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버스터 콜
진은 곧장 섬으로 향하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곧장 가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왕국 최악의 감옥으로 불리는 이유가 뭐겠어. 그냥은 접근할 수 없어.]
감옥 보안 체계가 워낙 촘촘하기도 했고, 지금은 ‘지식의 해방’이 섬을 점령한 상태다.
[왕국 쪽에서도 감옥 쪽 일을 모르는 거 보면, 완벽하게 장악하고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면 돼.]
때문에 그냥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상황.
그러니, 진은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이 뭔가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바다의 한가운데.
진의 가마가 하늘에 떠 있었다.
‘오. 저기 오는 거 같은데?’
진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함선.
그 함선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부서지고, 허름했다.
‘유령선은 허름해야 맛이지.’
서쪽 바다에서 유령선을 복속시킨 리치. 그가 진의 부름을 받고 동쪽 바다까지 온 것이다.
잠시 후, 진이 타고 있던 가마가 유령선 갑판 위로 내려왔다.
샤아아아-!
악령들과 사령들이 위협적으로 소리치며 상공을 점거했고.
달그락-. 달그락-.
크아아아-!
해골들과 언데드들이 진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진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게 전설의 유령 함대냐!’
[와. 살다 살다 이런 언데드들이랑 유령들은 처음이네. 진짜…… 상상 초월이야.]
로메른의 반응도 진과는 별다른 게 없었다. 둘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하라고 보내 놨더니. 아주 하렘을 차렸네?”
언데드들은 기묘하게 모두 여성형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근육질 여성형 언데드.
처녀 귀신형 언데드.
심지어 해골마저 슬금슬금 리치에게 다가가는 걸 보니, 여성이 아닐까?
‘이게 말이 돼? 어떻게 다 여성형 언데드밖에 없어?’
여긴 말 그대로 리치의 하렘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셨습니까. 성자님.”
이 마성의 리치 같으니라고.
대답하는 모습마저도 밉살스럽게 느껴졌다.
“진짜 이게 나라냐.”
“예?”
진의 혼잣말에 리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은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 냈다.
“아니야. 그보다 미모 후작이 이걸 용케 두고 봤네.”
“처음엔 화를 내거나 질투하더니, 미남을 얻은 여자의 숙명이라며 최근엔 좋아하고 있습니다.”
“…….”
커플들 다 뒤졌으면.
목 끝까지 올라온 이 말을 애써 속으로 삼켰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진은 애써 본론으로 돌아왔다.
“서쪽 바다는?”
“정리 끝났습니다. 꽤 위험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셨겠죠.
마성의 리치 아저씨.
주위를 둘러보니, 이건 어려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언데드가 전부 여성형인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순수하게 리치의 마음에 들려고 자신의 존재를 바꾼 거야.]
언데드라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성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감정조차 느끼지 않으니까.
‘그런 언데드들에게 저 땅딸보 리치가 사랑을 알려준 거라는 거지?’
[와. 이렇게 들으니까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네. 이건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다 진짜.]
‘사랑이 세상을 바꾼다. 이 양반 만날 때마다 이 말이 맞다는 걸 확인하네.’
퍽 웃긴 일이다.
사랑이 세상을 바꾸는 건, 동화에서 나오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한데, 이곳에선 실제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병력 상황은?”
진의 말에 리치가 담담히 대답했다.
“작은 섬 하나는 포위 공격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군대네.”
원래라면 전투에서 일부가 소실되고, 살아남은 정예들이 모였어야 했는데 사랑이 문제였다.
“전투가 없다 보니, 고스란히 흡수되었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나쁠 건 없었다.
[마성의 리치가 적이 아니길 다행이네. 이러면 바다 쪽은 한 방에 해결된 거 같은데?]
로메른의 말대로였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서쪽과 동쪽 모두를 커버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목적지는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알카트라로 출발하겠습니다.”
리치는 말없이 지팡이를 위로 들었다.
꺄아아아-!
“크라라라라-!”
달그달그달그락!
모두가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미친…….’
진은 그 모습을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 * *
동쪽 바다의 작은 섬 알카트라.
섬의 중앙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두 남자가 대치하고 있었다.
촤르르르륵-.
쇠사슬을 쓰는 남자와 검을 들고 있는 한 남자. 기묘하게도 검을 들고 있는 남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퉤! 대체 넌 뭐지?”
