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76화 (76/210)

076. 숲을 되찾다

‘별로 어렵지 않지? 그냥 육체 개조 파박 하면 끝이잖아.’

심장을 바꾸는 것도 가능한데, 머리카락 정도야 어려울 게 없었다.

[뭔 소리야?]

한데, 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어?’

[생각을 해 봐. 여럿이 비밀 단체를 만들어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을 텐데, 왜 가발일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흑마법사들에게 의뢰하면 깔끔한 개조는 불가능하더라도 가능했을 터, 어째서 가발을 사용했을까?

이유는 하나뿐이다.

‘어려운 거야?’

[어. 끔찍하게 어려워. 육체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는 거 알지?]

‘설마…….’

[육체를 개조해도 원래대로 다시 빠지기 시작해.]

‘……끔찍하네.’

육체 개조를 해 봐야 머리가 빠지는 그 지옥 같은 과정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자세히 알고 있네?’

[나한테도 이 연구 의뢰가 들어온 적 있었거든.]

‘……뭐?’

[탈모에 관한 연구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졌어. 왕 중에도 이걸 연구한 자들도 있었으니까.]

로메른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지구에 있을 때 지식이 떠올랐다.

로마 최고의 권력자였던 카이사르.

그 또한 탈모가 극심해 원인과 치료 방법을 연구했다는 이야기를 세계사 수업 중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당연히 그 수업을 진행했던 분도 탈모를 겪고 계셨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더는 웃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염원을 담은 그야말로 ‘세기의 과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연구 결과는 어땠어?’

[단순히 두피 쪽만 변화시킨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더라고.]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탈모가 단순히 두피 쪽 문제만 해결된다고 끝나는 게 아닌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낸 해결책이 머리카락을 일일이 심는 거였어. 고통스럽고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긴 했는데…….]

‘그건 효과 있었겠네.’

[어. 사람에 따라 다시 빠지기도 했는데, 효과는 제일 좋았어. 문제는…….]

어떤 문제인지는 진도 대충 예상이 됐다.

‘심은 거만 남고 나머지가 빠졌단 소리지?’

[정답이야.]

지구나 이곳이나 ‘해결 방향’은 비슷했다.

머리에 머리카락을 되돌린다는 면에서 보면 이 방향성이 맞긴 하지만,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두피에 꼭 머리카락을 심어야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머리카락을 되돌려 달라는 건데, 왜 딴 걸 심어?]

그건 고정 관념이 아닐까?

‘모두 머리카락을 되찾고 싶은 거잖아. 그게 꼭 진짜 머리카락일 필요 있어?’

[……이해를 못 하겠는데?]

‘가발은 누가 봐도 머리카락처럼 보이잖아.’

[인조 모발을 만들자는 거야?]

‘그렇지!’

진짜 머리카락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머리카락으로 보인다면 그건 진짜 머리카락이 된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그건 완전히 사기일세!]

검성이 버럭 끼어들었지만, 진의 생각은 달랐다.

‘좋은 지적이야. 근데 사기가 되려면 들켜야 하잖아. 안 들키면?’

[사기가 아니지. 발상은 나쁘지 않아. 뭐 떠오른 거 좀 있어?]

‘연구 방향을 바꾸자. 진짜 숲을 만들어 주는 거야.’

[진짜 숲?]

진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머리카락을 심어 주고, 그들을 우리 편으로 회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건 사실 이득이라고 볼 수 없다.

그저 당연한 일 그 정도였다.

진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머리카락이 심어지면 나한테도 뭐가 떨어져야지.’

머리카락을 심어 준 뒤, 그게 진에게도 이득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간접적인 이득이 아니라 직접적인 이득이.

[동의. 우리가 무슨 성자도 아니고, 무상으로 일해 줄 순 없잖아.]

[맞아요. 굶어 죽는 이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머리카락을 찾는 이들을 도와주는 거예요.]

[……루나 자네마저!]

검성은 충격이라도 먹은 듯 소리쳤지만, 진이 생각하기엔 루나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러니, 인공 모발도 아무거나 사용할 순 없었다.

‘온전히 내 거 중에 하나를 인공 모발로 가공해야 돼.’

그래야 진이 이득을 꾀할 수 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로 이거였다.

그것은 새하얀 실뭉치였다.

‘단순한 실뭉치가 아니지.’

진이 피를 한 방울 떨어트리자, 마치 벌레처럼 실뭉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괜찮네.’

로메른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가끔 보면 나보다 네가 더하다니까.]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넌 악당을 해도 대성했을 거다.]

진은 녀석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눈앞의 실뭉치에 집중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거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지?’

[써먹을 수 있어. 식물이니까 머리카락처럼 보이게 바꾸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고.]

이 실뭉치는 짝퉁 세계수의 뿌리였다.

지금에야 세계수인 척하는 거지, 녀석의 본질은 혈화목(血花木)이었다.

‘피만 있으면 죽을 리 없고, 통제는 우리 짝퉁 세계수가 할 수 있을 테니까. 완벽하네.’

숲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무뿌리를 선물한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진은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엘프 영지에 있는 짝퉁 세계수 내부로 들어왔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들어가자마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변했네?’

<제 본질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래?’

<예. 아이들을 돌보며 숲을 가꾸는 일은 하루하루 너무 보람차고 즐겁습니다.>

녀석은 지가 세계수인 줄 알고 있었다.

처음엔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지만, 지금 보니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녀석이 아직도 검의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면, 지금 할 부탁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좋아. 세계수인 너에게 부탁이 있어.’

<부탁이라니 그저 명을 내리시면 됩니다. 주인님.>

‘어. 음. 이게 명령을 내리면 좀 곤란한 거라.’

