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성지(聖地)
며칠 뒤.
중립 마을에 손님이 방문했다.
‘영감님이 오실 줄 알았더니.’
영감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왔다.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다름 아닌 가롯 교구장이었다.
“형제님. 오랜만입니다.”
“교구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교구장과 진은 악수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교구장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추기경님은 회의에 참석하셔서, 다행히 제가 올 수 있었습니다. 이번만큼은 제가 직접 간다고 교황청에 건의했습니다.”
교구장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형제님을 도와드리는 건, 제 숙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구장의 말에 진은 멋쩍은 듯 웃었다. 원래 이럴 땐 겸손한 척해줘야 하는 법이다.
진은 애써 화제를 돌리는 것처럼 다른 주제를 꺼냈다.
“바로 가 보시겠습니까?”
“예. 형제님께서 발견하신 성지가 어떨지 정말 궁금합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에 있는 정글러들을 바라봤다.
“(가겠습니다.)”
“(알겠다.)”
진은 교구장을 이끌고 정글러들을 따라갔다. 중립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강이 있었다.
“(타라.)”
엉성해 보이는 작은 쪽배.
겉보기엔 시원찮아 보이지만, 이건 정글러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만든 특수한 배다. 이 배에 타야 안전하게 강을 돌아다닐 수 있다.
“타시죠. 성지는 배를 타고 가는 게 가장 빠릅니다.”
“정글의 강은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방법이 있는 겁니까?”
교구장은 생각보다 정글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단독으로 가기엔 위험하지만, 정글러들의 안내를 받으면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흠. 성지를 가기 위해선 정글러들의 도움이 필수적이겠군요.”
“맞습니다.”
덕분에, 그는 빠르게 핵심에 도달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진과 교구장이 탄 작은 쪽배가 정글러의 노질에 강물을 가르고 쭉쭉 나아갔다.
얼마 걸리지 않아 성지의 영역에 들어왔다. 그저 영역에 들어왔을 뿐인데, 엄청난 신성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성지(聖地)는 크게 둘로 나뉜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
실질적 효과가 있는 장소.
이곳은 후자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렇게나 충만한 신성력이라니…….”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이곳은 외곽입니다. 중앙에 도착하려면 좀 더 가야 합니다.”
“이런 신성력이 느껴지는데, 여기가 외곽이란 말씀이십니까!?”
진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어떻게 발견하신 겁니까?”
“조금 복잡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곳에 있는 걸 활용한 건 맞지만 이건 찾아낸 게 아닙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직접 보시는 편이 빠를 겁니다.”
진의 말에 교구장이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성자인 진이 발견한 장소이니, 범상치 않으리란 건 예상했다.
한데, 벌써 그의 예상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오. 보이네요.”
진이 하늘을 가리켰다.
교구장의 시선이 진이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엔 거대한 책 조각상이 떠 있었다.
“성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교단에서 제작한 성서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엄청난 신성력에 감정이 요동쳤다.
“성자님…… 대체 이건…….”
“정글러들의 힘을 빌려서 만든 성서입니다.”
만들었다?
그 말에 교구장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성지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단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만들었지만,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진의 말은 개소리나 다름없었지만, 교구장에겐 전혀 다르게 들렸다.
“……그분께서 임하신 겁니까?”
신이 진의 몸에 들어와 행한 일이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 정령들은 물론이고 제 기운까지 모두 제 통제를 벗어나 움직였습니다. 그저…… 무아지경. 이 말이 딱 어울리는 상태였습니다.”
“허어.”
그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만약 이게 신께서 계획하신 일이라면…….’
단순히 성지만 생각할 게 아니었다. 어째서 정글러들의 도움을 받아 성지를 만드신 걸까?
‘신께서 임하셨다면 홀로 기적을 행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 답은 빠르게 나왔다.
‘이곳에 오기 위해선 정글러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상할 정도로 정글러들과 얽혀 있다.’
신의 계획에 정글러가 필요하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신께선 정글러들을 원하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실한 그는 신의 계획을 의심하지 못한다.
그분의 종으로써 뜻을 따를 뿐.
그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진이 입을 열었다.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저 성서의 힘을 체험해 보시죠. 교구장님.”
“체험이요?”
“깜짝 놀라실 겁니다.”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았단 말인가?
그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성서에 신성력을 부여해 보세요. 모든 신성력을 짜내서 쏟아부으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교구장의 몸에서 엄청난 신성력 유동이 발생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사제인지는 그 기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모든 신성력이 성서에 부여됐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런 진의 말처럼 잠깐 기다리니, 성서에 부여됐던 신성력이 다시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도 부여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이.
“아아.”
그는 황홀감에 감탄을 터트렸다.
압도적인 신성력이 몸에 부여되며, 그는 보다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임시적인 변화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온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체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쉬웠다.
성지를 확인하러 온 게 아니었다면, 여기서 이것을 체화하며 신성력 상승을 목표로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정글러들은 교구장님이 수습하는 동안, 기다려 줄 겁니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느낀 감각을 체화하는 데 집중하세요.”
그는 진의 말대로 신성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기연을 주는 성지. 이걸 교단이 포기할 수 있을까?’
[절대 포기 못하지.]
모든 건 계획대로.
* * *
며칠 뒤.
교구장의 보고서가 교황청으로 날아왔다.
그 보고서의 내용은 놀라웠다.
