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오 마이 백작가
며칠 뒤.
소나가 아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연구소에 방문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백작님께서 이곳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달란 백작이었다.
“예비 성자님께서 달란 백작가를 위해 이렇게나 배려해 주셨는데, 제가 직접 찾아오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 그다지 공치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선 겸손을 떨어 줘야 했다.
“아닙니다. 감찰부를 부르지 않고, 저희에게 처리를 맡겨 주신 것만 해도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만약 감찰부가 불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셋째 공자는 개처럼 끌려갔을 테고, 대공자와 백작 또한 연결점이 있는지 수사가 들어갔을 것이다.
게다가, 한 번 연결점이 드러난 이상 감찰부는 계속 백작가를 주시할 게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큰 손해를 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백작가를 믿어서 자체 조사를 맡긴 건 아닙니다.”
“소나를 좋게 보신 모양이시군요.”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귀족답지 않으신 분이니까요.”
“귀족답지 않다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백작의 얼굴엔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 그게 못마땅했습니다. 귀족가에서 태어나 귀족답지 않다니…… 귀족으로 태어나 가문을 이끌기엔 큰 결점이었습니다.”
차라리 소나가 능력이라도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뛰어난 인재였다.
“한데, 성자님 덕분에 제 생각이 많이 변했습니다. 진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 건 이쪽입니다.”
“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이런 진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설명을 이어 갔다.
“지금 왕국은 정말 특수한 상황입니다.”
지식의 해방이 왕국 곳곳에 숨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특수한 상황.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중이었다.
“귀족들은 지식의 해방이 쉽게 진압될 거라 생각하지만, 전 지식의 해방과의 싸움이 더 심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말대로 왕국에선 지식의 해방을 그다지 위험하게 보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국가와 단체의 싸움이다. 그들이 아무리 위협적이라 해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성자님께서 그들을 쫓기 때문입니다.”
“예?”
“전 가주이기 이전에 독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독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의 이치? 그 해답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독이 강할수록 강한 해독제가 필요한 법입니다. 성자라는 해독제가 필요한 ‘독’이 그리 쉽게 사라질 거라곤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대체 이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인가 싶었는데.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자주 도와드리다 보니, 추기경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 영감님!?
여기서 영감님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자님께선 은연중에 해답을 보여주신다고요.”
제가요?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그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성자님을 만나 보니 알겠습니다.”
대체 뭘요?
아니. 전 그저 소나한테 짬 때린 것밖에 없었는데.
“앞으로 지식의 해방과의 싸움을 생각하면 귀족적이지 않은 이가 가문을 이끌어야 합니다. 귀족적이지 않기에 욕심과 욕망이 적고, 이 험난한 시기를 무난히 넘어갈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식의 해방은 사람의 욕심과 욕망을 파고든다. 셋째 공자가 가주직을 위해 합류한 것처럼.
“게다가, 소나는 싸움의 중심에 있는 성자님의 신뢰를 얻었으니, 제게 주신 해답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 아닌데요?
뭔가 커다란 오해가 있는 거 같았다.
하여간 영감님과 관련된 문제는 뭔가 오해의 사이즈가 너무 커다랬다.
“달란 백작가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가주를 세울 생각입니다.”
진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소나를 가주로 만들었다.
[나쁘지 않은데? 소나가 너한테 큰 빚을 지고 있으니까. 이건 그냥 써먹기만 하면 될 거 같은데?]
[그것도 그렇네요?]
[허허. 다들 귀족이 아니라 그런지 뭐가 진짜 중요한 건지 모르는 모양이군.]
[뭐?]
[백작의 말은 세인트 남작의 세력에 포함되고 싶다고 말한 걸세. 유능한 자군. 최고의 판단을 했어.]
더 놀라운 건, 이게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란 점이었다.
‘그러니까, 백작이 통으로 내 부하나 다름없다고?’
[천박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다네. 지원을 요청하면 모든 지원을 해 줄 것일세.]
개, 개꿀?!
* * *
백작이 다녀간 그날 저녁.
피곤한 얼굴의 소나가 연구소로 돌아왔다.
“성자님.”
그녀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했다.
“괜찮습니다. 동생을 위해 당신은 최고의 선택을 한 겁니다.”
“······.”
그녀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인가.’
가문이 뒤집힐 만한 일이었다.
그녀가 나선다고 해서 셋째를 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동생을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나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소나 님 덕에 그분은 편안하셨을 겁니다.”
그녀는 동생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나선 것이다.
“아직 18살밖에 안 된 아이였어요.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아니.
진이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가주가 되기 위해 자신의 누나를 죽이려고 한 녀석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 아니. 가주가 되기 위한 치밀한 계획에 가까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우세요. 모든 슬픔을 쏟아내세요.”
“……흐윽.”
그녀가 감정을 쏟아낼 수 있도록 돕고, 그 감정의 방향을 살짝 수정해 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지식의 해방을 더 빠르게 무너트렸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아, 아니에요. 그건 성자님 탓이 아니에요. 그저, 지식의 해방 때문이에요.”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소나님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얼른 저들을 무너트리겠습니다.”
