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넷째 형
진의 성자 임명식 소식은 교단 전체에 빠르게 퍼졌다.
성자 임명.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임명식을 참석했던 추기경들의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신의 뜻을 엿볼 수 있었단다.”
“천사께서 강림하신 줄 알았지.”
“최초의 신상이 우리 사제들의 형상인 것을 아느냐?”
다른 이들도 아니고, 추기경들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다.
“성자란 호칭이 그분보다 어울리는 분은 없다.”
추기경들이 이렇게 완벽하게 넘어오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진은 임명식이 끝난 뒤에 이런 요청을 했다.
“조금만 더 기도하고 싶습니다. 제 삿된 생각과 욕심을 이 기회에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저 평판을 위한 시늉이 아니었다.
진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석상 앞에서 기도하며 보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몇날 며칠을.
이러니 추기경들과 교황이 진을 좋아할 수밖에.
게다가, 진과 함께 일해 본 많은 사제가 예전에 진과 함께했을 때의 이야기를 퍼뜨리게 되면서 그 분위기는 점점 확고해졌다.
‘아, 도대체 언제 끝나는데!’
물론, 진이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기도를 한 게 아니었다.
순전히 로메른의 요청 때문이었다.
[왜. 이미지 관리도 하고, 이 석상 조사도 하고, 일거양득인데.]
흑마법사의 극에 달했느니.
어둠의 지배자니.
로메른을 부르는 많은 호칭이 있지만, 결국 저 녀석은 연구자에 가까운 녀석이다.
‘어차피 뽕 뽑았잖아. 앞으로 석상 다시 사용하려면 수백 년은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 로메른이 이런 엄청난 힘을 지닌 석상을 무시할 리가 없었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 조사해 놓고도 알아낸 거 없다면서?’
[……아니.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로메른이 한참을 조사했는데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신의 물건을 인간이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법이에요.]
[너 신이 인간한테 물건을 내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불신자는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야, 이 종교쟁이야. 이것도 결국 인간이 만든 거라니까.]
[최초의 신상은 신께서 인간들을 위해 내려 주신 선물이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진은 로메른의 의견에 동의한다.
신이 하늘에서 내려줬다는 저 말보다는, 인간이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루나의 말대로 진짜 신의 물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로메른 네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이쯤이 되니 진도 루나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진 너마저!]
로메른은 뭔가 배신당한 듯 입을 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답답해서 죽을 거 같아. 웬만하면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너 중급 정령도 됐잖아.’
[네가 성자가 된 이상 이 조각상의 원리만 파헤치면 나는 최상급까지 쭉쭉 올라갈 수 있다니까?]
‘신성력은 얼마든지 요청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것도 저 조각상의 원리를 밝혀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시간을 갈아 넣기엔 아깝지 않아?’
진이 시간이 아깝다고 말하자, 로메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할 일이라도 있어?]
없다. 그딴 게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석상 앞에서 기도만 하고 있기 답답해서 가자는 거지, 뭔가 할 일이 있어서 가자는 건 아니었다.
그때.
“성자님. 수녀원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수녀원이요?”
“그렇습니다. 쉔 플린트 사제가 보냈습니다.”
서신은 보낸 건 ‘플린트’ 가문.
즉, 진의 가문 사람이었다.
“……예?”
쉔 플린트? 그게 누군데?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도 잠시.
“넷째 형?”
교단으로 떠났던 넷째 형의 연락이었다.
[……신이시여.]
루나가 나지막이 탄식을 터트렸다.
* * *
수녀원 정문.
하늘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천천히 내려왔다.
노바와 아이들은 가마를 들고, 진은 그 가마에 타 있었다. 말릭은 그 가마를 지키듯 뒤에 서 있었다.
그 신비로운 등장에 입구를 지키던 성기사는 깜짝 놀랐다.
“누, 누구십니까.”
“진 세인트입니다.”
진의 말에 성기사는 화들짝 놀랐다.
“성자님이십니까?”
소문이 자자한 성자가 올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제 형님 되시는 쉔 플린트 사제님을 뵈러 찾아왔습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못해 가마에 타고 있는 점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쉔 님과 형제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넷째 형님 되십니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성자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녀원 안쪽으로 들어왔다.
‘성자가 좋긴 좋네.’
수녀원은 금남의 구역.
경비를 책임지는 성기사와 몇몇 사제를 제외하면 이곳에 남자가 출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데, 성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을 비롯한 모든 인원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진. 네 형이란 사람은 어떻게 수녀원에 온 거야? 성기사들은 몰라도, 사제들은 영감들만 보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도 정확한 건 몰라. 넷째 형님은 어렸을 때 교단에서 뽑아 갔었으니까.’
[뽑아 갔다고?]
‘어. 특채였던 걸로 기억해.’
그 말에 조용히 있던 루나가 입을 열었다.
[제가 플린트 남작가가 익숙했던 게 쉔 님 때문이었을까요?]
‘모르겠네. 넷째 형님은 뭐 그리 특별할 게 없었는데? 어렸을 때니까 그냥 귀여웠던 것만 기억나.’
[형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로메른의 말대로 형한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 몸뚱이에는 넷째 형에 관한 기억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이곳부터는 저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수녀원 쪽 사람이 나와 있을 겁니다.”
커다란 정원을 지나 수녀원 정문 앞에서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성기사님.”
“아닙니다. 성자님.”
성기사의 얼굴엔 호의가 가득했다.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성자님께서 하시는 부탁이라면 그 무엇도 상관없습니다.”
이게 성자지! 이게 권력이지!
