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진과 핵나무
‘나무에 이걸 이식하는 건 가능하다는 거야?’
[준비만 제대로 하면 충분히 견뎌 낼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게다가, 세계수에 이걸 이식할 경우 엘프들도 영향을 받을 거예요.]
‘그것도 그렇네.’
짝퉁이긴 하지만, 이젠 진짜 세계수나 다름없어진 나무.
이 나무에 핵물질이 심어지면, 엘프들이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영향을 받는데?’
[모르겠어. 네가 말했던 슈퍼 파워인지 뭔지가 생기지 않을까?]
‘……세상에.’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도 아니고, 핵에 영향을 받아 바뀐 엘프라니.
‘쩔어!’
정확하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핵의 가장 큰 문제인 부작용은 로메른과 루나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 뭐부터 도와주면 돼?’
진의 의욕이 오랜만에 들끓었지만.
[돕긴 뭘 도와? 그냥 하던 대로 쉬면 돼.]
‘……어?’
그 의욕은 순식간에 꺼졌다.
[정령이니깐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거지. 인간인 네가 어떻게 돕게? 괜한데 목숨 걸지 말고 쉬기나 해.]
하긴 그것도 그랬다.
여기서 진이 도와줄 만한 일은 없었다. 어차피 저게 상자 밖으로 나오는 순간, 진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했다.
[아. 딱 하나만 도와줘. 성서가 필요해. 교단에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가져오라고 말 좀 해 줘. 작업하는데 성서의 힘이 필요할 거 같아.]
‘성서? 성서랑 이게 관련이 있어?’
대체 이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진이 듣기로, 성서는 ‘정령’의 힘을 강하게 하는 물건이었으니까.
[관련이 있게 만들어야지.]
로메른이 이렇게까지 말했다면 나름의 활용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어차피 정글 갈 때 필요하니까 이 기회에 챙겨 두자.’
[그래. 그것만 도와주면 돼.]
성서는 어쨌든 필요한 물건이었다.
곧장 정글을 가지 않고 영지로 돌아온 이유는 세계수에 이식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도 있지만,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 최대한 빠르게 성서만 가져오라고 하면 돼지?’
[어. 부탁할게. 우리는 곧장 작업 시작할게. 검성. 땅 팔 시간이야.]
[허어. 그놈의 땅을 또 파야 한다니…… 검을 쓰는 일은 언제 나타날꼬.]
그렇게 ‘핵나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진은 곧장 밖으로 나와 서신을 작성한 뒤, 전서구에 묶어 교단을 향해 보냈다.
* * *
교황청의 성서 제작소.
제작소에 모여 있는 사제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이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 있는 성자의 성서 제작은 성서 제작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게다가, 성자의 성서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보통 성서의 내용으로 적혀 있는 건, 교리를 해석한 내용이나 몇 가지 업적 정도인데.
“악마의 문자입니다.”
“아마 성자님께서 봉인하신 악마들을 기록한 것이겠지요.”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성자의 성서엔 범상치 않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들이 보기엔 이 성서는 진의 역사이며 걸어온 발자취나 마찬가지였다.
이러다 보니, 성서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다.
“교황께 말씀드려 성수를 더 확보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교황이 직접 만든 성수가 투입됐고.
“성물을 통해 책 페이지마다 힘을 부여하겠습니다.”
막대한 양의 성물이 투입되었다.
“성자님의 성서입니다. 절대 허투루 만들 수 없어요!”
“맞습니다!”
덕분에, 성서 제작은 생각보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성서가 거의 다 제작됐을 때, 또 다른 재료가 도착했다.
“대체 이 물건은…….”
부서질 듯 낡고 허름한 책 커버.
그 커버에는 피가 묻어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동봉된 편지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허어. 과거 성자님께서 쓰셨단 말입니까!?”
“역시 성자님 곁으로 성자님들의 물건이 모이는구나!”
“커버에 묻은 피가 절대 손상되지 않게 작업하세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저 책 커버로 연결만 하면 끝날 일이었는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책 커버의 상태가 너무 불안합니다.”
“어쩔 수 없군요. ‘리스토어’를 발동합니다.”
“책 커버에 리스토어를 말입니까?!”