“저, 저도 돕고 싶어요. 지식의 해방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만 가져 주셔도 충분합니다.”
앞으로 가주가 됐을 때, 진을 도와줄 테니까.
“지금은 일단 동생을 추모하며, 슬픔을 쏟아내세요.”
그녀는 진이 말이 시발점이 된 것처럼 다시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새벽쯤이 돼서야 그녀는 감정을 추슬렀다.
“죄, 죄송해요.”
그녀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을 퉁퉁 붓고 코끝이 새빨개졌다.
“괜찮습니다.”
“제게 일을 맡겨 주셨는데, 이런 추한 모습을 보여서······.”
“아닙니다. 소나 님은 제가 생각한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소나님께 맡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말에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퉁퉁 부은 눈으로 수줍어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다.
그렇다고 웃을 순 없는 노릇이니, 진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이 흐르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동생은 알고 있는 게 없었어요. 그저 두루뭉술한 약속만 받은 상태였어요.”
확실히 믿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뭐, 저 돌멩이가 어디서 왔는진 알고 있으니까 그리 문제가 될 건 없어.]
‘하긴, 셋째가 지식의 해방의 거점을 알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지.’
따지고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가주가 되지 못한 셋째에게 큰 정보가 있을 리도 없었다.
“예. 믿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그녀가 깜짝 놀랐다.
“저, 정말 괜찮으세요?”
“예. 전 소나 님이 대충 일하실 분이 아닌 걸 알고 있으니까요.”
“……감사해요.”
그녀는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신뢰란 이렇게 쌓는 거지.’
[자네 신뢰란 단어를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진은 검성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 마무리만 남았네요.”
“마무리요?”
“예. 여기서 사건을 덮었으니, 이 물건도 존재해선 안 됩니다.”
“아……!”
솔직히 말하면, 소나에게 짬 때리고 이 사건을 덮은 가장 큰 이유는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이 물건은 알려지면 안 돼.’
이단 심문관은 어떻게 한다고 쳐도, 이게 왕국에서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진다?
그런 끔찍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이 물건의 존재를 누군가 더 아는 상황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건 제 일생일대의 연구 주제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새로운 걸 연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거요?”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심심해서 주위에 있는 자료 몇 개를 살펴봤습니다.”
“제 자료를요?”
“예. 논문화시켜 놓으신 것만 봤습니다.”
논문화된 건 공개된 자료라는 뜻이었으니 딱히 큰 무례도 아니었다.
“논문 주제 중에 재밌는 게 있어서 조금 생각해 봤습니다.”
진은 양피지를 하나 꺼내서, 빠르게 수식을 써 내려갔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던 소나의 표정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 이건 대체!?”
그녀는 놀란 와중에도 양피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 이 정도는 알아볼 눈이 있다는 거야? 여기까지만 쓰자. 더 써줄 필요 없겠어.]
이 수식은 로메른이 알려 준 것이다. 미래에 ‘지식의 해방’ 쪽에서 사용하는 독 중 하나였다.
‘이래 놓으면 해독제도 알아서 생산되겠지.’
그녀는 연구할 거리가 넘치고, 진은 미래를 위해 대비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수식이에요. 대체 이걸 어떻게……?”
“우연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 진의 말을 그녀는 믿지 않았다.
“……진짜 천재.”
“예?”
그녀는 진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진을 바라봤다.
그저 수식 하나 던져 주고 돌멩이를 챙겨 갈 생각이었는데, 진은 다음 날 아침까지 그녀에게 붙잡혀서 수식의 아름다움에 관해 들어야 했다.
‘그래도 무난하게 받아 냈네.’
진이 돌멩이를 챙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진은 곧장 돌멩이를 들고, 엘프들의 영지로 넘어왔다.
[진짜 넌 가끔 보면 그 발상이 무서워. 이걸 진짜 시도해 보네.]
[계산대로면 충분히 가능해요.]
정령들은 잔뜩 들떠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진은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했다.
‘결국, 내가 먹지는 못하는 거야?’
[이걸 사람이 어떻게 먹어!]
[포기하세요. 진. 절대 못 먹어요.]
핵물질을 먹어서 핵 친화도를 올려서 핵의 정령을 소환하면?!
마음에 안 들면 핵폭발 보여 주고, 지식의 해방을 한 방에 쓸어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 모든 망상이 무너졌다.
‘하다못해 슈퍼 파워라도 손에 넣었어야 했는데.’
[그놈에 슈퍼 파워는 무슨!]
슈퍼 파워에 관해 설명을 해 줬을 때, 로메른의 반응이 상상 초월이었다.
‘화염 인간이 되거나 고무 인간이 되거나 녹색 괴물이 되는 것처럼 엄청난 능력을 얻는 거지.’
[그게 뭐야? 마법이면 다 되는 건데. 가성비 최악이잖아. 몸의 구조는 어떻게 되는 건데? 법칙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때 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이 말뿐이었다.
‘이과 다 죽었으면.’
하여간 로망이 없는 친구였다.
그런 로망이 없는 친구는 진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은 먹지 못하지만, 세계수라면?]
세계수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이 계획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