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WIFI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네.’
정글이라고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이곳에도 정치가 존재했다.
족장이라는 왕 아래 대전사들이 자기 부족을 꾸린다.
말이 야만인이지 자세히 살펴보면 왕국의 정치 체계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정글의 정치 시스템은 왕국과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정치가 어려운 건 많은 이유가 있지만, 대략적으로 말하면 서로 원하는 게 다르고 서로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야.]
너무 축약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글러들에겐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있어.]
‘신녀를 말하는 거지?’
[맞아. 신녀는 보는 것만으로 그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어. 손쉽게 합의점을 찾고, 평화가 유지되지.]
완벽한 조율자.
그런 존재가 있으니, 정글은 평화롭게 유지되었다.
[게다가 제일 좋은 점은 신녀에게 권력이 절대 몰리지 않는다는 점이야.]
‘빨리 죽으니까. 권력이 몰릴 일도 없겠지.’
잔인하고 냉혹하다.
정글은 신녀들의 희생으로 유지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친놈들.’
진의 말에 검성이 반응했다.
[허허. 그리 격분할 필요 없네. 자네가 고쳐 가면 될 일 아닌가.]
‘어? 그게 뭔 개소리야?’
[조언을 해 줘도 듣질 않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놓고 뭔 조언? 애초에 그걸 내가 왜 바꿔?’
[옳소! 우리가 지금 정글 체계 바꿔 주려고 왔어? 세계 구하려고 온거지?]
‘그래 로메른 말이 맞아. 현상 유지만 해도 특별히 문제 생길 게 없는 걸, 고친다고 들쑤시면 반대 세력 생겨나고 아주 그냥 지식의 해방 좋은 일만 하는 거야.’
[이 말에는 저도 동의해요.]
[…….]
말로 거듭 처맞은 검성은 꼬리를 말고 조용해졌다.
‘애초에 내가 미친놈들이라고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신녀라는 엄청난 패를 들고도 이따위밖에 못 써먹으니까 아까워서 그래.’
진이 괜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신녀는 치료된 시점에서 비극의 사슬은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상황이 변했잖아. 신녀는 앞으로 오래오래 살 거야. 이걸 바꾸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신녀가 할 일이지.’
[……복안이 있었군.]
[그럼, 진이 그냥 막 던질 리 없지.]
[맞아요. 가끔 보면 그 누구보다 무르고 착하신 분이니까요.]
‘됐어. 괜한 금칠하지 말고 원래 하던 말로 돌아오자.’
[어머나. 부끄러워하시는 거예요?]
진은 애써 루나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신녀. 이대로 두기 아깝지 않아?’
[아깝다고? 신녀의 능력이야 성서 통해서 써먹을 수 있을 텐데?]
‘그게 나한테 크게 의미 있나?’
[어? 왜?]
이미 진은 예비 성자란 이미지가 잡힌 상황이었다.
남작이란 작위와 감찰부란 권한을 받을 수 있던 것도 예비 성자란 이미지 덕분이었다.
‘난 정치적으로 움직일 수 없어.’
진은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이미지가 형성된 상태.
여기서 정치적으로 움직이면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한데, 신녀의 능력은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좋은 능력이지만 진은 써먹을 수 없었다.
‘그녀가 왕국의 정치판에 개입한다고 생각해 봐.’
애초에 그녀는 신녀이며 정글러들의 조율자다. 왕국 정치판에 끼어들 자격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오호. 신녀를 이용해 정글 부족을 정치 세력화한다는 말이야?]
‘그래. 그거야.’
[그렇게 세력화된 신녀가 물심양면 널 도와주고?]
‘그래. 든든한 뒷배가 하나 생기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내 정치적 지원 세력은 교단밖에 없잖아.’
[그건 그렇지.]
여기서 진을 지원해 주는 제3의 세력이 생긴다면?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글러들 괜찮지 않아? 왕국에 포함된 세력도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그렇네. 그야말로 그 어디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세력이 출현하는 거나 마찬가지네.]
정글 부족은 정글 전체를 영지로 두고 있는 영주로 보면 꽤 재미난 결과가 나온다.
정글의 가치와 부족의 힘 그리고 정글의 특수성까지 포함하면 후작~공작급 영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정글러가 정치 세력이 돼서 왕국 정치에 개입한다고 생각해봐.’
[왕국 쪽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겠네.]
쿵 하면 짝.
로메른과 진은 쿵짝이 맞았다.
‘신녀가 밖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이게 가능한 거 알지?’
[그거 진짜 하게?]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좋아. 해 보자.]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메른에게 말했다.
‘계획 와이파이. 시작하자.’
[대체 저런 이상한 단어는 어디서 만들어 오는 건지…….]
로메른은 고개를 저으며, 안쪽으로 날아갔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 * *
진과 로메른이 작당 모의를 하는 사이,
신녀도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신물의 외부 반출을 금지합니다.)”
그녀는 부족장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진과 로메른이 착각한 게 하나 있었다.
정글러 중 일부가 지식의 해방에게 신물을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오늘부터 그쪽과 거래를 끊으세요.)”