쇠사슬을 쓰는 남자가 피가래를 뱉어내며 물었다.
“난 네 죽음이다.”
가면 쓴 남자의 말에 쇠사슬을 사용하는 남자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소문대로 진짜 미친놈이잖아?”
난 네 죽음이라니.
살다 살다 이런 병신 같은 말은 또 처음이었다.
“……낭만이 없는 놈이군.”
말릭의 말에 쇠사슬 남자는 다시 한번 침을 뱉었다.
“퉤! 미친놈아!”
마치 쓰레기를 보듯 하는 그 태도에 말릭은 화가 난 듯 검을 꽉 잡았다.
곧이어 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촤르르륵-.
막대한 기운이 담긴 쇠사슬이 뱀처럼 꾸물거리며 말릭에게 달려들었다.
말릭은 당황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그 흐름을 보았다.
‘보인다.’
그가 한 발자국 옆으로 옮겼다.
촤아아악!
쇠사슬이 그가 서 있던 곳을 찢어발겼다. 그 위력이 얼마나 엄청난지 풍압만으로 몸에 상처가 났다.
그렇다고 방심할 순 없었다.
쇠사슬 남이 팔을 크게 휘두르자, 쇠사슬이 말릭이 있는 방향으로 기묘하게 꺾였다.
‘막는다.’
말릭에겐 쇠사슬에 담긴 기운처럼 막대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여태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가면의 힘.’
그가 검을 뻗자, 가면에서 붉은 힘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쇠사슬과 검이 부딪혔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릭은 그 충격만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정말 좋다.’
이 가면은 절대로 필요 이상의 힘은 주지 않는다. 간신히 막을 수 있을 정도, 딱 그 정도만 힘을 빌려준다.
‘이런 긴장감이 날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덕분에, 말릭에겐 거대한 변화가 생겼다.
생명의 위험이 곳곳에 깔린 이곳은 ‘살해의 업’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일해라. 이 쓸모없는 놈아.’
아니. 자극하다 못해 말릭이 ‘살해의 업’을 다룰 수 있게 만들었다.
로메른이 봤다면 기함했을 만한 일.
살해의 업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가 얽히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해졌다.
죄수들을 죽이며 가면에 쌓인 막대한 힘.
죽는 게 당연한 극한 상황.
거기에 말릭의 재능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지며, 결국엔 살해의 업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살해의 업이 움직이자, 말릭에게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보인다.’
조금 전 흐름을 보았을 때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게 보였다.
어떻게 하면 저자를 죽일 수 있는지 말릭에게 ‘보였다’.
죽음의 길.
말릭이 했던 ‘난 너의 죽음’이란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말릭에겐 저자의 죽음이 보였다.
촤르르르륵-!
쇠사슬이 날아왔다.
말릭은 전처럼 옆으로 한 걸음 옮겨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팔을 휘둘러 쇠사슬을 다시 날렸다.
쇠사슬의 방향이 변했다.
한데, 그 방향 쪽엔 이미 말릭이 없었다. 어느새 말릭은 녀석의 사각에 들어와 있었다.
말릭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녀석의 죽음이 가까워진다.
“이, 이 미친놈아!”
저 반응을 보아하니.
이제 녀석에게도 보인 것이다.
한 걸음.
촤르르륵-!
한 걸음.
콰아아앙-!
한 걸음.
온힘을 담은 공격이 쏟아져도, 말릭은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퍼어어억-!
“맞았……!”
쏟아내던 공격이 말릭에게 닿았을 땐.
“난 너의 죽음이다.”
어느새 말릭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무런 기운도 담기지 않은 칼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 칼은 막을 수 없었다.
저항할 수도 없는 죽음처럼.
그의 생명을 끊었다.
“……쿨럭. 눈깔…… 개같네…….”
그의 시선은 말릭의 눈에 꽂혀 있었다.
무저갱 같은 죽음만 가득한 눈.
자신도 쓰레기지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저딴 눈깔을 가지게 되는 걸까.
그는 그런 물음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끝이군.”
말릭은 무감정한 얼굴로 그의 시체를 바라보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그 녀석의 시체가 녹아버리더니 빨간 액체로 변했다.
“아쉽군.”
