 주시면, 틈틈이 제가 가르쳐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형님 때문에 가끔 찾아올 생각이니, 그때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노바의 성장과 함께 15번째 검과 관계도 두둑하게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이래야 노바지.’
그렇게 15번째 검과의 대화를 끝마친 뒤, 진은 곧장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서부터는 찢어질 거야.”
그 말과 함께 진은 아이들에게 지도를 하나씩 건넸다.
“각각 어디를 먼저 돌아야 하는지 적혀 있을 거야. 흩어져서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
1팀, 노바와 아이들.
2팀, 말릭.
이렇게 두 팀으로 나뉘어 왕국에 벌어지는 테러를 수습한다.
함께 묶어서 보낼까도 생각해 봤지만, 말릭은 혼자 보내는 게 답이었다.
“성자님. 해안가 도시들은 배제됐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진이 나눠준 지도를 살펴보던 말릭이 입을 열었다.
“어. 해안가 쪽 도시는 해결해 줄 특별팀이 따로 있어.”
해안가에는 바다의 지배자이며, 언데드 하렘을 차린 리치가 대기 중이었다.
“다들 이해했지? 바로 출발해. 감찰부의 권한이나 교단의 힘, 전부 사용해도 좋아.”
“예. 주인님!”
“성자님의 뜻을 따릅니다!”
그렇게 테러 수습대가 출발했다.
* * *
아이들만 보내고 진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애초에 진은 갈 생각이 없었다.
‘가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건 맞아. 우리가 간다고 크게 변할 건 없으니까.]
진이 지금 가봐야 이미 벌어진 사건을 수습할 뿐이다. 그보다는 우선 ‘플린트’ 가문의 비밀을 밝히는 게 먼저였다.
‘어때? 쉔 플린트. 우리 넷째 형을 루나가 기억하는 게 정말 우연일까?’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요.]
[너무 과대 해석하는 거 아니야?]
로메른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그저 진의 과대 해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아? 아니면 그만이잖아.’
[그건 그렇지?]
[맞아요. 손해 볼 건 없어요. 해야 할 일도 안 하고 확인한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니까요.]
손해 볼 게 없는데, 확인하는 것쯤이야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럼, 우리도 바로 가자.’
[검산?]
‘어. 가면서 설명도 좀 해 줘.’
둘째 형 이야기가 나왔을 때의 반응은 뭔가 이상했다.
아무런 일이 없을 리 없었다.
[허허. 그곳은 내가 전문이니 내가 설명해 주겠네.]
‘하긴, 검은 검성 전문이니까. 일단, 출발한다.’
진은 성서를 펴서 하늘을 나는 초능력을 발동시켰다. 진의 신형은 빠른 속도로 도시로 날아갔다.
그렇게 검산으로 이동하며, 진은 대략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검산은 뭐랄까…. 무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겐 도서관과 비슷한 곳일세.]
검과 도서관은 쉽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무학의 발전을 위해, 검산에 검결을 새겨 둔다네.]
‘검결을 새겨 둔다고? 누가 훔쳐 가면 어떻게 하려고?’
[공개가 싫은 이들은 깨달음이 담긴 검격을 남긴다네. 물론, 공개하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말일세.]
검산이라 불리며, 도서관이라 칭해지는 이유가 대충 이해가 됐다.
‘그래서 여기선 무슨 문제가 터지는데?’
[이건…… 문제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일일세. 그저 무학의 발전이 있었을 뿐이지…….]
발전도 발전 나름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전한 발전이라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무슨 발전이길래?’
[산의 최상부에서 순수한 베기와 찌르기가 발견됐다네.]
‘……그게 뭔 소리야?’
애초에 그게 문제였다면.
‘그곳에 새겨진 검결을 지우면 끝 아니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검산에 새겨진 검결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무학의 길을 걷는 사람뿐일세. 이곳에서는 그 어떤 지위도 소용없으니.]
‘설마…. 강해야 확인할 수 있다. 뭐 이런 거야?’
[정답일세.]
분위기를 보아하니.
‘몰래 검결을 지우는 건 불가능한 거 같네.’
[세상 모든 검사를 적으로 돌릴 자신이 있다면 가능한 일일세.]
그렇다면, 이곳에 여태 오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약해서 못 왔다?’
결국, 진이 약해서 시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원인을 알면서도 오지 못한 것이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하자. 이게 얼마나 큰 문제가 돼?’
[검술의 급격한 발전을 일으켰다네. 검을 쓰는 자가 모두 선한 것은 아니지.]
‘검사들의 파워 밸런스가 선악을 가리지 않고 일시에 상승했다는 소리지?’
[파워 밸런스라. 틀린 이야기는 아니군. 그렇다네.]
어째서 문제가 아니라 한 건지 알 거 같았다.
핵이란 힘으로 인류는 발전소를 만들기도 하고, 핵폭탄을 만들기도 했다.
기술엔 죄가 없다.
단지 그 기술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죄가 있을 뿐.
‘이래서 문제가 아니라고 한 거구나.’
[그렇다네. 솔직히 말해서, 그대가 왔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진도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문제는 아직도 있었다.
‘만약 우리 형이 이 일에 연관됐다면, 어떻게 연관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 로메른이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걸 왜 고민하고 있어. 거의 다 도착했어. 가서 직접 만나 봐.]
‘로메른. 천잰데?’
그 말대로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무슨 일인지 혼자 고민하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로메른의 천재성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빨리 가자.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 용골이가 검결을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용골이는 짝퉁 신의 이름이었다.