기적이라고 해도 무색한 일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보고서 맨 끝에 교구장이 적어 둔 의문은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신께서 이것을 만드셨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대체 무엇을 대비하기 위해 이런 것을 만드신 것인가?>
교황청의 분위기가 사뭇 심각하게 변했다.
“좀 더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신께서 주신 것조차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죄입니다.”
정글러와 왕국의 중재는 예민한 사항이다 보니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려고 했는데,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건 신의 계획이다.
사제가 신의 계획을 무시할 순 없었다.
“성지 순례를 차례대로 다녀올 수 있게 계획을 세우세요.”
교황청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교황청처럼, 정글 또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넌 스스로를 증명했다.)”
족장은 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멋있는 척하기는.’
곰같이 생겼지만, 족장은 여우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허허. 당연한 걸세. 사람을 이끄는 자는 우직하면 부러지는 법이라네.]
검성의 말대로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 정글 부족을 유지하고, 여태 생존한 것이다.
아무리 신녀가 있다고 해도, 멍청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신물은 절대 밖으로 유출되지 않을 것이다.)”
“(아. 그거 그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아. 이번 거래가 마지막이라면서?)”
신녀에게 듣기로 이번 거래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지식의 해방 쪽에서 세계급 마법을 가동하기 위해 목표한 양을 전부 채웠다는 뜻이었다.
[회귀 전에도 세계급 마법이 발동된 건 딱 한 번뿐이었어.]
녀석들도 이것을 다루는 데 적지 않는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 거래 이후론 정글러들에게 접근하지 않겠지.’
오히려 이 거래는 성사되는 게 이득이었다.
“(……그렇다.)”
진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개인적인 욕심도 아니고, 부족 전체를 위해 한 판단인데 애초에 잘못이라고 하기도 힘들잖아.)”
“(……맞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닌,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신녀님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덕분에 너희가 판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건 없거든.)”
“(…….)”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을 믿는다기보다는 신녀의 판단을 믿은 것이다.
“(너희도 이득을 보고, 그쪽에 손해 보게 만들 방법이 있어.)”
“(그게 뭐지?)”
“(골드 받고 팔아.)”
“(……골드?)”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신녀가 움막 밖에서도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들었지?)”
“(들었다.)”
“(제한이 풀린 덕분에, 신녀가 중재에 나서면 왕국과의 융화는 더 빨라질 거야. 신녀의 능력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그렇다.)”
“(그런 신녀한테도 활동비는 필요할 거야. 더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활동비라…… 그래. 이해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물량이라 녀석들은 포기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잔뜩 뜯어내.)”
진의 말에 족장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우리 전문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마지막 거래까지 하면, 그쪽에서도 정글러들을 건드리진 않을 거야.)”
진의 말에 그의 표정이 변했다.
“(……우리를 위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전혀 아니었다.
족장이 골드를 뜯어서 신녀에게 활동비로 준다. 그 활동비는 신녀의 신인 진의 손에 들어온다.
뭐, 이런 생각으로 골드를 뜯으라고 한 거였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네 자유야.)”
그렇다고, 이 좋은 오해를 그냥 넘길 필요는 없었다.
“(고맙다. 진 세인트. 그대는 정글러 전체의 은인이다.)”
“(됐어. 나도 신녀님처럼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일 뿐이야. 앞으로 방문할 교단 사제들한테나 잘해 줘.)”
그런 진의 말을 녀석은 다시 한번 다르게 받아들였다.
“(알겠다. 정글러와 교단은 맹우. 잊지 않겠다.)”
뭐, 오해긴 해도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그렇게 족장과의 만남이 끝난 뒤, 진은 신녀를 찾아갔다.
“(신님!)”
그녀는 진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래. 나의 아이야.)”
진은 그렇게 대답한 뒤, 곧장 입을 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앞으론 네가 모든 걸 변화시켜야 한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신께서 더 도와주시면…….)”
과연 신녀라고 해야 하나.
진이 떠날 걸 직감이라도 한 것 같아 보였다. 진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널 믿는다.)”
“(……신님.)”
그녀는 울먹울먹하며 진을 불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 안타까워할 필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찾아갈 테니.)”
“(정말이요?)”
울음 가득하던 신녀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그래. 그러니 내게 자랑할 수 있도록, 마음껏 움직여 보려무나.)”
“(예! 알겠어요!)”
“(언제나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거라.)”
“(네!)”
진은 그렇게 신녀와 인사를 나눈 뒤.
“가자!”
아이들을 부르고, 가마에 올라탔다.
“(신님! 기다릴게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진과 아이들을 하늘을 가르며 동쪽으로 날아갔다.
* * *
‘상황은 어때?’
[아직은 여유 있어. 대충 5명 정도 남은 거 같아.]
‘최후의 5인이라는 거지?’
[어. 뭐, 그 녀석들이야 우리가 신경을 쓸 건 아니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지.’
진이 향하는 곳은 말릭이 있는 동쪽 바다의 섬 ‘알카트라’였다.
‘말릭 이놈은 진짜 죽지도 않네.’
물론, 말릭을 구하려고 가는 게 아니었다.
알카트라에 남아서 섬을 통제하고 있는 ‘지식의 해방’ 놈들을 잡을 생각이었다.
[오! 하나 더 죽었다. 이제 4명인데?]
‘말릭이 죽였어?’
[어. 와우. 가면에 어마어마하게 힘이 쌓이는데?!]
그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말릭은 죽여서 가면에 힘을 남긴 것이다.
겸사겸사 그것도 회수하면 될 거 같았다.
진은 곧장 아이들에게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가자.”
“예!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