“이게 그냥 책 커버로 보이십니까! 이건 과거의 성자님과 현재의 성자님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입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추기경님들과 사제들에게 연락을 넣고, 성물을 모으세요.”
‘준 기적’이라 불리는 ‘리스토어’.
이 성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추기경과 많은 성물 그리고 수십 명의 사제가 필요했다.
고작 책을 ‘복원’하기 위해서 벌어질 만한 성법이 아니었다.
한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허허. 이 노구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구나.”
요청하자마자 영감님이 성서 제작소를 방문하셨고.
“성자님의 일이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카이얀 대요새 방어에 참여했던 사제들이 자원하고 나섰다.
“왕국 곳곳에 있는 교구에서 성물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성물까지 무난하게 수급됐다.
그 덕에 ‘준 기적’이 책에 부여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진짜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수십의 사제가 기도하고, 성물로 신성력을 뿜어내고, 그 모든 걸 추기경이 통제해 ‘성법’을 발동한다.
“리스토어.”
추기경의 말과 함께, 엄청난 신성력이 책에 부여됐다.
그러자, 로메른이나 루나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악마의 힘.
성자의 힘.
신성력의 힘.
로메른과 루나의 지식.
이 모든 것들이 뒤섞이기 시작하더니, 책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뿜어졌다.
그렇게 뿜어진 신성력은 교황청의 하늘 위에 ‘교단의 심벌’을 그렸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사제들은 멍하니 하늘만 올려봤다.
“이 책이야말로 성자님의 성서다! 신께서 이 책을 인정하셨다!”
영감님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신이시여!”
사제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고, 신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 사제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성자님께서 성서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영감님은 당연하다는 듯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게 신의 뜻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당장 이 성서를 성자님께 보내라!”
“예! 추기경님!”
진이 보낸 전서구가 ‘신의 뜻’으로 둔갑했다.
* * *
‘어. 음. 이게 무슨 일인데?’
성서를 전해주고 간 사제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다 리스토어를 걸었다고?]
[······성서에 리스토어라니.]
성녀도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하늘에 뜬 문양은 뭔데?’
[그건 루나랑 내가 한 거야. 성자의 성서니까 있어 보이려고 넣은 건데…… 그렇게 크게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이건…… 저희가 계획했던 성서보다 훨씬 강력해졌어요. 리스토어로 인해서 성서였을 때 힘을 회복한 거 같은데…….]
[이건 일반적인 성서가 아니야. 워낙 담겨 있는 힘이 많아서, 뭐라고 딱 원인을 꼽을 수가 없어.]
요약하면 간단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는 거네.’
[뭐, 그렇지. 애초에 이건 진짜 성서도 아니었으니까.]
성서로 제작했지만, 진짜 성서들과는 그 궤가 다른 물건이었다.
‘뭐, 원인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아무튼 그래서 좋은 일이야?’
[어. 생각한 것보다 성서에 더 많은 힘이 담겼어.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좋은 일이야.]
그렇다면 상관없었다.
‘그럼, 원인은 천천히 찾고 일단 세계수부터 마무리하자.’
[알겠어.]
로메른과 루나가 곧장 움직였다.
둘은 첫 페이지를 펴고, 무언가를 하자 책에 빼곡히 적혀 있던 글자들이 사라졌다.
[야. 바즈라!]
로메른이 짝퉁 세계수를 불렀다.
<예. 로메른 님.>
[지금부터 내 힘 거부하지 마.]
<알겠습니다.>
녀석의 대답을 들은 로메른이 책을 건드리자, 그곳에 세계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커어어어어어억!>
그와 동시에 바즈라는 고통스러운 모양인지 몸을 덜덜 떨었다. 짝퉁 세계수가 흔들렸다.
[참아. 금방 끝나니까.]
그런 말처럼 책에는 어느새 짝퉁 세계수의 모습이 거의 다 그려진 상태였다.
잠시 후, 세계수의 뿌리까지 완벽하게 그려진 순간. 책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진짜 되네.’
[아. 이놈, 너무 커서 책 절반은 차지하는 거 같은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지만, 효과는 간단하다. 진이 짝퉁 세계수가 그려진 책 위로 손을 올리자.