“(필요한 일입니다.)”
“(이젠 필요 없는 일입니다.)”
신물을 넘기기로 결정하고 움직인 건, 다름 아닌 족장이었다.
신녀는 알면서도 정글러들을 위해 모른 척했을 뿐.
“(우린 부족의 미래를 위해 신물까지 넘겼습니다. 인제 와서 그걸 없던 일로 되돌리잔 말씀이십니까?)”
신녀에게 족장의 욕망과 간절함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폐쇄성으로 부족을 지켰지만, 부족은 고립되어 천천히 말라 죽어가는 상태였다.
왕국과의 융화로 활로를 찾고 싶지만, 삼켜질 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런 족장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쪽은 패배할 겁니다. 결국 그들이 약속한 정글 부족과 왕국의 융합은 지켜지지 못할 약속에 불과합니다. 그런 패배자들과 함께 하시겠습니까?)”
“(……뭔가 새로운 걸 보신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족장이 원하는 건, 정글러에게 더 도움이 될 ‘세력’이다.
“(진 세인트 남작. 그자가 대륙의 판도를 움직일 겁니다. 지식의 해방과 진 세인트 남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조건 후자입니다.)”
진실을 숨기고,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줬다.
“(그 남자가 특별하단 말씀입니까?)”
“(그는 성자의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우리가 선을 넘지 않는다면, 절대로 적이 되지 않을 존재입니다.)”
“(성자의 운명이라…….)”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족장은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녀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그 무게감이 전혀 다르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이 필요합니다.)”
족장은 반쯤 넘어왔다.
신녀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게 뭔지는 잘 알고 있으니. 시간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신, 그동안 거래는 뒤로 미루겠습니다.)”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신녀와 족장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녀는 곧장 진을 찾아왔다.
“(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왔습니다.)”
그녀는 진을 보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고생했다.)”
진은 익숙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엘프를 경험하며 이런 반응은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
“(족장과 대한 것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보고는 나름 충격적이었다.
신물을 빼돌린 이가 족장이었고, 신녀는 이를 묵인해 왔다는 것.
‘그럼, 내 목적을 알면서도 내 방문을 왜 받아들인 거야?’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신녀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던 거 같은데? 게다가 족장의 주도 아래서 빼돌리고 있었다면, 안 들킬 자신이 있었겠지.]
‘신녀 쪽에 짬 때린 게 정답이었네.’
[어. 만약 신녀가 우리 편이 돼 주지 않았다면, 찾는 와중에 정글러 전체와 싸웠을 수도 있었겠어.]
그런 귀찮은 일은 넘긴 건 좋았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진은 일단 지르고 보기로 했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너를 찾아와 네게 일을 맡긴 것이다.)”
“(역시! 모든 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진의 말에 그녀는 감격한 듯 몸을 떨었다.
“(신이시여. 저희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래도 이건 진과 로메른의 예상 대로였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폐쇄성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또한 알고 있다. 사막 부족처럼 왕국에 삼켜져 노예로 살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있었겠지.)”
“(그렇습니다.)”
“(그대는 내 도움을 바라는 것인가?)”
“(부디, 자비를 내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족장은 확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진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지만 족장에게 확신을 주고,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확신을 바라는 그의 요구가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그러니 그에게 확신은 주되, 힘은 네게 주마.)”
“(……예?)”
그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정글러들의 조율자인 네가 이제는 왕국과 정글러들의 조율자가 되는 것이다.)”
“(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진의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영원히 이곳에 매여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생각했는데, 신께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드드드드득.
땅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 광산 곳곳에 퍼지고 있는 식물 뿌리가 ‘보였다’.
그 식물들은 신물이 있는 광산 전체를 덮고, 기묘한 형태로 자라나더니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그 진동에 공명했다.
“(내 손을 잡아라.)”
그녀는 조심스럽게 신의 손을 잡았다.
“(따라 나오거라.)”
함께 움막 밖으로 나왔다.
“(내 손을 꼭 잡거라.)”
그 말에 그녀는 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이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혹스럽고, 무서웠다.
“(당황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으니.)”
하지만 진의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진정됐다.
당혹스럽고 무서운 감정이 가득하던 자리엔, 자유와 해방감이 대신 채워지기 시작했다.
몸이 점점 떠오르고,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힘을 써 보거라.)”
“(……예?)”
그건 불가능하다.
독이 없으면 그녀는 힘을 사용치 못한다.
“(써 보거라.)”
그녀는 진의 말에 힘을 사용하고, 정글을 바라봤다.
“(원래 보이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신의 말처럼 움막 안에 있을 때 볼 수 있었던 것들이 보였다.
“(이, 이게 어떻게…….)”
그녀의 말에 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게 신의 힘. 와이파이다.)”
“(……와이파이.)”
위키 나무란 말을 처음에 들었을 때처럼,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단어였다.
“(신이시여.)”
그녀의 목소리엔 다양한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나의 신이시여!)”
“(괜찮다.)”
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의 구원자시여!)”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신은 진짜로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