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90화 (90/210)

090. 황충

말릭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을 바라봤다.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다.’

진에게 힘을 받고, 그 힘을 활용해 ‘죽음’을 보고 있는데도 그 무엇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보이는 건, 자신의 죽음뿐이었다.

그때 진이 입을 열었다.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만날 때마다 그렇게 얼어 있을 거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는 항상 승리가 보여서 싸웠어? 어쭙잖은 힘 하나 얻었다고, 벌써 승패를 정해 놓고 싸우는 거야?”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이 힘은 섬에 와서 처음 사용했을 뿐, 그전까지 이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힘에 휘둘리고 있는 건 알아?”

“…….”

말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너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아. 날 절대로 공격하지 못할 걸 아니까.”

섬에 오기 전을 생각하면 그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감각은 예리해졌고, 육체는 더욱 강건해졌다. 기술은 정교해졌고, 마나도 더 많이 모았다.

한데, 진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가 약하단 말씀이십니까?”

“어. 식은땀까지 흘리고,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 빠졌어. 안 그래?”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기에?

‘외면하지 말자.’

말릭은 애써 부정하기 보다는 진의 말을 인정했다.

그리고 문제점을 찾았다.

전과 달라진 건 하나뿐이었다.

‘죽음을 보는 힘.’

이 힘은 자신을 수많은 위험에서 구해 주고, 승리를 거머쥐게 해 주었다.

편리하고, 강대한 능력에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의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인다며? 통제도 못하고 힘에 휘둘리는데, 죽일 수 있겠어?”

진의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통제해. 주도권을 넘겨주지 마.”

자신 안에 있는 능력과 주도권 싸움을 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실제로 자신은 힘에 휘둘리고 있었다.

‘네가 날 쥐고 흔든다고?’

머릿속에 있는 구슬에서 힘이 뿜어져 나오자 말릭의 눈이 붉게 빛났다.

‘너의 주인은 나다!’

주도권을 인식하고, 그것을 뺏어 온다. 녀석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말릭은 깨달았다.

‘주도권을 넘겨 준 건 나 자신이었구나.’

이 능력은 자아가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존재할 뿐, 그곳에 의존하고 주도권까지 넘긴 건 자기 자신이었다.

주도권을 빼앗아 왔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진에겐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후우.”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가겠습니다.”

진에서 보이는 자신의 죽음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일해라. 쓸모없는 놈.’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길은 자신이 만들면 되는 법이다.

녀석의 힘을 날카롭게 압축했다.

말릭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길을 만든다.’

저 틈들이 모여 하나의 길을 형성할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친.”

의지를 다지고 나선 말릭은 진의 일검에서 절망을 보았다.

너무나 드높은 경지의 검.

베기 한 번에 모든 길이 사라진다. 압도적인 죽음이 그의 앞으로 쏟아졌다.

어느새 검이 자신의 눈앞에 멈춰 있었다.

숨 쉴 수도, 움직일 수 없는 압도적 절망감.

“이건 좀 심했나?”

장난스런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말릭의 얼굴엔 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아닙니다.”

즐겁다. 더 드높은 검은 자신의 목표로 삼기 충분했다.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이 시간을 더 즐기고 싶었다.

“쯧.”

그때, 진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안 해 줄 거거든?”

“예?”

“됐어. 흥이 식었어. 다른 사람들이랑 놀아.”

진이 휘적휘적 선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이 짜증 내는 모습이 말릭은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방금 그 검은…….’

말릭은 허공에 검을 베며, 검술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한편 선실에 들어온 진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에라이. 이게 나라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다. 말릭이 딱 그 꼴이었다.

‘열받네, 진짜.’

뭐, 솔직히 말하자면 진이 할 말은 아니었다. 진은 애초에 하나를 배우지도 않는다.

정령들이 다 해 주니까.

물론,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였다.

[왜? 개조된 육체가 별로야?]

‘아. 그건 아니야. 좋아진 건 확인했어.’

애초에 말릭과 대련한 이유는 말릭의 성장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개조된 육체 확인이 목표였다.

[그치? 근력부터 지구력, 내구도까지 전부 상승했어.]

‘어. 확 느껴졌어. 검성의 힘을 사용했는데도 버틸 만했어.’

물론, 마음껏 검성의 진짜 힘을 사용하는 건 여전히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면에서 기록된 말릭의 경험도 꽤 도움이 됐어.’

전투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덕분에, 근접전이 벌어졌을 때 검성이 없더라도 시간 벌이하기엔 충분했다.

‘가면으로 육체 강화하는 건 성공적이라고 봐도 되겠는데?’

전투 경험과 더 강한 육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모두를 손에 넣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당연하지. 누가 개조했는데.]

로메른은 만족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게다가 루나의 등급이 상승하면, 한층 더 강해질 거야. 혈액 자체가 강화될 테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에서 중급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인지 루나는 여전히 가면 속에 있었다.

‘얼마나 걸리는 거야?’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하급까진 그저 힘이 상승하는 정도지만, 중급부터 좀 달라.]

‘그래?’

[어.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진은 그 설명을 끊었다.

‘어. 그럼 됐어. 나온 다음에 확인해도 되니까.’

로메른은 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가는 동안 이제 쉬기만 하면 되나?’

[어. 푹 쉬어도 돼. 말릭이랑 리치 어디로 보낼지는 우리끼리 이야기할게.]

‘알겠어. 맡길게.’

적어도 꿀 같은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잠시 후.

[진! 당장 이동해야 돼!]

‘왜? 쉬라며.’

[세계급 마법에 반응이 있어. 이상할 정도로 그 힘이 작긴 한데, 뭔가 일어나려고 하는 거 같아.]