용암 골렘은 검결을 정보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건 재미난 주제였다.
‘만약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지. 검술을 사용하는 용암 골렘이라니, 벌써 멋지지 않아?]
[……검산에 남은 검결들은 수많은 검사의 역사나 다름없는데, 그걸 쏙 빼먹겠단 말을 하는 겐가!?]
[어.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어 치울 건데?]
[자네!]
이건 진도 구미가 당겼다.
‘가서 직접 확인해 보자고!’
그렇게 진은 검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대는 양심이 없는 겐가!?]
[응. 없는데? 세상을 구하는 데, 양심 정도야 팔아먹을 수 있다. 이거야! 검성 너한텐 그런 각오도 없어?]
[그, 그건!]
물론, 둘의 말싸움은 한동안 계속됐지만.
* * *
‘일단 검성이 칼 하나 만들어 줘.’
명색이 검산에 들어가는데, 칼 하나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토검을 사용할 생각인 겐가?]
‘어. 검성 네가 사용할 검이야. 알아서 만들어.’
검성이 있는 이상 굳이 진이 칼질할 필요가 없었다. 검성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잠깐 기다려 보게.]
검성은 땅에 있는 흙을 모아 커다란 장검을 하나 만들어 냈다.
검신의 길이만 보면 클레이모어에 가까웠는데, 신기하게도 손잡이는 한손검처럼 짤막했다.
그 검을 본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오. 검성, 제대로 할 생각이야?]
[검산에 왔으니 적당히 할 생각은 없다네. 후학들에게 제대로 된 검을 보여 줄 생각이라네.]
둘의 대화를 들어 보니, 검성이 원래 사용하던 검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검이 다 만들어지고 진이 그 검을 쥐었다.
‘이 서늘한 감각. 오랜만이군. 이젠 검성 진으로 돌아갈 때다.’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몰입하는 거야.’
[……가끔 진짜 이해 못할 거 같은 때가 있다니까.]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은 그런 로메른을 가뿐히 무시하고 검산 입구를 향해 들어갔다.
검산 입구에는 가부좌한 채 명상 중인 한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진이 다가오자 눈을 떴다.
“방문자입니까?”
“예. 방문자입니다.”
그는 진을 살펴보더니, 이내 토검에 시선이 고정됐다.
“검산에 토검을 들고 온 겁니까?”
대체 이건 왜 물어보나 싶었는데.
[자기 검도 없는 자가 검산을 찾아오는 건 처음일 걸세.]
검성의 말에 한방에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쫄 필요는 없었다.
“예. 저는 검사이지만, 정령사이기도 합니다. 무기는 정령들의 힘으로 만듭니다.”
진의 말과 함께 로메른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특이한 분이 방문하셨군요. 그대의 검을 견식하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검산을 들어가는 방문 절차인 모양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진의 영역이 아니었다.
‘검성, 부탁할게.’
[알겠네. 그럼, 잠시 그대의 몸을 통제하겠네.]
이내 검성이 동화한 감각이 들고, 몸의 통제가 검성에게 넘어갔다.
한데, 그다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자네는 무엇이 그렇게 고민인 겐가.”
하라는 칼질은 안 하고, 멋대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야! 검성, 이게 뭔 개…….’
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
[내버려 둬 봐. 검에 관해선 검성이 최고야. 뇌에 근육만 가득한 녀석들을 제일 잘 다루는 건 검성일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로메른이 끼어들었다.
‘……상태 안 좋으면 바로 개입할 거야.’
[어. 그땐 나도 말리지 않을게.]
진은 일단 지켜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검을 보여 주고 들어가면 될 일입니다.”
입구를 지키던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검산을 들어갈 때 검을 보여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알고 있네. 이 입구를 지키는 자네가 그걸 모르진 않을 터. 말해 보게.”
“…….”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저 길이 막혔을 뿐입니다.”
“벽에 도달했단 뜻이군.”
검성은 그렇게 말한 뒤, 진의 눈에 담긴 힘을 발동했다.
그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어떤 벽에 막혔는지 대충 알겠군.”
“그게 무슨!”
그가 소리칠 때 검성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검산에 왔으니, 검산의 규율대로 검결을 보여 주겠네.”
검성은 천천히 검을 들고.
“그대를 가로막은 벽은 거의 다 뚫린 상태라네. 그대가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는 그 몸에 남아 있으니 알 수 있다네.”
가볍게 휘둘렀다.
후웅.
진이 보기엔 아무렇게나 휘두른 걸로 보였는데, 눈앞에 남자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자네가 걸어온 길은 잘못되지 않았네. 묵묵히 걸어온 그 길이 정답일세. 좋은 스승을 둔 모양이군.”
그 말을 남기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후웅.
검풍조차 일지 않는 그저 단순한 휘두름.
한데, 눈앞에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 벽을 넘으면 이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걸세.”
이번엔 뭔가 달랐다.
아까처럼 그저 휘두르는 게 아닌.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베기.’
공기마저 소리마저 베어 내는 저 너머의 세계.
“힘내게. 검은 그대를 배신하지 않는다네. 배신은 검을 믿지 못하는 인간이 하는 일이지.”
검성은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던 남자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
“선배님! 감사합니다!”
뒤에서 입구를 지키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울먹거리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행복한 감정이 가득했다.
‘이거야! 이거!’
진은 이 검산을 어떻게 올라야 할지 감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