그 말과 함께, 빨간 액체는 말릭의 가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운이 끝도 없이 가면에 흡수됐다. 가면의 색깔은 빨갛다 못해 짙은 적갈색으로 변했다.
그 순간 허공에서 마법사들이 등장했다.
“최후의 1인이 결정되었군요.”
“우리는 인간 마왕을 만들어 낸 겁니다.”
“흡수만 끝나면, 곧장 세뇌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갑자기 변화가 생겼다.
가면에서 막대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말릭의 몸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건…….”
“보호막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고위 술식으로 이뤄진 것 같군요.”
“이자가 마법사였단 말씀입니까?”
“그건 아닌데…… 대체…….”
그런 그들의 의문은 금세 해결됐다.
콰과과과광-!!
콰과과과광-!!
콰과과과광-!!
섬 주위에서 엄청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공격?!”
“대체 누가?!”
섬을 감싼 마법진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와장창 부서졌다.
그리고.
섬으로 지옥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걸 정화할 기세로.
* * *
“버스터 콜 발동! 섬을 통째로 지워 버려!”
진이 망루 꼭대기에서 소리쳤다.
[또 신났네. 신났어. 버스터 콜은 또 뭐야? 바다 쪽 용어야?]
로메른이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진은 해먹에 누워 불꽃놀이를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와…… 미쳤다.”
유령선에 설치되어 있는 마포가 연신 불을 뿜었다.
낡고 오래되긴 했어도, 아직 구동이 되긴 했…….
콰앙-!
배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여러 가지 의미로 미쳤네.’
그렇다고 작전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고작해야 몇 개의 배만 그런 상황이 펼쳐졌을 뿐이고.
‘보기엔 이게 더 낫나.’
오히려 위에서 보기엔 볼거리가 늘어난 정도였다.
‘무늬만 리치인 줄 알았더니.’
모든 배를 통솔하며 하늘에 불을 뿜고 있는 리치의 모습은 최악의 몬스터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1차 공격이 끝나고.
쾅-!
쾅-!
언데드들이 마포 안으로 들어가더니, 섬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건 좀 멋있네.’
그와 함께 유령 떼가 섬을 뒤덮는다. 마치 지옥과 종말을 연상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섬은 불타고 언데드 몬스터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간신히 그들을 피하면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유령들이 습격한다.
‘이거지.’
굳이 진이 가서 하나하나 적을 찾아내고 잡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섬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고, 적을 되살리면 그만이었다.
[이번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가면에 기운이 어마어마하게 쌓였어. 흑마법 쓰기 딱 좋은 기운이라 마법진만 있으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어.]
되살릴 수 있다면, 굳이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불꽃놀이와 언데드의 활약상을 편안하게 누워 구경하다가.
“끝났습니다.”
리치의 보고를 받고 나서야 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슬슬 가 볼까?”
진은 가마에 탄 뒤, 아이들과 함께 섬의 중앙으로 날아갔다.
‘와. 진짜 버스터 콜이네.’
섬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모 만화의 설정이 연상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완벽하게 싹 쓸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있어?”
“전혀 없습니다. 첫 포격에 대부분의 인원이 죽고, 나머지는 언데드들이 처리했습니다.”
“깔끔하네.”
“말씀하셨던 붉은 구체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게 있어?”
리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질기다, 질겨.”
최후의 3인에 남은 걸 알게 된 뒤, 말릭이 최후의 승자가 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진짜 마지막까지 남을 줄은 몰랐네.’
진짜 각설이 말릭.
죽지도 않고 또 살아남았다.
“일단, 그쪽으로 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진의 눈에 붉은 구체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메른.’
[알겠어. 해제할게.]
진이 붉은 구체에 손을 올리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끝나자마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말릭은 당황하지도 않고 씩 웃으며 말했다.
“질기다. 질겨.”
진이 말릭 쪽에 손을 뻗자, 녀석의 가면이 자동으로 풀리더니 진의 손에 잡혔다.
가면이 사라지자 녀석의 얼굴과 이질적인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진의 말에 녀석이 표정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군요.”
“뭐?”
“아닙니다. 그저 더 올라갈 곳이 있다는 게 즐거울 뿐입니다.”
대체 저게 뭔 개소리야?
‘어휴 미친놈.’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작하자.’
[오케이! 가면의 힘 써서 바로 되살린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진의 모습을 말릭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안 보이는 길을 찾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