‘제대로 작동하네. 세계수가 느껴져.’
[그럼 누구 작품인데.]
성서의 역할은 간단하다.
이 성서에 존재를 각인하면, 성서가 그 존재의 힘을 강화해 준다.
이게 가능했던 건 이게 악마가 만든 마도서였기 때문이다.
악마의 힘을 비틀어 존재 각인이란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럼, 다음 시작할게요.]
책에 그려진 세계수의 뿌리 쪽에 수식과 마법진이 그려진다.
<컥! 이건 대체!>
[참아. 좋은 거니까.]
존재 자체에 각인하는 마법진.
지금 각인되고 있는 마법진은 핵물질을 활성화하는 마법진이었다.
[진. 검성한테 상자 줘.]
‘알겠어.’
진이 검성에게 상자를 건네자, 검성은 그 상자를 들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속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좋아. 자리 잡았네. 그럼 발동한다.]
‘……진짜 괜찮은 거지?’
[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 * *
“대체 무슨 일이야?”
“어머니께서 뒤로 물러나라고 하셨다던데…….”
“설마 큰일이 있는 건 아닌지…….”
엘프들은 뒤로 물러나 세계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진정하세요. 물러나라고 하셨다면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당황하고 있는 엘프들과는 다르게, 지도자인 플로나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엔 믿음과 확신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믿음은 보답받았다.
쿠구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리더니, 곧이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어, 어머니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아니. 자라고 있다는 말은 부족했다. 실시간으로 나무가 커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나무는 마치 하늘까지 닿으려는 듯 커지기 시작했다.
“이 힘은 대체…….”
게다가, 단순히 어머니의 나무가 커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나무께서 가지고 있는 힘 또한 커지기 시작했다.
엘프의 영역도 전부 덮지 못했던 어머니의 힘이 엘프의 영역 전부를 덮었고, 그것도 모자라 진의 영지까지 그 힘이 퍼졌다.
“어머니시여.”
플로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무릎을 꿇자 나머지 엘프들 또한 무릎을 꿇었다.
마치 예전 기록에서나 보았던, 압도적인 위용. 모든 엘프가 기대하던 어머니의 나무 그 자체였다.
그때, 다시 한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의 나무에서 믿을 수 없는 힘이 뿜어졌다.
따듯한 초록빛을 띠고 있는 힘.
그 힘이 엘프들의 몸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녹색 힘이라면 자연의 힘이에요!”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힘을!”
“따듯해…….”
진이라면 저 초록빛으로부터 도망쳤겠지만, 엘프들에겐 어머니의 나무께서 주신 자연의 힘이었다.
그 힘을 받아들인 엘프 중 몇몇에게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불이 뿜어지거나.
“나, 날고 있어!”
날개도 없는데 하늘을 날거나.
“내 몸이 투명해졌어!”
몸이 투명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 외에도 다양한 힘과 능력이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거야.”
“어머니의 나무시여!”
세계수 주위로 엘프들이 날아다니고, 나무 위로 불이 뿜어지고, 얼음과 물이 뿜어졌다.
한편, 그 모습을 세계수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초능력이라니…….’
[초능력? 오. 느낌 있는데?]
‘아까 그거 괜찮은 거야? 독에 당한 건 아니지?’
엘프들이 피폭당해서 픽픽 쓰러지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괜찮아. 나쁜 기운은 제거하고, 몇 가지 조치를 했어. 게다가 원래 세계수가 하는 일이 엘프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해 주는 거니까 특별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어.]
초능력 엘프.
진짜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가능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튼 성공했으니까 다행이네.’
[진짜 너 악독한 건 알아줘야 해. 어떻게 이걸 이렇게 써먹을 생각을 한 거야?]
로메른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솔직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그건 아니지. 애초에 이걸 이렇게 써먹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진이 떠올린 방법은 간단하다.
성서에는 또 다른 기능이 하나 있다. 초능력을 각성한 엘프들을 성서에 각인하면, 진이 성서를 들고 있을 때 그 능력을 빌려올 수 있다.
‘서로 돕고 사는 거 아니겠어?’
[어. 음. 이건 서로 돕는 게 아니라 착취 아니야?]
진은 로메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악당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로메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