<전 세계수. 주인님께서 내리신 그 어떠한 명도 수행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사양할 필요 없을 거 같았다. 과몰입하고 있는 녀석에 맞춰 부탁을 전했다.

‘아이를 낳아 줬으면 하는데.’

<……예? 주, 주인님. 그 제가 잘못 들은 거 같습니다.>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반응에 진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 미친 나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예, 예!?>

‘너한테 아이는 씨앗 아니야? 씨앗이 필요하다고, 이 미친 나무야!’

<…….>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예. 주인님. 그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세계수의 씨앗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다시금 고풍스럽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봐야 늦었다.

게다가 녀석이 말한 것과는 달리 애초에 이건 세계수의 씨앗이 아니었다. 오히려 혈화목의 씨앗에 가까운 물건이다.

[세계수는 평생 2개 정도의 씨앗밖에 못 만들어.]

괜히 엘프들의 보물 중에 세계수의 씨앗이 있는 게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이걸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 생산해.’

컨셉충이 몰입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예. 주인님.>

짝퉁 세계수의 씨앗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 * *

며칠 뒤.

찰스 백작이 다시 한번 방문했다. 그의 얼굴엔 옅은 기대와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찰스 백작님. 오셨습니까?”

짧은 인사가 오간 뒤, 이야기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벌써 완성이 된 겁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완성됐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진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법입니까? 오래 걸려도 괜찮습니다. 이미 늦는다고 말해 두었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더 좋군요. 완벽합니다.”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을수록 바빠지게 된다. 이런 이들에게는 시간이 금이다.

괜히 시간 때문에 시술이 늦춰져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럼 바로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설명 부탁드립니다.”

진은 책상 위에 작은 씨앗을 하나 올렸다.

[저거 만든다고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수많은 계량을 거친 로메른 표 짝퉁 세계수 씨앗.

마치 사기꾼이 파는 물건 같은 이름이지만, 그 효과는 확실하다.

“이건 무엇입니까?”

“숲을 만들 씨앗입니다.”

진의 말에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 씨앗 하나면 해결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이 씨앗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는 한참 동안 씨앗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부탁드립니다.”

진의 이름값과 숲을 되찾고 싶다는 열망이 그를 수락하게 만들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한 뒤, 곧장 가발을 해제했다.

맨들맨들한 맨머리가 유난히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따끔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진은 씨앗을 그의 정수리 쪽에 가져갔다. 이다음부터는 로메른의 몫이었다.

[시작한다.]

로메른의 말과 함께, 씨앗에서 실처럼 얇은 뿌리가 튀어나왔다.

“흡!”

뿌리가 그의 두피 안으로 파고들자, 그는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통증은 처음뿐, 그다음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취 효과 잘 드는 거 같은데?’

마취는 필수였다. 머리에 숲을 만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진은 눈을 발동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뿌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뿌리는 곳곳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퍼진 뿌리는 이내 두피 전체에 자리를 잡았다.

씨앗은 껍질만 남았다. 씨앗은 뿌리를 담고 있을 뿐, 나무로 성장하는 건 아니었다.

‘이게 진짜 될 줄이야…….’

로메른이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했다.

[뿌리 식물을 이용하면 두피에 나무를 심는 것도 가능하지.]

두피 안에 있는 뿌리가 곧 나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다음으로 가자고.]

이건 고작 시작일 뿐이었다.

뿌리에서 줄기들이 자라기 시작하더니, 나올 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두피에 가득한 모공이 그 탈출구였다.

그곳에서 줄기가 자라났다.

“이, 이건.”

그는 무언가를 느낀 건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래 머리색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이 가발처럼 짙은 갈색이었습니다. 설마…… 색이 다른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짙은 갈색 머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물론, 개 뻥이었다. 두피 위로 올라온 머리카락 색은 흰색이었다.

애초에 이건 뿌리일 뿐 그의 머리카락이 아니었으니까.

[짙은 갈색이라. 잠깐만 기다려봐.]

로메른은 뿌리에 접촉해 무언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두피에 올라온 머리카락 색이 짙은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후 머리카락이 좀 자라났을 때, 그에게 거울을 보여 주었다.

“…….”

감탄을 터트릴 줄 알았는데, 상상도 못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을 흘리다, 감정에 벅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리가, 머리가…….”

그는 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본인의 머리인데, 제게 물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수북하다 못해 울창한 정글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머리를!

“이게 대체 어떻게…….”

그는 머리를 조심스럽게 당겨도 보고 쓸어 넘기기도 했다.

“진짜 머리카락이 자라다니.”

아무리 만져보고 확인해 봐도 이건 진짜 머리카락이었다.

“헤어스타일을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스타일을 떠올려 보세요.”

“그, 그런 것도 가능한 겁니까!?”

진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무언가를 염원했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정상 작동하네.’

[당연하지. 이를테면 기생식물이나 마찬가지니까. 숙주의 바람 정도야 이뤄 주지.]

‘쓰읍. 좋은 단어 많은데 기생 식물이 뭐야, 끔찍하게. 그냥 숲이라고 하자.’

그 말에 로메른을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로메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의 헤어스타일이 완성됐다.

잔뜩 힘 줘서 뒤로 넘긴 올백 머리.

“……머리가 빠질까 봐 이건 한 번도 안 해 봤었습니다.”

하긴, 가발도 올백 스타일은 티가 났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 제 아들도 숲을 잃고 있습니다. 제 아들도 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생각해보니 탈모는 유전이다.

대대손손 진에게 얽매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여러분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숲을 찾는 숭고한 여정을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성자님! 감사합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다시 한번 흘렸다.

부모란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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