‘뭐?’

[일단, 정글로 돌아가자.]

‘……인생.’

물론, 이 휴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 *

왕국의 회의장은 개판이었다.

“알카트라가 무너졌다니요!”

“그 안에 수감된 죄수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알카트라 관리를 어떻게 한 겁니까!?”

“그걸 왜 우리한테 묻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알카트라가 무너졌다.

이 충격적인 소식 덕분이었다.

“조용!”

묵묵이 그 개판을 지켜보고 있던 왕이 입을 열었다. 귀족들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대신들은 그리 걱정할 필요 없다. 알카트라는 무너졌지만, 빠져나온 죄수는 없으니.”

왕은 그렇게 말한 뒤, 한 통의 서신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곳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끔찍한 마법진과 그 안에서 벌어진 지옥도. 그곳의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만약,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이건 재앙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폐하. 감찰부에서 이번 사건을 막은 겁니까?”

게다가, 이 사건을 해결한 건 다름 아닌 감찰부였다.

“그렇다. 감찰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왕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진도 엄밀히 따지면 명예직이긴 하지만 감찰부에 소속된 인원이었다. 왕이 이런 거짓말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대신들은 언제나 감찰부의 권한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나 또한 그대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예. 폐하.”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다. 지식의 해방이란 사특한 무리가 위협을 행사하고 있다. 이 위험은 그저 지나가는 위험이 아니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식의 해방이 왕국에서 사라질 때까지 감찰부의 권한을 일시적으로 확대하겠다.”

왕의 언변은 교묘했다.

얼마나 권한을 늘릴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폐, 폐하!”

귀족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순간 반발하고 나섰지만.

“그대들은 생각하고 말하라. 이런 상황에서 반대를 한다면, 난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

왕이 한 말은 간단했다.

반대하는 놈은 지식의 해방과 연관된 놈이란 뜻이었다.

귀족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귀족들이 여기서 포기할까?

그럴 리 없었다.

귀족들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 신호를 보냈다.

왕 또한 여기서부터가 진짜 협상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순 없을 터. 의견을 내어 보…….”

왕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폐, 폐하! 나와 보셔야 합니다!”

밖에서 들리는 기사의 목소리.

회의 도중에 끼어들 정도라면,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회의를 잠깐 멈추겠다.”

왕과 대신들은 회의를 멈추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나오자마자 기사가 왜 그렇게 황급히 불렀는지 깨달았다.

“이, 이것은?!”

“이 시기에 메뚜기 떼가 창궐할 일은 없을 터인데…….”

메뚜기 떼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해가 가려질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왕궁에 쳐져 있는 실드 때문에 벌레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곧장 왕이 입을 열었다.

“당장 상황을 보고하라!”

왕의 말에 기사가 입을 열었다.

“거대한 마나 유동과 함께, 갑작스럽게 메뚜기 떼들이 나타났습니다.”

마나 유동과 함께 나타난 메뚜기 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질적이었다.

그때, 왕과 대신들이 있는 곳으로 마법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폐, 폐하! 마충입니다! 이건 마법으로 만든 곤충입니다!”

보고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왕의 곁으로 암행복을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확인 결과 왕국 곳곳에 메뚜기 떼가 출몰했습니다. 계속 확인 중이지만, 왕국 전체에 나타났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피해는?”

“곡식 창고들에 메뚜기 떼들이 들어와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피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벌레 떼.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벽보가 도시 곳곳에 붙고 있습니다.”

왕은 벽보 내용을 확인했다.

[왕의 죄 때문에 왕국에 재앙이 범람한다. 우린 이 재앙을 막고 싶었지만, 왕은 죄를 숨기기 위해 우릴 공격하고 있다. -지식의 해방-]

허무맹랑한 개소리다.

하지만, 이 곤충 떼가 곡식을 휩쓸고 왕국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면, 개소리는 더는 개소리가 아니게 된다.

“감찰부의 모든 제한을 해제한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

분노한 왕의 말에 주위의 대신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거부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반역으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회의를 시작하겠다.”

왕은 모든 대신을 이끌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정글에 도착한 진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메뚜기 떼는 생각도 못했네.’

저주를 뿌리거나, 시체를 되살리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게 피해를 극대화하는 방법이니까.

한데, 그런 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메뚜기를 이용해 왕을 공격했다.

[급하긴 급했나 보네. 세계급 마법도 아니고 고작해야 국가급이야.]

‘그래? 세계급을 기대했는데, 좀 심심하긴 하네.’

카운터 마법을 준비했는데도 메뚜기 떼가 창궐한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사건이 벌어져야 일한 티를 낼 수 있는 거지.’

마법진이 설계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마법 그 자체가 사용되지 못하게 하는 방법과 마법이 사용된 후 카운터 치는 방법.

[그렇지. 남들 모르게 좋은 일 해봐야 아무 쓸모도 없는 거야.]

진과 로메른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그 마법진 추적인가 뭔가 하는 건 끝났어?’

[어. 우리가 대비한 건 세계급인데, 국가급 마법진 정도야 쉽지.]

‘이거 지식의 해방한테 고마운 기분인데.’

[그렇네. 이놈들은 우리한테 자꾸 선물을 주네?]

진과 로메른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곧장 먹을까?’

[어떻게 먹을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어?]

‘그림을 만들어 보자?’

[그거지! 기왕 일한 티를 내려면 멋있게 내야 하지 않겠어?]

‘좋아. 빠르게 그림 그려 보자고.’

지식의 해방의 마법은 어차피 진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니지. 멋지게 먹겠습니다!]

꺼어어억.

지식의 해방아, 잘 먹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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