부제에서 성자로 직책만 달라졌을 뿐인데, 모든 게 편해졌다.
“제 기사들을 성기사님들이 묵는 곳으로 안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행원을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편하자고 수녀원 안쪽으로 제 기사들을 들이는 건 무례라고 생각합니다.”
성기사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랐다.
“게다가, 수녀원을 지키는 성기사님들께서는 고강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기사들에게 가르침을 좀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자님을 따르는 희망의 4기사 이야기는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진은 가마에서 내렸다.
노바와 아이들은 큰 걱정을 할 필요 없을 거 같았고, 문제는 말릭이었다.
“말릭.”
“예. 성자님.”
“사고 치지 마.”
“15번째의 검께서 수녀원의 경비 대장을 맡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그분의 검을 견식만 해 보겠습니다.”
“견식만 해. 견식만.”
“예. 성자님. 적당히 하겠습니다.”
말릭이 수녀원에 따라온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에 교단의 15번째의 검이라 불리는 강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노바. 믿는다.”
“예. 성자님.”
진은 그렇게 아이들과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제 기사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성자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그렇게 성기사에게 아이들을 맡긴 뒤, 진은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진을 불렀다.
앳된 목소리. 그런 목소리처럼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를 부르신 겁니까?”
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앳된 얼굴이 귀엽게 찌푸려졌다.
“형이야. 까먹은 거야?”
예!? 형이요?!
나보다 3살은 어려 보이는데!?
“진?”
진은 형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귀여운 형이 생겼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첫째 형을 떠올렸다.
엄격, 근엄, 진지하지만 자기한테는 한없이 너그러운 든든한 형.
이게 진이 생각한 형의 모습이다.
그런데.
“진? 너 정말 많이 컸네?”
진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조잘조잘 떠드는 귀여운 형이 생겼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예전에 네가 책 많이 읽어 줬는데.”
아니. 형님. 형이 동생한테 책을 읽어 줘야지, 환자 동생이 형한테 책을 읽어 주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
“시간이 지났어도 진 너는 따뜻한 거 같아. 바쁠 텐데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형이 아니라, 동생 느낌이었다.
이렇게 보니 형이 어떻게 수녀원에 올 수 있었는지 감이 잡혔다.
‘전혀 위험한 느낌이 안 들어.’
뭐랄까 남자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작은 동물에 가까운 느낌. 위험하거나 위협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난 잘 지냈어. 형은?”
“나도 잘 지냈지. 신을 모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모두가 잘해 줘.”
그건 신을 모셔서가 아닐 것이다. 형을 보고 있자면 뭐라도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네.”
물론, 진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길래 날 부른 거야?”
“아…… 그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던 형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뭔가 일이 있긴 한 거 같았다.
“나한텐 이야기해도 돼. 형.”
진이 차분하게 말하자,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어.”
“신?”
“근데 뭔가 이상해.”
“어떤 점이?”
형은 소리 죽여 말했다.
“……신이 아닌 거 같아.”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뭐야?”
“처음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난 울었어. 가슴이 벅차고 황홀했거든.”
“그런데?”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는데 뭔가, 뭔가 이상해.”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형.”
“믿어 주는 거야?”
형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당연하지. 형이 나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맞아!”
그럼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내 친구들 좀 부를게.”
“친구?”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둘을 불렀다.
‘로메른, 루나. 밖으로 나와 봐.’
진의 말에 로메른과 루나가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왔다.
“천사와 악마?”
형은 눈을 빛내며 둘을 바라봤다.
“빛의 정령과 피의 정령이야. 이 아이들이 형의 몸을 확인할 거야.”
“응! 알겠어!”
형은 둘의 모습이 적잖이 신기한지 빤히 바라봤다.
루나와 로메른은 곧장 움직였다.
확인 결과는 바로바로 나왔다.
[신의 음성을 들은 건 아닌 거 같아요. 만약 진짜로 들었다면, 이렇게 괜찮을 리 없거든요.]
형은 신을 만난 게 아니었고.
[니네 형. 몸이 왜 이래? 이건 좀 이상한데?]
[어? 그러네요. 확실히 이상해요. 이렇게 불균형한 몸은 또 처음이에요.]
[게다가 이것도 봐 봐. 이상하다니까.]
[여기에 이게 왜…….]
형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잠깐 기다려 봐. 뭔지 알 거 같아.]
로메른은 그 말을 한 뒤, 루나와 대화를 이어 갔다.
[신의 음성과 쉔 플린트의 몸 상태. 두 가지를 합쳐지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지 않아?]
[그러네요. 위치도 수녀원이기도 하고요.]
둘은 뭔가 감이 잡히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위신(僞神) 사건.]
‘가짜 신? 신도 가짜가 있어?’
황당하다는 진의 물음에 루나가 대답했다.
[있어요. 가짜인 덕에 교단은 둘로 분열됐었거든요.]
‘교단이?!’
교단이 분열됐다?
청렴결백하고 무욕한 사제들이?
이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짜 신에게 속은 사제들은 그 신이 진짜인 줄 알았어요.]
[난리도 아니었지. 결국 교단끼리 치고받고 싸웠으니까. 진짜 끔찍한 놈이었어.]
[처음엔 가짜였으나, 사제들 덕에 가짜는 점점 힘을 얻었으니까요.]
뭔가 스케일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 가짜 신이 이곳에 있다는 거야?’
[그런 거 같아. 그것도 완성되기 전 상태인 거 같고.]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지.
엄밀히 따지면 다행은 아니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맞아. 위신(僞神) 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